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해결사네 꼬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주에선 이런 개울물을 보지 못하기나 한 듯이. 벌써 며칠째 소녀는 집에서 빈둥거리지도 않고 이 개울가에서 물장난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개울 기슭에서 하더니, 오늘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서 하고 있다. 소년은 비키라고 퉁명스럽게 고함쳤으나 소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소녀를 발로 한 대 차려고 달려갔으나 불행히도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길을 비켜주면서 소녀가 소년을 행해 메롱,하고 혀를 내미는 것을 소년은 분명히 보았다. 뒷골이 땡겼다.
다음 날은 좀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이 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빨간 중국식 옷자락을 걷어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한참 세수를 하고 나더니, 이번에는 물 속을 빤히 들여다 본다. 얼굴이라도 비추어 보는 것이리 라. 갑자기 물을 움켜 낸다. 고기 새끼라도 지나가는 듯. 잡아서 구워먹기라도 할 작정인가. 소녀는 소년이 개울둑에 앉아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날쌔게 물만 움켜 낸다. 그러나, 번번이 허탕이다. 그대로 재미있는 양, 자꾸 물만 움킨다. 어제처럼 개울을 건너는 사람이 있어야 길을 비킬 모양이다. 그러다가 소녀가 물 속에서 무엇을 하나 집어낸다. 하얀 조약돌이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팔짝팔짝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간다. 다 건너가더니만 홱 이리로 돌아서며,
"이 등신새끼야!"
조약돌이 미친 듯한 속도로 날아왔다. 정통으로 맞았으면 죽었을 거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몸에 익은 동작이 목숨을 살렸다. 우산을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 갈밭 사잇길로 들어섰다. 뒤에는 청량한 가을 햇살 아래 빛나는 갈꽃뿐. 이제 저쯤 갈밭머리로 소녀가 나타나리라. 나오기만 하면 검으로 목을 베어주겠다고 결심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됐다. 그런데도 소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발돋움을 했다. 그러고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됐다. 저 쪽 갈밭머리에 갈꽃이 한 옴큼 움직였다. 소녀가 갈꽃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천천한 걸음이었다. 유난히 맑은 가을 햇살이 소녀의 갈꽃머리에서 반짝거렸다. 소녀 아닌 갈꽃이 들길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저 미친개같은 계집애가 꽃 같다니 아니될 말씀. 소년은 머릿속에 떠오른 삿된 생각을 머리를 부르르 흔들어 지웠다.
"야, 짱깨. 안 어울리게 꽃은 왜 꺾어?"
"모르는 소리 마라 해, 의뢰인이 이거 꺾어오랬다 해."
"그 의뢰인은 미쳤냐? 왜 그런 걸 시켜? 쏠리게."
"니가 직접 물어보세요. 아주 가지가지한대 해."
소년은 이 갈꽃이 아주 뵈지 않게 되기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문득, 소녀가 던진 조약돌을 내려 다보았다. 물기가 걷혀 있었다. 소년은 조약돌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에 만나면 이 돌로 머리에 구멍을 뚫어주리라고 결심했다.
다음 날부터 좀더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았다. 아까웠다. 다음에 만나면 꼭 두들겨패주리라 신선조 1소대장의 명예를 걸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소년에겐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한 어떤 날, 소년은 전에 소녀가 앉아 물장난을 하던 징검다리 한가운데에 앉아 보았다. 물 속에 손을 잠갔다. 세수를 하였다.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뽀얀 얼굴이 그대로 비치었다. 본인이 봐도 참 괜찮은 얼굴이다. 흐뭇하게 보고 있자니 물에 이상한 것이 비치기 시작했다. 나뭇가지가 비치고 가지에 꽁꽁 묶여 거꾸로 매달려 있는 고릴라 국장의 얼굴이었다. 기겁을 하고 일어났다. 개울 건너 나뭇가지에서 국장이 손 대신 머리를 흔들었다. 바보의 표본이었다.
"여어, 소고~. 순찰 도냐?"
"곤도 씨, 거기서 뭐 하십니까?"
"응? 오타에 씨가 부탁해서. 여기 매달려서 죽어버리래."
"그게 부탁입니까, 협박이죠."
"아냐 웃으면서 말했다고."
"웃으면서 멱살은 안 쥐고요?"
"윽."
소년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다시 물을 보고 있노라니 물에는 참으로 해괴한 것이 떠올랐다. 고릴라 국장이 황홀한 표정으로 아아, 오타에 씨 이제 죽어도 소원이 없소 어쩌구 하는 망발을 하고 있었고 그 신파치의 누님이 보살 같은 미소를 지은 채 국장을 샌드백으로 삼아 야차 같은 펀치를 날리고 있었다. 소년은 두 손으로 물 속의 그림자를 휙휙 저어 없애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 일어나고 말았다. 소녀가 이리로 건너오고 있지 않느냐.
'저 망할 년이 숨어서 우릴 엿보고 있었구나.' 그 얼굴에 떠오른 건 비웃음이었다. 어디서 배운대로 진선조가 어쩌네 하고 또 시비를 걸겠지. 괜히 짜증이 난 소년은 달리기를 시작했다. 소녀도 뛰어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중에 발차기를 날렸다. 소년의 발이 소녀의 얼굴을 걷어찬 건 좋았지만 착지하다 디딤돌을 헛디뎠다. 한 발이 물 속에 빠졌다. 그만 돌 위에 엎어졌다. 이게 다 이 망할 짱깨 계집애 때문이다. 제복을 말릴 데가 있었으면 좋겠다. 물 밖으로 나왔다. 이 쪽 길에는 갈밭도 없다. 메밀밭이다. 전에 없이 메밀꽃 냄새가 짜릿하게 코를 찌른다고 생각됐다. 미간이 아찔했다. 찝찔한 액체가 입술에 흘러들었다. 코피였다.소년은 한 손으로 코피를 훔쳐내고 소녀를 쥐어패주려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소녀는 없었다. 대신 어디선가 '바보, 바보' 하는 소리가 자꾸만 뒤따라오는 것 같았다. 환청이 아니었다. 코피를 닦고 와 보니 언제 갖다 놓았는지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녹음기를 걷어찼다.
토요일이었다. 마침 비번이었다. 개울가에 이르니, 며칠째 보이지 않던 소녀가 건너편 가에 앉아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모르는 체 징검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방심하고 있을 때 뒤통수를 찍어서 물에 빠뜨린 다음 머리를 밟아줄 작정이다.
"야."
못 들은 체했다. 저 망할 것이 눈치를 챈 모양이다. 그냥 조용히 둑 위로 올라간다.
"야, 거기 바보, 이게 무슨 조개냐?"
자기도 모르게 돌아섰다. 소녀가 신나게 웃고 있었다. 얼른 소녀의 손바닥으로 눈을 떨구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그럼 이거 먹을 수 있는 거냐?"
"몰라."
"넌 나이 먹어 그런 것도 모르냐? 내가 부끄럽다해."
"닥쳐 사이비 짱깨."
"내가 왜 사이비냐? 이 중국식 말투가 네 귀엔 안들리냐해? 아주 귀까지 썩었구나 썩었어."
"너보단 멀쩡하네 그보다 이게 왜 또 시비야 시비가?"
서로 치고 패고 피하고 막으며 갈림길에 왔다. 여기서 소녀는 카부키쵸로, 소년은 진선조 본부로 가야 한다. 가서 드라마나 봐야지. 결국 며칠간 한 대도 못 때려서 이를 갈며 소년이 돌아서려는데 소녀가 걸음을 멈추며,
"야, 너 저기 저 산 가본 적 있냐?"
우산으로 저 쪽 끝을 가리켰다. 저건 또 웬 산이냐. 그 전에 나 이 만화에서 산 따위 본 적 없는데? 눈을 비벼보았으나 확실히 눈앞엔 산이 있다. 이건 또 웬 농간인가요. 산에 개울에 가지가지 한다. 소년은 한숨을 쉬었다.
"없다."
"그럼 가보자해. 요새 힘 쓸 일이 없으니까 심심하다."
"혼자 가라."
돌아서려는데 우산이 소년의 목을 터억 낚아챘다.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어리고 여린 소녀를 혼자 보내다니 경찰 실격이다해?"
"야 이 기집애야 니가 여리냐? 여려? 너 같은 게 여린 소녀면 히지카타 그 새끼가 천사다!"
목이 졸려 버둥거려도 소녀는 소년을 풀어주지 않았다. 고개를 억지로 끄덕거리니까 만족하며 풀어주었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비장의 무기를 던졌다.
"애가 가기엔 멀다. 저까지 걸어나 가겠냐?"
소녀는 코웃음을 쳤다. 명박한 비웃음이었다.
"멀어? 너나 그렇겠지. 너같이 비리비리한 놈이랑 같을 줄 아냐해."
소녀는 소년의 눈에 보이지 않게 돌아서서, 들으라는 듯 '바보,바보,'하고 중얼거렸다. 아, 그래 치사해서 가고 만다. 소년은 이를 악물었다.

쓰다 말았지만 일단 공개해 두겠습니다. 나머지는 내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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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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