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사잇길로 들어섰다. 벼 가을걷이하는 곁을 지났다.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소년이 날아가는 참새를 잡아 목을 짤짤 흔들자 다른 참새들이 슬금슬금 날아간다. '참, 오늘은 일찍 집으로 돌아가 드라마 재방송을 봐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
"야, 이거 재밌다!"
소녀가 허수아비 줄을 잡더니 흔들어 댄다. 허수아비는 어느새 정체불명의 물체가 되어 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소녀의 얼굴에 살기등등한 미소가 보인다. 저만큼 허수아비가 또 서 있다. 소녀가 그리로 달려간다. 그 뒤를 소년도 달렸다. 오늘 같은 날은 일찍 돌아가 드라마나 보고 히지카타나 괴롭히는 게 보통 일과라는 생각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소녀의 곁을 스쳐 그냥 달린다. 메뚜기가 따끔따끔 얼굴에 와 부딪친다. 쪽빛으로 한껏 갠 가을 하늘이 소년의 눈앞에서 맴을 돈다. 어지럽다. 저놈의 독수리, 저놈의 독수리, 저놈의 독수리가 맴을 돌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메고 다니는 바주카포를 하늘에 쏘자 독수리가 떨어진다. 만족해서 돌아다보니, 소녀는 지금 자기가 지나쳐 온 허수아비를 흔들고 있다. 좀 전 허수아비보다 더 끔찍한 몰골이다. 소년과 소녀의 손이 닿는 곳은 자그마한 폐허가 되어 있었다. 지나가고 나면 수습이 가능할 만한 어설프고 조그마한 폐허.
논이 끝난 곳에 도랑이 하나 있었다. 소녀가 먼저 뛰어 건넜다.거기서부터 산 밑까지는 밭이었다.수숫단을 세워 놓은 밭머리를 지났다.
"저게 뭐냐?"
"밭, 등신아."
소녀가 소년의 등을 걷어찼다.
"야 누가 그딴 거 물어봤냐해? 무슨 밭이냐고!"
"내가 아냐!"
"그것도 모르냐?"
"몰라서 물어봤잖아, 너도."
가까이 가 보니 대놓고 적혀있었다.
-무도 못 알아보는 멍청한 놈들 출입금지.
"역시 무밭이었군."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이 소녀의 명치께를 빠악 소리가 나도록 찔렀다.
"뭐냐?" 소녀가 소년을 노려보았다.
"그냥, 짜증나서."
"네가 그러니까 소대장밖에 못 하는 거다, 병신."
소년과 소녀는 밭둑의 흙이 풀풀 피어오르고 무청이 발에 짓이겨지도록 치고 받았다. 먼지가 자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밭둑에 주저앉더니 소녀가 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이거 날로 먹어도 맛있냐해?"
"이젠 하다하다 남의 무까지 먹냐?"
"야 밭 박살난 거 안 보이냐해, 어차피 걸리면 죽어. 하나만 먹고 가자. 목마르다."
소년이 밭으로 들어가, 무 두 밑을 뽑아 왔다. 아직 밑이 덜 들어 있었다. 잎을 비틀어 팽개친 후, 소녀에게 한 개 건넨다. 그리고는 자기는 먹지 않고 소녀를 쳐다본다. 먹고 맛없다고 뱉아내기를 기대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소녀는 흙을 슥슥 털더니 세 입 만에 종아리만한 무를 다 먹어치웠다. 으적, 으적, 으적.
"아, 맵고 지려."하며 입가에 묻은 무즙을 소매로 아무렇게나 닦았다.
"지랄한다."
소년이 들고 있던 무를 던져버렸다.
"어떻게 먹는 걸 버리냐? 이 야만인아!"
"남의 무 뽑아서 세 입만에 다 먹어치우는 괴수는 입 닥치세요."

산이 가까워졌다.단풍이 눈에 따가웠다.
"야아!"
소녀가 산을 향해 달려갔다. 이번은 소년이 뒤따라 달리지 않았다. 그러고도 곧 소녀보다 더 많은 꽃을 꺾었다. 소녀가 열 받은 표정으로 미친 듯 꽃을 따기 시작했다. 소년의 손이 더 빨라졌다. 그리고 소녀가 꽃을 따고 소년의 손이 더 빨라지고.......소녀가 소년이 따려던 꽃을 꺾은 게 먼전지 소년이 소녀가 꺾으려던 꽃을 밟은 것이 먼전지는 모르지만 꽃꺾기는 꽃을 뿌리째 뽑아 서로에게 던지고 흙을 뿌려대는 개싸움이 되어 있었다.
"꽃도 사랑할 줄 모르는 야만인이 분명하다해. 긴토키가 이런 애하고 놀지 말랬는데."
"너야말로 꽃이 무슨 살인도구로 보이냐?"
"됐다. 그런데 이거 무슨 꽃이냐?"
"이제 말도 씹어?"
"무슨 꽃이냐?"
"아악!! 이 기집애하고 여기서 이러고 있는 내가 미친놈이지!"
우산꼭지로 눈을 쿡쿡 찔러가며 질문하는-질문 내용만 소녀다웠다- 소녀를 요리조리 피하며 소년이 대꾸했다.
"너 되게 짜증난다. 대답 안 할거면 맞기라도 하라해."
"둘 다 안 할거다!"

-------------------------------------
우선 여기까지.

'여러분의 해결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혼]옛날옛날에  (0) 2010.01.01
[은혼]사랑손님과 어머니  (0) 2009.12.29
[은혼]소나기  (0) 2009.05.18
8월 잡담  (2) 2007.08.20
[은혼]가족의 탄생  (3) 2007.08.16
Posted by 유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