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휴일이니 쓰려던 건 쓰고 자렵니다. 봄이 남아있던 자리, 진청은 루트고 의진이랑 청은이만 나옵니다. 내용들 대충 짐작이 가시죠? 게임 내용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니만큼 미리니름이 좀 섞여있습니다. 조-금 수정했습니다. 원래 인용하려던 인용문도 넣어서.
나는 코웃음을 치고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으며 대답했다. "이런 나무 이름 알아? 이 잎사귀는 질 때까지 푸르지. 뒤쪽만이 바삭바삭 말라 벌레먹은 잎사귀여도 그걸 감쪽같이 감추고는 질 때 까지 푸른 척하는 거야. 그런 나무 이름을 알았으면." -다자이 오사무, <잎> 중에서
평소에는 누가 깨워도 잘 일어나지 못하는 의진이 일요일 아침, 이른 시간에 스스로 일어난 것은 일이 바빠서였으리라. 축제 전 마지막 일요일이만큼 학교에 나가서 할 일이 많았다. 씻고 옷을 입고 짐을 챙겨 들고 부엌에 들어가 식사준비를 하는데,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으나 의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 아침에 자신의 집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올 사람은 한 명 뿐일테니까. 살짝 열쇠를 돌리고, 소리를 죽인다고 애써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돌리는 기척이 들리자 의진은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허를 찌르는 것은 싸움의 기본. 예상대로 현관을 열고 들어온 것은 옆집에 살고 있는, 목하연애중인 소년이었다. 자신을 보고 조금 놀란 듯한 청은의 얼굴을 보며 의진은 속으로 만족했다. 1점 선취. -일어나 있었네. -일이 바빠서. 냉담한 표정으로 청은을 쳐다보지도 않고 의진은 부엌에서 자신의 몫인 듯, 제과점 상표가 선명한 빵봉투를 뜯었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부엌에 들어온 청은을 본 척 만 척, 열심히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 의진의 옆에 있는 의자를 빼서 앉으며 청은이 물었다. -하진이는 좀 어때? -아까 가서 본 바, 잘 자는 걸 보니 좀 나은 듯 하다만 아직 무리하면 안 되겠더라. 질문을 못 들은 듯 천천히 빵을 삼키고 나서야 의진이 대답했다. 어제 청은이 해 놓은 음식은 싹 무시를 한 모양이다. -하진이는 뭐라던데? -몰라. 어제부터 하진이랑 한 마디도 못 했다. -왜? -너 때렸다고 나보고 뭐라고 그러더라. 청은이 의진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약간 쓰게 웃었다. -아직도 화났나보네. -그래. 나쁜 놈아. 의진이 말을 내뱉었다. 청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의진을 쳐다보았다. -하진이가 아니고 내가 화가 났다고. 내가 지금 네가 한 밥을 먹을 마음이 나겠냐? 그리고 너 왜 지금 왔어? -하진이 아침 하려고 왔는데. -이 시간에 오면 내가 있을 걸 알면서? 그제야 식탁을 한 번 쳐다본 청은이 숨을 살짝 삼켰다. -화가 안 풀렸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는데. -당연하지. 네가 지은 죄가 그거 하나 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 의진은 진작 날을 잡아 청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볼까 싶었지만 바빠서 틈이 나지 않았다. 시간 여유는 조금 있으니 슬슬 시작해 볼까, 하는데 청은이 말을 이었다. -정말 미안해, 형. 하진이한테는 내가 잘 이야기할 테니까. 저 의뭉스러운 놈이 지금 진담을 하는 거야, 말을 돌리는 거야? 의진은 진청은과 이야기를 할 때는 좋은 위치를 선점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도망을 못 가게 막아야 애매하게 웃으면서 말을 돌리지 않았다. 식사를 다 마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된 의진이 진청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청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넌 이미 내 동생을 다치게 했어. -........미안, 형. -형이라고 부르지도 마라. 달갑지 않아. 집에서는 짓지 않는 미간과 입매에 힘이 들어간 얼굴을 하고 있는 연의진의 얼굴은 진청은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하진이 없을 때 청은에게 지어보이는 표정. 9년지기라는 말로는 절대 부를 수 없는 삭막하고 메마른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던 청은은 체념한 듯 씁쓸하게 웃었다. -어제는 내 실수로 하진이가 다친 거니 형이 화가 안 풀려도 어쩔 수 없지. 의진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갔다. 잠시 후 의진이 한숨을 쉬더니 청은에게 말했다. -너, 내가 진짜로 화내는 이유는 역시 모르고 있군 그래? 의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러고 있는 놈이 우리 집에 오는 것도 달갑잖은데. -그러고 있는 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던 청은의 표정이 굳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의진은 준비해둔 직격탄을 날렸다.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랑 사귀는 놈. 진청은이 짓고 있던 표정이 무너졌다. 온화하고, 조용해 보이는, 착 가라앉은 미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다른 표정이 자리잡았다. 불안해 보이고, 속이 비어 있는 듯한 표정이. 의진은 비아냥거리듯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알고 있었냐는 소리는 안 하겠지? 네 시커먼 속은 내가 잘 아는데. 청은이 의진을 노려보았다. 의진은 그 얼굴을 보며 씨익 웃어주었다. 최대한 화사한 얼굴을 만들어서. 이 놈이 성격이 좋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랑 사귀는 놈은 나쁜 놈에 해당한다고, 내가 알기론. -그래서? 잠시 의진을 노려보던 청은이 갑자기 반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그걸로 형이 화를 내는데? 어느새 굳어 있던 표정이 사라지고, 청은은 다시 평소에 쓰고 다니는 조용한 가면을 쓴 모양인지 살짝 웃는 표정마저 지어보이고 있었다. -뭐, 형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그런데 그게 왜 형이 화를 낼 일이야? 나는 형이라면 조금쯤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왜? -나는 이걸로 하진이에게 이야기를 할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잖아? 하진이는 크게 충격을 받지 않아도 될 테고 나는 이걸로 더 오랫동안……. 청은이 말끝을 흐렸고, 동시에 의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청은의 멱살을 잡고 그를 일으킨 것도 순식간이었고, 무릎을 차올려 청은의 배를 걷어찬 것도 순식간이었다. 맞을 때는 저항하지 않던 청은은 의진의 무릎이 떨어지자마자 헉 소리를 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의진이 쿵 소리를 내지 않게 얼른 청은을 부축했다. -소리 낮춰. 하진이 깨. 소리가 나면 하진이 꺨테고 그걸 원치는 않을테니. 청은은 납득하고 그의 부축을 받아들였다. 허리를 숙이며 청은의 귀에 의진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난 네놈의 그런 점이 제일 싫다. 징그러운 데다 약해빠진 놈. 연하진이 모르는 것 하나. 연의진은 진청은을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 10년의 세월을 공유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애초에 자신의 친구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냐? -아니, 아무 것도. 또 연하진이 모르는 것 하나. 그래서 진청은은 연의진을 대하기가 두려울 때가 있다. 의진은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고, 자신에게 엄격한 것 만큼 연의진 본인에게도 엄격해서 지난 9년간 자신의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함께 자신들의 다른 죄과를 겪어내는 사이. 그러면서도 자신을 친구로는 여기지 않았고 또 그러면서도 하진이 앞에서는 자신에 대한 악감정을 요만큼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청은은 의진에게 자기 속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얼른 이야기를 돌리고 싶었다. -아까 그거면 걱정도 팔자다, 형. 하진이는 괜찮아 보이는데 형이 왜 신경 써. 그만 하고, 학교 안 가? 다나 선배가 걱정한다? -……. 둘이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의진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진이만 지극정성으로 바라보는 소년이 의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데 청은인들 자신을 좋아할까. 그러므로 어쩌면 이것은 서로에 대한 질투일지도 모른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으로 태어난 소년에 대한 질투.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하며 자라온, 소녀에게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소년에 대한 질투. 그리고 또, 이것은- -그런데 형. -왜. -뭐가 화가 났어? -나는 기분이 나빴어. 왜 그랬는지 네가 깨닫기 전엔 절대로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다. -응? 이것도 화 내는 거야? -하필 너 때문에 하진이가 마음이 상해서 나는 더 기분이 나빠. 일방적인 질투이기도 하다. 하진이가 청은이와 루미를 갈라놓아야겠다고 자신에게 이야기했을 때 얼핏 스쳐갔던. 동생이 자신의 추한 점을 깨닫고도 그것을 버리지 않은 그 순간에도 스쳐갔던. 남의 사랑하는 동생이 누구 때문에 마음고생 중인데, 거기다가 몸에도 상처를 하나 더 내 놓았다 이거지. 저래봐야 저 놈은 내가 자길 때려서 하진이가 삐친 것밖에 못 떠올리겠지. 그래, 계속 그러고 살아 봐라. -하진이 더 다치게 하면 넌 정말로 내 손에 죽어. 그럼 간다. 하진이 일어나면 손 다시 봐 주고, 여차하면 내일 병원도 좀 데려가라. -알았어, 잘 다녀와, 형. 물론 두 사람은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 친구가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친구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애매함. 공범관계란 이래서 귀찮다. 저 놈은 내가 나가고 하진이가 일어나면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으며 하진이에게 아침인사를 건네겠지. 그 꼴을 보고 있던 지난 9년 세월이 생각나자 의진은 새삼 화가 끓어올랐다. 저 자식 몇 대 더 패 주고 싶지만 참아야겠다. 의진이 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서자 당연한 듯 문을 잠그려고 따라나오는 청은을 보며 의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의진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더 추가했다. -동정심도 안 생겨, 너 같은 놈. -나도 나한텐 그래. 청은이 희미하게 웃자 의진은 인상을 썼다. 아, 저 나쁜 놈. 아무래도 제일 불리한 건 나 아닌가.
사실 저런 내용 아니었던 것 같은데 쓰다 보니 얘네가 제 멋대로 놉니다? 제 의진이는 청은이 마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하진이 속도 좀 꿰고 있고요. 좀 징한 오빠잖아요. 다 알기 때문에 제일 무서운 놈이라고 생각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