버닝이 일상을 침해할 만큼 잘 타면서 몇 년을 보냈다. 이제 민간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는 글렀다 싶을 만큼.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정리해 보고 싶었다.
2001년 : 슬레이어즈
2002년 : 반지의 제왕, 미라쥬
2003년 : 이노우에 카즈히코(인지 타치바나노 토모마사인지)
2004년 : 강철의 연금술사
2005년 : 파푸와
2006년 : 엘리자베트, 올렉 빈닉
1년에 하나씩만 버닝한 것도 아니고, 한 해 버닝했다고 그 다음에 버린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한 해에 한 작품(혹은 그 이상)을 키워드로 골라봤다. 저렇게 6년을 살았다.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을 아주 제대로 달렸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내가 처음에 이 바닥에 발을 들인 것은 리나와 제르가디스 커플링에 빠진 게 나 한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모 최유기 동에서 팬픽도 읽고 잡담도 하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참, 슬레이어즈도 당연히 이런 게 있겠네? 하고 검색을 했더니 린젤이 뜨더라. 내가 그 때 얼마나 기뻤는지는 말을 안 해도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다 알 거다. 혼자서 버닝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 함께 이야기할 사람이 생겼다는 기쁨.
그러니까 굳이 동인녀 타이틀을 달지 않았어도 나는 계속 나 혼자서라도 망상을 하고 불타면서 잘 살았을 거다. 그렇지만 함께 불 탈 사람이 있다는 것과, 세상에 2차 창작이라는 재미난 게 있다는 걸 알고 나니 그만둘 수가 있어야지. 그 때는 진짜 매일 밤을 새면서 팬픽을 읽고 채팅을 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리나와 제르가디스와 가우리가 그렇게 많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그렇게 다른 인물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쓰는데 그게 또 다 아귀가 들어맞는 거다. 재밌지 않은가? 자기 작품을 쓰는 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더라 이거다. 그래서 나도 내 제르가디스와 리나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저렇게 명확하게 인지하기 시작한 건 실은 2002년 말 정도고. 사실은 그냥 재미있었다.
저러다가 BL이나 야오이를 보기 시작한 게 2002년 부터일 거다, 아마. 반지의 제왕 때 어렴풋이 야오이 팬픽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으리라. 처음부터 야오이건, 남녀의 로맨스건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었고(제로스가 엮인 커플링을 좀 봐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실 제로스 성별이 좀 애매모호하지 않은가.) 반지의 제왕에는 참으로 많은 커플이 있었다. 내가 그 때 모 동 뒤페이지만 안 봤어도 지금 에로하드가 어떻고 이런 길을 가지는 않았을텐데. 그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 때 굉장히 충격이 컸다. 정말 온갖 커플링과 온갖 씬이 있었다.
그 때 좋아하던 소설(제목에 물고기가 들어간다)을 읽으며 작가님 홈에서 뭘 듣다가 그 곡의 가사가 궁금해서 검색하다 걸린 페이지가 s**a 님의 홈이었는데 거기서 미라쥬를 발견했다. 미라쥬 볼 때는 학회별로 발표하라던 소논문을 손 봐야 하는 날까지도 미라쥬를 읽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저 미라쥬 때부터 나는 창작야오이도 읽을 수 있게되고, 그리고 BLCD까지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야오이를 소비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퀴어랑 야오이도 잘 구분하지 못했고, 실사 커플링에 대한 인식도 굉장히 좋지 않았다. (풋)
사실은 야오이라고 나온 걸 그다지 많이 보지는 못 했다. 실은 나에게 야오이는 개그로 보일 때가 많아서. 실은 나는 신파 내지는 꼬이는 연애물이 좋은 거지 야오이건 BL이건 백합이건 상관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 것은 최근의 일.
그 다음이 성우계. 머나먼 시공 속에서라는 게임을 좋아해서(하지만 게임을 해 본 적 없음) 타치바나노 토모마사를 연기하신 이노우에 카즈히코 씨에게 버닝했다. 이 때 CD를 열심히 들어서 일어공부에 조금 도움이 되었다마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캐릭터는 캐릭터, 성우는 성우. 내가 원래 캐릭터에 관심이 있지 그것을 연기한 배우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저 분의 연기는 좋아한다. 이 때부터 자신이 중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리고 파푸와. ......저기서부터 뭐가 확 바뀐 느낌이 든다. 내 인생 최초의 18금도 저것이었고 내가 처음으로 동인지를 내면 저 작품이라고 생각한 것도. (그 전에도 내고 싶은 책이 있긴 했는데 여러 작품을 가지고 한 주제로 글을 쓰는 거였다.)
엘리자베트 버닝이야 올 한 해 계속 해 온 짓이었고, 처음으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뮤지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독일어에 대한 악감정도 씻게 되었다, 이 정도면 될까나.
저렇게 불타서 뭐가 남았냐고?
그야 굉장히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시야도 넓어졌고, 인터넷에 둥지도 틀게 되었으니 남은 것은 많다. 하지만 별로 발전한 건 없다고, 가끔 생각한다. 창작글은 극소수, 설정만 고치고 고친 게 몇 년인지 모른다. (몇 개 되던 설정을 합쳐서 한 이야기로 만들게 되었으니 그건 잘 된 일이다 싶지만) 써야 된다는 걸 알면서 안 쓰고 있으니 글 실력이 늘 리가 없지. 게다가 길이 바뀌었다. 너무 잘 불탄 덕에 지금 학교 친구들 만나서 원래 순문학 지망이었다고 그러면 아무도 안 믿는다. 고등학교 다닐 땐 장정일 팬이었고 지금도 이용악이니 백석이니 하는 시인들도 좋아하고 한국 소설도 꽤 읽는데 어째서 아무도 안 믿는 거냐, 고 전에 쓴 적이 있는데 당연하지, 한 게 없는데.
내 버닝은 대개 내가 만들기보다는 소비하는 쪽에 가깝다. 다른 사람의 감상이나 2차 창작을 읽거나. 그러니 내게 남는 건 아주 적다. 자신이 쓸 줄 아는 거랑 남의 글을 읽는 거랑은 별개의 문제.
내가 글을 못 쓴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이럴 때다. 나는 체계적으로 자기 생각을 정리해서 쓰지를 못한다. 이건 치명적인 문제다.
내가 버닝하면서 뭘 잃었다고 생각할 때가 이런 때이다. 남의 버닝을 소비하는 게 일이 되다 보니 자기 컨텐츠가 부족한 거다.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왜 좋아하는지는 말을 안 하니까, 분석이고 뭐고 될 리가 없지. 자기가 못 하는 게 짜증나는 것도 문제고.
뭐 게을러서 그런 것도 맞긴 맞는데, 기본적으로 글 쓰는 속도가 느리고, 자기 생각을 어디에서건 잘 말하려 들지를 않는 탓도 크긴 한데, 진짜 문제는 자기 글을 자기가 읽어도 재미가 없는 것이긴 하다.
아, 그리고 내 경우를 봐도, 동인녀라는 게 굳이 BL에 열광한다거나, 보는 것마다 커플링 못 해 안달이 난 여자를 지칭하는 말은 아니다. 내가 썩은 눈으로 보는 작품은 몇 개 되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나를 동인녀라 부른다. 2차 창작을 하거나 서브 컬처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동인녀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나중에 저기에 대해서 제대로 논해 보고 싶다만. (나는 한 때 동인계에서 쓰이는 은어나 속어들로 논문을 써 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니면 이 독특한 하위 문화에 대해서.)
아무튼 이렇게 불탔다.
뜬금없지만 그래서 결심한 내년도 목표. 내년에는 고전동인 페이지를 만들 것이고, 본 작품에 대해 조금이나마 체계적으로 감상글을 써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