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깨비

원작 : 기형도 <진눈깨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제복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나라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쌍두 독수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침실을 나오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죽음이여 
이런 귀가길은 어머니에게나 허락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토해낸 비명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마차가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침대 머리맡에 낯선 남자가 나타난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인 사람들이 춤을 춘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을 이제 다 살았다, 진눈깨비



제가 진즉에 루돌프를 위해 한 편 쓰고 싶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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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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