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에 일찍 온 시열과 동풍이 거실에서 뭔가 만들고 있었다. 아소도 재미있겠다고 끼어들었고 일이 없어 한가하게 있던 월영도 도울 게 있으면 하겠다고 나섰다.
주방을 뒤져 종이컵을 꺼내더니 컵 밑 부분에 십자 모양 작은 칼집을 내고, 컵 바깥에 색지를 붙이더니 '고시철회 협상무효'라는 메시지를 쓰고 있었다. 시열은 색마분지에 MB OUT이라는 메시지를 매직펜으로 쓰더니 다른 종이에다 심시티는 혼자 해라, 고 쓰고 있었다. 옆에서 아소가 구호 옆에다가 눈이 찢어진 쥐를 그리고 있었다. 월영은 카페에서 초를 찾아 들고 왔다.
"뭐 하니?"
방에서 비척비척 걸어나온 초로가 하품을 크게 하더니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 아저씨. 웬일로 낮잠을 다 주무세요?"
동풍이 초로를 보고 반색했다. 요 근래 얼굴을 보기 힘든 사람이 카페의 30대들이었다. 지난 봄부터 무슨 일만 있으면 고궁으로 불려나가더니, 이제 호출되는 일이 잦아졌다. 심현의 표정이 가라앉은지 1주일이 넘었고-사제였으면서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이렇게 약해서 되겠냐며 심현이 피식 웃었는데 그 웃는 표정이 엄청나게 심각했다고 아소가 주장했다.-초로의 담배도 조금씩 늘어갔다.
"피곤해서. 방금 들어왔거든."
"사제님 뭐 하세요?"
"주무셔. 많이 피곤한 모양이더라. 근데 보자.......이게 다 뭐냐?"
초로는 거실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종이며 펜이며를 바라보았다.
"학교 숙제야?"
"아뇨. 저희 할 일이 좀 생겨서요."
시열이 대답했다.
"MB가 누구지......아."
초로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알겠다는 듯 손바닥을 쳤다.
"그러니까 이거 뭐냐. 반정부 집회?"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들을 훑어보는 초로의 표정이 어땠는지, 아이들이 피식 웃기 시작했다.
"에이 아저씨도, 직접 민주주의라니까요."
이것은 시열의 한 마디이고,
"야, 직접민주주의가 뭔지 설명부터 해 드려야지."
이것은 동풍의 한 마디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요."
이것은 월영의 한 마디이고,
"이럴 때 본때를 보여줘야한다고 낚시하는 아저씨들이 그랬어요."
이것은 아소의 한 마디였다. 이 녀석들, 절대로 내가 나가지 말라고 말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구나. 아이들이 한꺼번에 재잘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없었는지 잠시 미간을 찌푸린 초로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국민의 뜻을 받들라, 이거지?"
"네. 이 나라에는요, 국민들의 뜻을 반영하는 정치가가 나온 적이 별로 없었어요. 요 최근 60년간요. 그래서 가끔 나라꼴이 이상해지려고 하면 국민들이 나서는 거랬어요."
동풍이 초로를 위해 설명했다.
"그게 민주주의라고요."
아하, 초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짓 하면 안 된다."
"네."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촛불 들고 있는 비폭력집회인걸요. 위험할 거 아무 것도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시열이가 생긋 웃었다.
2. 뉴스를 보던 월광이 저 자식 죽여버리겠다고 난리를 치는 것을 휘안이 간신히 뜯어말려놓았으나 월광은 짜증나고 열 받아 못 살겠다면서 카페 구석에 고이 모셔놓은, 얼마 전에 차장님이 갖다놓은 술병 마개를 열고 안주 하나 없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 그렇게 마시는 거 아니라며 심현이 부엌에서 강냉이를 좀 들고 왔고 월광은 강냉이 안주 삼아 브랜디를 목에 털어넣고 있었다. 옆에서 휘안이 그 모습을 보며 오늘 밤에도 이 기집애가 날 괴롭히다 자겠구나, 하며 슬퍼하고 있었다. 뉴스를 보던 초로가 한숨을 쉬었다.
"휘안 군, 요샌 손님들도 별로 없지?"
"네."
"우리도 바쁘니까 어떻게 보면 참 다행이긴 한데 말이다."
월광이가 마시는 술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두 남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 이렇게 일하다가 한 사람 쓰러지거나, 아예 정말로 싸고 질 좋은 능력자로 대체되는 거 아냐?"
"에이 설마요."
"가능성 없진 않은 거 두 분 다 알고 계시죠?"
월광이가 술병을 내려놓고 살짝 혀꼬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나라에 와서 산 지가 몇 년인데, 이렇게 앞이 안 보인 적도 처음이었다. 초로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투표권 우리도 주면 안 되나?"
"투표권은 왜요?"
"우리 의견도 선거에 반영해야 될 거 아냐. 우리 대한민국 정부 소속 아냐?"
"원래 대한민국이 외국인에게 박하답니다."
외국인이랄지, 외계인이랄지, 이계 출신들이 쓴 웃음을 지었다. 이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살면서 느낀 점들을 떠올리니 참 막막했다. 초로가 반론했다.
"우리는 사실상 한국인 아닌가? 이만하면 한국인이잖아."
한국에서 한국 이름을 가지고, 이 나라에서 인생을 마치겠다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는데 왜 우리는 한국인이 아닌가. 월광이 아주 간단하게 답을 말해주었다.
"아저씨, 투표권 원하시면 돈을 많이 버셔서 대한민국 1%가 되세요."
"얘가 좀 취했나보네, 월광아, 진리는 술 깨고 말해야 하는 거다. 아냐?"
휘안이 쓰게 웃었다.
"안되겠다, 휘안아. 월광이 자기 방에 데려다주러 가자."
심현이 몸을 일으켰다. 둘이 월광을 부축해서 옮기는 것을 보며 초로는 월광이 마시던 술병에 손을 뻗었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는 옛말이 틀리진 않은데, 어째서 내가 살려고 마음먹은 이 곳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일단 한 잔 마시고 나서 생각을 좀 더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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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쓴 글 뒷이야기를 좀 잇고 싶었어요. 저번 글도 너무 못 써서 나중에 수정 들어갈 생각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쓰는 버릇 좀 고쳐야 되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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