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 ㄱㄱ 양과 <무적자>를 봤다.
나 <영웅본색> 안 봤다. 그게 이렇게 아까울 줄이야.
(어려서 대중문화를 코끝으로 무시하면 자라서 교양이 부족함을 한탄하며 울부짖게 되어 있다. 남들 할 때 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
.......보고 봤으면 좀 나았을까? 홍콩 느와르만이 가지는 맛이란 게 있는 법이니 그건 또 그것대로 다른 맛이 있겠지. 아니 뭐 그런데 이 영화는 사실 영웅본색의 틀을 빌린 다른 영화다. 느와르고 나발이고 그런 거 없다.
형제의 사랑에 대해 논하고 가망없는 짝사랑에 목을 맨 남자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기 위해 만든 영화였다.
농담 아니다. 이렇게 대놓고 호모호모한 영화가 극장에 걸리다니 세상이 썩었다. 정말이다. 내가 오버하는 거 아니다.
감독 인터뷰를 읽어보라. 내 발언이 온건해 보일 걸? 한 대목을 인용하자면
"내 입장에서는 남자들의 멜로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형은 동생을 너무나 짝사랑하는데 동생은 자기 마음을 안 열고, 영춘 역시 혁을 향해 함께 다시 일하자며 사랑을 구걸하는데 그는 계속 묵묵부답이고. 그리고 태민은 그런 그들에게 다시 고향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괴롭힌다. 그럴 때 나는 ‘이런 세상에서 살아서 무엇하리?’ 하는 기분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내 다른 영화들의 정서나 결말과 비교하면 좀 차이점이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무적자>는 약간 좌파영화이면서 퀴어영화이기도 하다. (웃음)"
난 저 인터뷰가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가망없는 걸 알면서도 남자한테 목숨 건 남자가 취향이어서, 송승헌 안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낡고 때에 찌든 코트 자락 날리며 총 쏘는 모습이 참 고와보였다. 나는 저 남자를 모든 걸 걸고 사랑해봐야 아무 것도 안 돌아오는데, 아니 그런 줄 알아도 모든 걸 걸고 사랑하지만, 너는 동생이라는 이유로 아무 것도 안 해도 사랑받으면서 어떻게 네 형을 그렇게 매도할 수 있냐고 외치는(대사에 왜곡 약간 있지만 내용상 별 차이 없어요) 부분에서 살짝 모에했지. 네 사실 짝사랑 네타 무진장 좋아합니다 하하.
사실 예쁘긴 주진모가 예뻤다. 경국지색이란 게 저런 것이려니. 모든 남자들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다니 야오이 주연의 도리로고. 공이건 수건 상관없다. 저런 타입의 남자가 멀쩡한 사람의 인생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법.
그런 영화였다.
오후 : 모 마스라오 님과 영국근대회화전 봤다.
............너희 사람 싫어하지? 사람한테 관심 없지? 풍경만 미친 듯이 파는 것까진 좋다 이거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람이 있던 풍경이라는 느낌이 없을까. 인간이 제거된, 황량하고 거친 자연이 잔뜩 있더라. 프랑스 애들은 그나마 좀 인간의 눈으로 본 자연이라는 느낌이 있어 안심이 되는데 영국 것들이 그린 그림은 보고 있자니 불안하기까지 해서.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좋았다. 사실 난 자연이 아름답다는 말을 반만 믿는다. 자연은 무섭고,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시에서 태어나서 자연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자연이 무서운 것도 있고, 인간의 눈으로 한 번 거른 자연에 대한 거부감도 조금은 있고. (곰이 귀여워? 걔들 맹수다. 강이 아름답다고? 이번에 비 오고 강 보니까 그래도 아름답던?) 아무튼 이 사람들에게 인간은 풍경 속에 넣기는 이질적인 존재였나보다. 게다가 폐허 그림은 왜 그리 많던지. 그래서 취향이라면 좀 그런가? 아니 나도 사람 사진 그다지 안 좋아해서. 사람이 풍경의 일부가 되는 그림은 그나마 낫지만.
(그래서 사진 찍는 걸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그건 또 다른 이유가.)
여름의 빛, 오후의 하늘, 겨울의 바람까지 화폭에 담은 지독한 것들이었다. 나도 아침햇살이 낮보다 색이 좀 더 짙어서 좋아하고 노을은 아침노을이 저녁노을보다 예뻐서 좋다는 식으로 생각을 해 본 적은 있어서 저런 걸 그리고 싶어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저 인간들은 못 당해내겠다. 그런 변태가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니 노을지는 하늘, 맑은 하늘, 구름 낀 하늘, 온갖 하늘이 다 나오지. 당분간 하늘을 안 봐도 되겠다는 모 언니 감상을 이해했다. 아니 안 봐도 될 거 같다. 진짜보다 더 이상화된 하늘이었어!
이렇게 정교하게 자연을 모방하려고 애썼는데 카메라가 나온 순간 미술은 얼마나 허무해졌을까 싶더라. 그래서 그림은 사진이 모방하지 못하는 곳으로 훅 건너가 버린 거겠지. 문학도 그런 식으로 괴상한 곳으로 건너가 버렸고.
영화 보고 은혼 이야기 좀 하고 미술 이야기 좀 하다가 집에 와서 포스팅 남기고 잔다. 아 그리고 키사라 님이 모종의 포스팅 하면 나 글 쓰기로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