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김시은이 니 신유진하고 진짜 사귀나."
점심 먹고 운동장에서 편 나눠서 공을 차느라 땀 범벅이 된 남자애들이 예비종이 치자 복도가 무너져라 교실로 질주하던 길에 나온 뜬금없는 질문에 그 자리에 있던 아이들 전원이 석화되었다.
"씹새야, 개소리하지 마라. 니 시은이가 호모새끼로 보이나?"
"입 닥쳐라 개새야. 시은이가 뭐가 아쉬워서 호모질을 하는데? 니 눈깔이 썩었나? 야가 호모로 보이게?"
간신히 석화에서 풀린 남자아이들이 투덜투덜거리며 질문을 한 남자애를 쥐어박고(그러니까 니킥으로 배를 걷어차고, 팔꿈치로 옆구리를 퍽 소리가 나도록 찌르고 목을 졸라대는 다정하고도 훈훈한 장면이었다. 맞는 놈은 억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있었다.) 다시 계단참을 돌아 복도를 질주하려고 하는데 교복에 묻은 발자국을 털어내던 엷은 머리색의 남자애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새끼 눈 좋네? 우리 사귀는 거 보통 잘 모르는데 어떻게 알았는데?"
".......야 김시은, 뭐라고?"
부산하게 움직이던 아이들이 모두 굳었다. 질문한 아이가 말을 더듬어도 시은이는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니 내 신유진 가하고 사귄지 한 3년 됐다. 같은 중학교에서 올라온 아들도 모르는데 눈치 졸라 빠르네."
굳어 있던, 흙과 땀에 푹 전 남자애들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폭소를 터뜨렸다.
"지랄한다 씹새야, 농담도 가려가면서 해라."
"사귀냐고 먼저 물은 게 니다, 이 개새끼야."
질문한 아이도 배를 잡고 웃어댔고 나머지 애들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복도에서 한참 웃고 있었다. 그때, 종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아 씨발, 종 쳤다! 수학책 못 빌렸는데!!!"
"우리는 영어다. 오늘 시킨다고 미리 풀어오라 캤는데! 클났네."
"뭐 수학? 야 오늘 며칠인데? 내 걸릴 날짜 아이가?"
아까까지 태연하게 농담을 하던 김시은이 갑자기 표정이 변했다.
"21일!"
시은이가 머리를 감싸쥐고 투덜거렸다.
"씨발 좆됐다! 수학 그새끼 각목 새로 맞췄다 카던데."
"쓰던 거 우짜고?"
"마원용 쳐자다가 뒤지게 맞고 부러졌다. 그런데 그새끼 졸라 맞고도 웃더라. 미친 새끼."
"야 근데 마원용이란 놈도 우리 학교에 있나?"
"니 짝이다."
"........아, 그새끼가 마원용이가."
"눈깔에 좆 박힌 새끼. 내 3반 갔다 올게! 수학 오거든 내 보건실 갔다 캐라!"
"오냐, 후딱 가라."
그렇게 5교시가 지나갔다. 5분 늦은 김시은이 각목으로 얻어터지는 것으로 수업이 시작되었고 그날은 수학 선생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앉은자리대로 문제를 풀리다 4분단 맨 가에 앉은 더벅머리를 보고 전학 왔으면 전학을 왔다고 이야기를 했어야 하지 않냐고 화를 내자 실장 이태일이 심각한 얼굴로 손을 들고 일어나 그 학생 마원용이라고 정중하게 이야기해서 모두가 어색해졌다. 어찌나 어색했던지 평소보다 조금 일찍 수업이 끝났고, 그 덕에 조금 길어진 쉬는 시간에 매점에 가려고 일어난 김시은에게 실장이 다가갔다.
"시은이, 왜 늦었는데."
"책 없어서 빌리러 갔다."
"내가 예비종 치면 교실 들어와서 손 씻고 수업 준비하라고 몇 번 이야기했노."
"아 이태일 이새끼 졸라 말많네. 니가 우리 아버지가?"
"내가 왜 느거 아버진데. 난 유진이 같은 아들이 좋지 니 같은 아들 줘도 안 한다."
진지한 얼굴로 잔소리를 늘어놓는 태일을 향해 시은이 가운뎃손가락을 내밀어보였다.
"가는 니가 개소리하고 다니는 거 아나?"
"사람이 말하는데 개소리라니. 말 좀 곱게 해라."
"개소리지. 그러면 니가 내 장인인데 나도 니같은 장인 싫거든?"
분필가루가 풀풀 날리는 칠판을 배경 삼아 교탁 앞에서 우아하게 개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김시은의 머리에 수학의 정석이 날아오고 이태일의 머리에는 사회 교과서가 날아왔다. (교과서 중에서야 사회 교과서가 제일 두껍지만, 중요한 것은 수학의 정석은 그것보다 더 두꺼운 데다 하드커버라는 것이다.)
"둘 다 작작해라. 내 없는데서 내 이야기 하지 말라고!"
"아 유진이 왔다!! 두 시간만에 보는데 여전히 이쁘네."
남자애 치고 골격이 가는 하얀 피부의 남자애가 귀찮아 죽겠다는 듯 나른한 동작으로 수학 정석책을 탈탈 털며 있는대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이태일, 이새끼 보건실로 끌고 가라. 약 처먹는 거 또 까먹었네."
"이쁘니까 이쁘다 카는데 뭐가 불만인데?"
툴툴대고 있는 유진의 어깨에 김시은이 팔을 둘렀다.
"살 빠졌나? 어깨가 이래 얇아가 우짜노. "
"씨발! 놔라 이 개새끼야!"
"생리한다고 티 내지 말라니까. 난 까칠한 마누라 싫다."
이번에는 수학의 정석이 모서리째로 김시은의 머리에 박혔다. 짐짓 엄살을 떨며 머리를 잡고 괴로워하는 시은의 배에 양말바람의 발이 날아오고, 머리에는 255 사이즈 삼디다스 실내화가 날아왔다.
"악!!!!!!!!!! 마누라가 남편 팬다! 가정폭력이다!"
"가정 폭력 좋아한다. 씹새끼. 내가 니 패면 가정법원 안 가고 형사사건으로 넘어가거든?"
"시은이 니 유진이 자꾸 괴롭힐래?"
이태일이 가세해서 둘이 먼지가 풀풀 올라오도록 김시은을 밟고 차고 굴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오 싸움났다 좋은 구경이다 웅성거리며 구경하고 있었고 옆반 애들까지 가세해서 셋의 싸움-이라기보단 둘이서 하나를 두들겨 패는 꼴을 느긋하게 구경하며 놀고 있었다. 그리고 교실 뒷문과 창문으로 고개만 빼꼼히 내민 남자아이들이 그 꼴을 보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야, 저래 죽도록 패면서도 마누라란 소리는 부정 안 하는 거 보면 사귀는 거 맞다."
"이 미친 새끼야, 니 아직도 느거 누나 보는 그거 못 끊었나? 호모새끼들 씹질하는 그거? 니 그카다가 병 옮는데이. 작작 봐라. 세상에 우리 학교에 호모 같은 게 있을 리가 있나."
"맞다. 그리고 자들이 호모일 리가 있나. 시은이가 얼마나 사내다운데 호모라니."
"그리고 유진이 자가 쪼끄맣고 마르고 곱상해서 그렇지 보기보다 세다. 니 자한테 맞아본 적 있나? 내 중학교 때 자한테 맞은 게 아직도 아프다."
"맞은 게 자랑이라고 떠드나. 근데 니 왜 맞았는데?"
"체육시간에 옷 갈아입다가 다리 봤는데 털도 하나 없고 예쁘데. 그래서 본 거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누가 목소리 쫙 깔고 내 이름 부르더라고. 봤더니 신유진이 어디서 구했는지 야구배트 들고 덤비더라. 그 다음부터 우리 학교에서 야구 금지였다."
"그래서 느거 학교 아들이 야구 하고 싶다고 그 난리를 쳤나?"
"결국 배드민턴 채로 야구했잖아. 생각하니까 존나 눈물난다. 그때 우리 엄마가 학교 찾아갔는데 신유진이랑 이야기하고 오더니 빗자루 들고 내 방으로 들어오데? 느거 플라스틱 빗자루 부러지도록 맞아봤나? 방 쓰는 거 말고 마당 쓰는 빗자루. 씨발 신유진 개새끼. 우리 엄마가 동네 시장에서 말싸움으로 져 본 적이 없는 독한 아줌만데. 저새끼 뭔데?"
"야 김시은하고 신유진하고 이태일하고 말빨 장난 아니다. 저새끼 국어하고 사회 시간에 말 하는 거 못 들었나."
"재수없다. 근데 아무튼 자들 호모는 아니다. 호모가 저래 싸움도 잘 하고 말도 잘 할 리가 없다."
"맞제. 그런 가시나 같은 재수없는 것들이랑 자들이 같나."
"그래도 신유진 가 이쁘긴 졸라 이쁘잖아."
아까 신유진에게 두들겨맞았다고 투덜거리던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의견을 내자 옆에 있던 아이들이 혀를 찼다.
"등신새끼. 니가 호모가. 남자보고 이쁘다가 뭐고."
"야 개새끼야, 니도 남자면서 남자보고 그래야 되겠나? 들으면 진짜 기분나쁜 거 알면서 그러면 안 된다."
그때 종이 쳐서 그 토론은 끝나고, 대구 수성구 모처에 위치한 대은고등학교의 하루도 저물어갔다.
그리고 3년 후. 금요일 저녁이라 길거리는 술에 떡이 된 학생들로 넘쳐났고, 거기서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화 내용이 조금씩 평소 같으면 말하지 못할 것들로 옮겨갔고, 어쩐 일로 김시은의 입에서 솔직한 소리가 나오는 중이었다.
"야, 너네 중학교 때부터 사귀었다면서? 남자 고등학교 다녔다더니 용케 안 들키고 버텼네?"
"아, 그거. 쉽다. 장난처럼 진짜 사귄다고 카면 다 웃고 넘어간다."
"하긴. 근데 너넨 오래 사귀었으니까 티가 났을 거 같은데."
"니가 뭘 모르네. 머시마들은 다 단순하다. 근데 그런 것들을 한데 모아놓으면 더 덜떨어지게 굴거든."
김시은이 키들키들 웃으면서 대꾸했다.
"응. 여자애들은 의심하기도 하던데 남자애들은 그런 거 의외로 없더라."
"가들은 지 옆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서워서 그런 생각을 못 한다."
한 무리의 남자들은 키득키득거리면서 웃어댔다. 그러다 그중 한 녀석이 시은에게 물었다.
"너 애인 미국에 있다 그랬지."
"어."
"떨어지니까 좀 슬프지 않냐?"
"슬프기는, 하루에 한 번 싸우던 거 사흘에 한 번 메일하고 전화로 싸우니까 재미도 없고 심심해 죽겠다."
"야, 그런데 너네 그렇게 싸우고 욕하고 하면서 왜 사귀냐?"
시은은 죽은 물고기 같은 눈을 하고 미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새끼야, 나도 모른다."
다들 키들키들 웃어댔다.
그리고 오전 7시 반, 미국 동부.
"유진, 궁금한 게 있소."
"응, 뭐냐?"
"한국에 두고 왔다는 애인 말이오. 시은이라고 했나?"
"아 걔?"
벤자민 T. 코지마는 한국에서 왔다는 이 알 수 없는 천재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만큼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동양에서 온 애들은 다 그렇냐고 누가 본인에게 물었는데, 자기도 일본인 3세라 미국에서 태어나서 일본 근처에도 가 본 적이 없는데 알 게 뭐냐. 평소 궁금했던 김에 말을 꺼내자마자 신유진이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구겨박았다. 그리고 벤자민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어가 몇 마디 흘러나왔다. 아마 욕이겠지. 신유진에게 가끔 투덜대는 한국어가 무슨 뜻이고, 꼭 그걸 한국어로 해야겠냐고 물었더니 신유진은 피식 웃으면서 한국어에는 영어로 표현할 수 없는 욕설이 많이 있다고 말했다. 비속어로 투덜투덜거리던 유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놈 이야긴 왜 물어."
"그렇게 욕을 하고도 아직도 사귀고 있소? 여기도 애인이라면 많잖소."
신유진이 벤자민 쪽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로서는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괴상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새로 불을 붙이고는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그의 얼굴 쪽에 훅 내뿜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벤자민 T. 코지마."
"왜 그러시오?"
"한국어에는 속궁합이란 말이 있어. 혹시 아냐?"
"........그게 뭐요?"
"음, 몸정이라고도 하고......이건 해 봐야 아는 건데 말이지......."
벤자민은 자기 입을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내가 왜 그걸 물어서 이런 끈적하고 짜증나는 이야기를 아침부터 10분씩이나 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나마 그의 인생에 한 가지 복이 있다면, 그걸 신유진 쪽에 물어봐서 10분만에 이야기가 끝났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 같은 이야기를 어떤 눈치 없는 놈이 물었을 때, 김시은은 한 시간 반 동안 자신들의 성생활에 대해 떠들어댔다.
---------------------------------------
애인도 아닌 주제에 벤자민 군이 유진이와 저 시간에 같이 있었던 이유는 같이 잤기 때문입니다. 잠만. 음악 이야기를 너무 오래 해서 집에 못 가고 저기서 잤어요.
누가 누구인지는 알아서 캐치하시길. 은혼 경상도 버전이라는 건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아시겠죠?
'여러분의 해결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잘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 뭐가 좀 이상하지만 이건 중요한 문제다. (8) | 2010.10.31 |
---|---|
질투는 나의 힘 (4) | 2010.10.30 |
오늘의 자랑거리 (2) | 2010.10.20 |
[동인녀문학교육론]화사 (6) | 2010.10.01 |
오늘도 자랑 포스팅 (4) | 2010.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