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힘 좀 써라. 박스가 뭐가 무거워?"
"야, 그럴 거면 네가 들어라!"
뭐 이런 계집애가 다 있나. 휘안은 책으로 꽉 찬 라면박스를 두 개째 옮기며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경험을 했다. 정신줄이 본체와 접속을 해제할 때는 뚝, 소리가 납니다. 정말입니다.
"오빠-도와줄 거지?"
월광이가 음흉한-본인은 상큼하고 소녀답고 우아하다 주장하는-미소를 지으며 다가올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 휘안은 경계경보를 발령시키고, 미간에 주름을 잡고 월광이를 노려보았다.
"뭘, 어떻게, 언제 도와줘야 되는지 말 안 하면 안 해 줘."
"와, 치사해! 당연히 그냥 도와줘야지! 오빠가 돼갖고 동생 부탁 하나 못 들어주냐?"
네가 날 언제 오빠로 대접이나 했었냐, 라는 말은 실체를 갖추지 못하고 사라졌다. 꺼내봐야 좋은 게 하나도 없으니까. 게다가 빚도 있었고. 사실 자신은 빚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며칠 전, 월광이가 꼭 가게 문 닫고 먹겠다고 찍어놓은 호두파이를 아무 것도 모르고 팔아버린 후로 월광이가 얼마나 으르렁거리며 화를 냈는지. 장사한 것도 죄가 되나요. 휘안은 한숨을 쉬었다.
“왜, 싫어?”
“아, 아니……. 싫긴 누가 싫대. 뭐 하면 되는지 이야기 좀 해 보라구.”
월광이의 미소를 보며 휘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눈 딱 감고 하루만 이 몸을 희생하면 며칠은 편히 살 수 있을 거야.
……희생이 과하지 않나요, 이건?
월광이가 방에서 라면상자를 발로 차서 밀고 나오더니만 그 안에서 얇고 묘하게 이상한 기운이 풍기는 책을 꺼내며 한 권씩 비닐로 포장하라고 한 것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그런데 그 책을 이고, 큰 우드락도 지고 양재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서-당연히 차비도 안 준다.- 책을 책상까지 운반하라는 것이다. 그 크기만 빌어먹게 큰 유리건물은 대체 뭐 하는 곳이냐. 그곳은 이상한 옷을 입은 아이들로 북적였고 -심지어 한길가에서 머리 위로 토끼귀 처럼 올린 손을 파닥이며 춤을 추는 애들이 없나 동물 잠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애들이 없나!-책상과 의자가 빽빽하게 놓여있고 택배상자가 즐비했다.
“야, 월광아……. 좀 받아는 주면 안 되냐?”
책상 위에 박스를 던지다시피 놓으려다 월광이의 눈초리에 다시 박스를 곱게 바닥에 내려놓으며 휘안이 투덜댔다. 손목이 아프고 허리가 아팠다.
“그거 중요한 거야. 막 다루면 안 돼.”
아,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그리고 책 꺼내서 여기 진열하고, 여기 이거 세워서 판넬 좀 만들어.”
아까 자신이 날라온 큰 우드락판을 자르기까지 하란다. 이거 네 일 아니냐?
“넌 뭐 할 건데?”
“나? 팬시 붙이고 오빠가 세운 판넬 꾸며야지.”
아, 그래. 너 하월광이지. 내가 깜박 잊을 뻔 했구나. 월광이의 손에는 알록달록한 종이조각 코팅한 것들이 잔뜩 들려있었다.
장내는 북적였고, 월광이가 앉아있는 곳-부스라고 했다-에도 누군가가 들러 책이며 그 코팅종이를 사 갔다. 월광이는 손님들과 꺄악 **님 오랜만이에요 요즘은 뭐 버닝하세요 좋은 책 건지셨어요 등등 인사를 주고 받았고 그 동안 휘안이는 책을 건네고 돈을 받고 잔돈을 계산하고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하고 체크도 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했다, 노는 거 빼고.
“재고 처리하러 왔어요. 그린 님은 뭐 하러 오셨어요?”
“책 사러 왔죠. 줄 안서려고 부스 냈어요. 더블오 파거든요, 요새.”
“와, 좋으시겠다. 메이저네요? 매진됐음 좋겠어요.”
그리고 월광이는 휘안이가 못 하는 그 유일한 일을 하고 있었다. 조금 화가 났다.
그 때.
“어! 월광아!”
“언니, 오빠!”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리고 월광의 얼굴이 굳었다.
“뭐야, 세상에. 아저씨? 사제님? ……월영이랑 시열이, 동풍이에……누가 아소를 여기 데려왔어?” 비명으로 시작한 말이 분노로 끝났다.
주위를 돌아보며 아시아에 이렇게 게이가 많았냐며 신기해 하는 초로와 이런 거 파는 건가요, 재미있겠는데 나도 해 볼까 하며 즐겁게 부스를 구경하는 심현과 파랗게 질린 동풍이와 노멀 에로본을 사고 얼굴 붉히는 월영이와 무심한 표정으로 월광의 부스로 척척 걸어와서 의자에 앉아 자는 시열이와 팬시 보고 신나하고 나도 동물 잠옷 입고 싶다고 조르는 아소를 보고 놀라지 않으면 그게 이상하긴 하지. 하지만 월광의 반응은 휘안의 생각과 조금 달랐다.
“누가 여기 가르쳐줬어요? 뭐? 거실 컴퓨터에 약도가 남아있어? 아소 너 누가 언니 하던 거 훔쳐보래? 그리고 사제님 하긴 뭘 해요오! 그림 그리고 글쓰시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심현은 나 그림도 글도 자신없는데 하며 동인계 진출의 꿈을 접었다.- 야 월영이 너 그거 사 가라 그냥! 보기만 하지 말고! 그리고 누가 동풍이 데리고 나가란 말야, 아저씨 여기 게이 페스티벌 아니라고요!”
살짝, 유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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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에서 썼습니다. 저건 진짜 삼돌이네요. 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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