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져가세요, 홍보해 주세요. 부디, Please, お願い! 카페 6.9 카운터 앞에 B4 사이즈의 종이가 수북히 쌓였다. 그리고 그 앞에 이상한 팻말이 붙어 있었다. 동글동글한 글자체로 적힌 작은 팻말이었다. "뭐야 이거. 포스터? .......금홍아 금홍아? 밴드 이름이 왜 이러냐?" "아 어때서, 곱잖아요! 운율도 살아있구만." 수북히 쌓인 종이 중 한 장을 집어든 효석이 종이에 적힌 문구를 읽자 이상이 버럭 화를 냈다. 효석은 한숨을 푹 쉬고, 포스터를 끌어안고 쉿쉿거리는 이상은 무시한 다음, 바로 유정에게 다가갔다. "혹시 이 아가씨가 그 아가씨?" "......부탁이니 아무 말씀 마시고 포스터 가져가세요. 안 가져가면 해경 형 낙심한단 말이에요." 유정은 먼 산을 쳐다보았다. 13장이 줄어서 남은 포스터는 487장.
"해경아, 이거 어디서 구했어?" "인쇄소 아저씨한테 부탁했어요. 500장만 더 뽑아달라고." "어떻게 알고 부탁했냐......돈은 네가 내고?" "우연히요. 뭐 어때요, 예쁘잖아. 태원 형도 가져가요. 회사에도 붙이고, 응?" "아니 그건 좀......" 이상은 단골들에게 포스터를 강제로 안기기 시작했다. 지용이 서른 장을 들고 갔고, 효석은 내가 이걸 왜 붙여야 되냐며 투덜거리며 들고 갔으면서 연구실 입구에 곱게 붙여주었는데 이상에게는 붙였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구본좌, 아니 본웅은 즐거워하며-그러나 포스터를 이상이 가져온 것 자체는 대놓고 짜증을 내며 포스터를 들고 가 미술과 연습실을 도배해놓고 후배들에게 공연 관람을 종용했다. 구본좌는 법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울고 불며 후배들은 표를 샀다. 그리고 공연 사흘 전. "네 카페 6.9입니다. 네? 네.......아, 네. .......네, 죄송합니다. 철거할게요. 예, 다음엔 그러지 않게 주의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유정이 심각한 목소리로 통화를 마치고, 커피를 손으로 쥐어짜던 이상을 노려보았다. "해경이 형." "왜, 왜 그래?" 유정의 등 뒤에서 묘한 오라와 기백이 피어오르는 것을 이상은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지옥 바닥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포스터 말인데." "포스터? 그게 왜?" "금홍 씨한테 이야기했어? 형이 그거 홍보하는 거 알고 있냐고. 말하고 들고 온 거 맞아?" "......아." 이상이 무릎을 쳤다. "형은 도대체가!" 이 뒤는 여백이 없어 적지 않노라......가 아니고, 유정이 수라로 변신하는 장면을 묘사할 수 없어 적지 않는다. 아무튼 포스터는 모두 수거했다. 이상이. 울면서. 끗.
그리고 덤. "다 수거한 거죠?" "응, 철거된 거랑 지용이가 가져간 거 빼고." "그러고 보니 지용이가 서른 장 들고 갔죠, 걔 왜 그렇게 많이 들고 갔대?" "지용이도 금홍 씨 좋아하나?" "세상 남자가 다 해경이 형 같은 줄 알아요? 적당히 하지?" ".........그래, 미안타." "아니 다행이네." 유정에게 사흘 정도 은근히 볶이느라 진이 다 빠진 이상은 반박 한 마디 못 해보고 풀 죽은 목소리로 금방 사과했다. 그러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왜 서른 장이지?
"지용아, 너 그 포스터 다 어쨌냐?" "아 그거요?" 학교 앞 자취생의 모범이라 할 만한 모습으로 테이블에 비치된 브라운 슈거를 사탕처럼 먹고 있던 지용은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자취방이 우풍이 심해요. 그래서 창문 막는다고. 형 그거 종이가 두꺼워서 그런가, 문 막아놓으니까 바람도 안 들고 되게 따뜻해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이상은 지용을 한참 응시하다, 얼른 뒤돌아서 주방으로 뛰어들어갔다. 한 손으로 눈가를 훔치며 뛰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진짜 끗.
윈디 언니 생일 리퀘입니다. 29일이지만 오늘 저녁엔 좀 할 일이 있어서 미리 써 올렸어요. 늦는 거 보단 낫겠다 싶어서. 아무튼 언니 올해도 축하드립니다.
11:00 - 01:00 카페 6.9
달리의 그림을 본따 만든 게 틀림없는 시계 아래 날카로운 손글씨로 적힌 표지판에는 영업시간이 표시되어 있다.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카페 안에는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두 시간 째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괴상한 커플 하나, 구석 자리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레포트 채점을 하고 있는 여름 양복 입은 안경 쓴 청년이 하나, 그 근처에서 노트북을 끼고 마우스를 열심히 클릭하고 있는 히피 같이 생긴 바가지 머리가 하나, 그리고 검은 폴로 셔츠를 입은 척 봐도 대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 하나, 이렇게 다섯 명이 앉아 있었다. 커피 주전자를 들고 가게 안을 돌던-커플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웃으며 늦은 시간엔 커피 리필도 추가라고 대답했다-페도라를 쓴 청년이 마침내 검은 셔츠 소년 앞에서 마지막으로 커피를 따르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지용이, 집에 안 가니.” “어 유정이 형.” 무슨 책인지 뭘 진지하게 읽고 있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너 자취방 부천에 있잖아.” “아, 태원 형님이 재워주신대요. 뭐 빌릴 책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형이랑 같이 왔어? 근데 왜 따로 앉아 있어?” “인터넷 하신다고 바쁘대요.” “맨날 바쁘다, 저 형.” 유정이 태원 쪽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일은 언제 하나 몰라. 유능하긴 진짜 유능한가?” “그러게요. 근데 유정이 형, 대체 저 시계 누가 만든 거예요?” 지용이 벽시계를 가리켰다. “어, 몰라. 본웅이 형이 개업선물이라고 줬는데.” “그 형이 만드신 거 아니고요?” “회화과지 디자인과는 아니니까 그건 아닐 걸……어 손님 가시네.” 아까까지 손을 꼭 잡고 있던 커플이 손을 놓고 일어나 계산대 앞으로 걸어갔다. 유정이 계산대로 가려고 일어서는데 주방에서 검은 앞치마를 맨 마른 청년이 터벅터벅 걸어나와 계산대 앞의 커플을 맞았다. 계산이 끝나고 커플이 나가자 청년이 자리 쪽으로 다가왔다. “어이, 김유정, 손님 안 받고 뭐 하냐……지용이 아직 안 갔어?.” “해경이 형.” 지용이 뒤늦게 나타난 청년에게 웃어보였다. 해경-가게 단골 중 몇은 다른 손님들처럼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청년은 지용이 입은 옷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너 그 티 이번 주 내내 입지 않았냐?” “어 어떻게 아셨어요?” “마, 좀 갈아입어라, 쯧.” “에이 형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5월이라도 요즘은 덥잖냐.” 지용은 해맑게 웃었다. “자기 전에 빨아서 아침에 입고 나오니까 괜찮아요.” “…….” 해경의 얼굴이 굉장히 험악해졌다. 미간에 주름을 잡은 청년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쿵쿵 소리를 내며 주방으로 뛰다시피 들어갔다. 지용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런 거 아닌데. 그냥 이게 좋은 건데 해경이 형 오해하셨나봐요. 어쩌나.” “아, 괜찮아 걱정 안 해도.” 유정이 주방을 보면서 히죽 웃었다. “아마 해경이, 화난 게 아니고 슬퍼서 저러는 걸 거다. 내버려 둬도 돼.” “와 유정이 형, 어떻게 아세요?” “쟤가 보기보다 심성이 곱다니까.” “거기 시끄러운 셋, 나 이거 채점하게 조용히 좀 해 주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레포트 뭉치를 끌어안고 씨름하던 양복 차림의 청년이었다. “아, 효석 씨 미안합니다. 시끄러웠어요?” 유정이 그 쪽을 향해 사과를 했다. 효석은 신경질적인 한숨을 쉬며 레포트 뭉치를 손가락으로 탁탁 쳐 보였다. “얘네가 내 학점에 불만 있다고 찾아 오면 자네들이 책임질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애들이 글은 또 얼마나 끔찍하게들 못 쓰는지, 논점도 없고 내용도 없는데 각주만 잔뜩 달린 글을 읽고 있자니 내가 다 죽을 거 같아. 거기 유정 군, 나 커피 한 잔만 리필 좀. 부디 아메리카노로 해 주게. 저 친구 핸드드립은 빼고.” “네.” 유정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주방에서 두 청년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모니터에 머리를 박고 있던 바가지머리가 고개를 들었다. “아- 어째 시끄러운데, 지금 몇 시야……11시가 넘었다고?” 시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은 태원이 넷북을 덮고 지용 쪽을 보았다. “지용이 너 책 빌릴 거 있다고 했잖아. 그만 일어나자. 내일 부천까지 가려면 일찍 일어나야지.” “네 형님. 이거 정리 마저 하고요.” 탁자 위에 놓여진 책을 치우는데 어쩐지 눈이 좀 벌개진 해경이 주방에서 나왔다. “어, 태원 형도 가요? 거 잘 됐네. 오늘은 장사할 맛이 안 나니 일찍 문 닫고 가서 잘랍니다. 거기 손님도 슬슬 일어나시우.” “어 왜. 상이 너 어디 아프냐? 울었어?” “울긴 누가 울어요! 아무튼 우리 일찍 나갈 겁니다. 얼른 나가요.” 해경이 괜히 버럭 소리를 질렀고 레포트 뭉치를 끌어안은 효석이 이 가게 왜 이리 불친절하냐 다시는 안 오겠다 투덜거렸으나 해경은 그 소리를 듣지도 않았다. 유정이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테이크 아웃해 주자 효석은 이걸 어디 가서 채점하냐며 유정에게 하소연을 했다. 유정은 웃으며 그의 말을 들어주었는데 답이 없는 걸 보니 대충 들은 것 같았다. 아무튼 그날은 그렇게 끝났고 며칠 후 알바생들 주려다 관 뒀다면서 해경이 지용에게 비닐 꾸러미를 내밀었다. 검정 V넥 셔츠가 한 장 들어있었다.
근 일 주일 만에 야자를 마치고 나오니 열 시 반이었다. 4월 치고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맨다리에 교복치마가 휘감겼다. 복잡한 게 싫어서 다른 애들이 다 나간 다음 복도를 나섰더니 학교 앞 길이 휑하다. 교실 불이 거의 다 꺼진 운동장은 어두워서 먼 곳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멋이라곤 없는 휑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자기 발자국 소리만 들리는 광경은 시열이 생각해도 좀 섬뜩한 데가 있었다. 누가 학교란 데는 애들이 아무도 없으면 굉장히 무서워서 괴담이 생기는 거라고 했는데 누구였지, 사제님이 또 어디서 이상한 책 읽고 해 주신 이야기였나. 발소리 뒤에 뭐가 따라오면 차라리 반가울지도 모른다. 4월 밤공기란 사람을 묘하게 만드는 작용이 있나.운동장을 벗어나 차도로 나오자 길 한 켠에 아는 얼굴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땐 그래서 더 반가웠지만 그다지 내색하지는 않았다. “시열이 언니~” “시열이 늦게 나왔네. 오늘도 수고 많았다.” 아소가 팔짝 뛰어 다가와 시열의 팔에 매달렸고 초로가 다가와서 시열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뭐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앉아있으면 되고……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응? 일 하고 오다가 시열이 마칠 시간이라 데리러 왔지.” “아소랑 아저씨랑 둘이 일 했어?” “응, 아냐, 저기 오빠 온다.” “기다리셨죠- 어, 시열이 그새 나왔네?” 휘안이 비닐봉지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오빠도 왔네.” “응, 야자 한다고 수고했다. 암만 생각해도 이 동네 학교 이상해. 애를 왜 한밤까지 학교에 잡아둬?” “그치, 오빠 이상하지.” 아소와 휘안이 투덜대며 앞서 걸어가고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초로가 시열과 나란히 걸었다. 봉지에 든 게 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어서 말을 걸 수가 없다. 초로가 말을 보탰다. “그러게 말이야. 애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크는데 뭐 하는 건지.” “그러니까 저 야자 안 해도 되는데요.” 시열이 야자를 하게 된 것은 사실 카페 최연장조 두 사람이 어릴 때 친구들이 하는 건 다 해보고 커야 된다면서 야자를 하라고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어려서 남들 하는 거 다 해 봐야 커서 후회을 안 한다며 열을 내어 말하는데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심지어 사제님 학부모 상담날 학교에 오셔서 담임과 이야기까지 하고 갔었지. 우리 시열이 학교 생활 잘 하나요, 네, 뭐 잘 앉아있고 딱히 말썽은 안 피웁니다만 뭔가 애 같지가 않아서요. 애가 애 안 같으면 안 되죠,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근데 성적에 대해서는 궁금하신 게.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해야죠. …… 선생님 왜 말씀이 없으세요. 아, 아닙니다. 담임이 그녀를 맞이하여 당황하던 모습이 눈에 선해서 시열은 피식 웃었다. “왜?” 아소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고 떠들고 있던 휘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춤을 추는 사람이라 그런지 평소에도 몸놀림이 좀 다르긴 한데 오늘따라 동작이 경쾌하다. “아니, 오빠. 전에 사제님 학교 오셨을 때 담임이, 영어로 인사 했는데 사제님이 멍하게 쳐다보면서 한국말로 해 주세요, 그랬던 거 생각나서.” “그러게 왜 사제님이 가셨어. 아저씨 보내지.” “학교 꼭 와 보고 싶다셨거든. 동풍이 오빠네도 갔대.” “거기도 꽤 떠들썩했겠네.” 휘안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월광과 싸울 때 빼고는 그다지 없다. 이상하게 다들 땅에서 둥둥 떠서 걸어가는 듯하다. 위화감을 느끼던 시열마저 전염되어 쿡쿡 웃으며 걷다 보니 평소 집으로 가던 방향이 아니었다. “우리 지금 어디 가요?” “어, 말 안 했어?” 셋이 동시에 입을 모아 답했다. 아소 너 말 안 했니? 오빠가 말 한다며, 내가 언제. 시열은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들 묘하게 들떠 있어. “전혀요.” “아. 꽃놀이.” “이 밤에요?” “그게 월광이가 좋은 데 알고 있다고 해서.”
카페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작고 소박한 공원에 밤에 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뭐든 밤에 보면 다르다더라고. 좀 더 요기롭다던가.” 그렇게 말하는 휘안의 붉은 머리마저 밤의 불빛 아래서 보니 새롭게 보인다. 꽃들도 낮에 보는 꽃들과 달리 어둠 속에 새겨놓은 듯 묘한 질감으로 풍경에 붙박혀 있었다. 좀 더 손에 잡히지 않을 듯 비현실적이고, 좀 더 투명해 보이고, 좀 더 평소 보던 풍경처럼 확실하지 않아서 번질 듯 하고. 두 그루의 큰 목련나무 사이에 엷은 주황색 가로등 불이 비치고 있었고 목련꽃은 큰 등불처럼 흔들리며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벚꽃 잎이 공중에 떴다 천천히 가라앉았고 그 뒤로 진달래가 엷게 분홍빛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옆에 버들가지가, 개나리가 찰랑찰랑 흔들리고 있었다. 온갖 색채가 가로등 불빛 밑에서 안개처럼 뒤섞이고 있었다. 그리고 목련나무 쪽을 다시 보니 돗자리에서 아는 얼굴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시열이 왔어, 월광 언니.” “오 시열이 어서 와. 날씨가 미쳐서 벚꽃이랑 목련이랑 진달래가 같이 피니 이것도 꽤 진풍경이긴 해.” “시열이 어서 오렴.” 월영과 월광과 심현이 인사를 건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월광이 키들키들 웃으며 한쪽 무릎을 세운 양반다리로 앉아 세운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한 손으론 술잔을 내밀고 있었고 그 잔을 심현이 채워주고 있었다. 동풍이 돗자리에 누워 꽃잎을 흔드는 바람을 구경하고 있었고 월영이 어느새 달려와 아소의 손을 잡고 벚나무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꽃잎을 맞아보려는 모양이다. “오빠 술 사왔어?” “애들 마실 음료수까지 추가해서 사 왔다. 넌 나보다 술이 먼저냐?” “아냐 그럴 리가. 애들이 먼저고 그 다음이 술이고 다음이 오빠지. 시열이 어서 와서 앉아!” 가볍게 티격거리는 월광과 휘안도 오늘은 꽤 기분이 좋아보인다. 순식간에 돗자리까지 밀려와서 앉으니 동풍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돌아보니 하늘을 보고 있다. 같이 보란 뜻이지, 저건. 동풍의 옆에서 하늘을 보니 주황빛으로 빛나는 목련꽃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보면 제일 예쁘다.” “그렇네.” 아무 말 없이 하늘만 보고 있어도 어쩐지 많은 말을 한 기분이었다. 나란히 앉아 하늘을 보고 있다 옆에서 주스잔을 내밀어서 주위를 돌아보니 머리에 꽃잎이 붙은 월영과 아소, 서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휘안과 월광, 진달래를 쓰다듬고 있는 심현, 그리고 주스잔을 내밀고 있는 초로가 보였다. 이래서 사람들은 꽃을 보러 가는구나, 시열은 새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 하나를 배운 기분으로 초로가 내민 잔을 잡았다.
윈디 언니 리퀘, 꽃놀이 하는 T.A 1차 창작을 간만에 하려니 글이 안 나옵니다ㅠㅠ 요 근래 삶이 고달프신 우리 언니를 위해서. 그리고 밤에 꽃구경 가고 싶었는데 못 간 나를 위해서. 꽃은 밤에 보면 더 좋아요 흑흑.
아, 그리고 하루에 리퀘를 두 개 받은 이유. 양다리를 걸칠 땐 두 상대 모두에게 극진하게 해야 나중에 칼침을 안 맞는대요(먼산)
-지금 행복하세요? 이렇게 물으면 보통 대답은 네, 혹은 아니요, 혹은 그건 왜 묻소,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뉘게 되어 있다. 그런 답이 나오게 되어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심현은 언제나 그렇듯 별 표정없이 심각하고 진지하기만 한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대답했다. 드문 일이었다. -그거 사는 데 그렇게 중요한 거야? 뜻밖의 답에 허를 찔린 월영이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냥 회식 같은 것이다. 아니,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모여서 뭔가 먹는 걸 빼면 일반적인 회식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과 같은 부분은 거의 없다. 그저 두어 달에 한 번, 힘든 일을 하고 나면 나오는 돈에서 일정 금액을 떼서 모아두었다-돈 관리는 초로가 했다.-다들 모여 늘 먹는 밥 말고, 각자 즐기는 간식 같은 것을 먹는 자리. 몇 명씩 모여서 술을 한 두 잔 나눠 마시고 술을 못 마시는 멤버들, 미성년들이나 심현 같은 이들은 차를 마시는 평화로운 모임이 어쩌다 꽃이 곱게 잘 피었다는 이유만으로 가게 밖으로 이어진 것이다. 강변에는 벚나무가 하나 가득, 산에 가면 진달래가 피었다지만 가로수에 대신 철쭉이 활짝 핀 그런 좋은 밤이었다. 마침 달까지 살짝 붉은 빛을 띤 보름달이라 매우 고왔다. 풍류가 별 거냐며 호기롭게 잔을 돌리는 월광 덕에 심현도 잔을 잡았다. 못 드시는 줄 알았어요, 아니 그냥 습관상 안 마시는 거야. 사실 오늘 처음 마시는 거다. 와, 그럼 우리 사제님 첫 음주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건배! 잔잔한 웃음이 섞인 대화가 오고 갔다. 부드럽게 부풀어오른 맥주 거품이 달처럼 둥글었다. 입 속에서 구른 거품이 목으로 둥실둥실 넘어간다. 낯선 감촉에 눈을 크게 뜬 심현에게 초로가 웃으며 소주잔을 건넸다. 이거 예쁘지 않나요. 잔을 받아들어 살짝 마신 심현이 쓰고 맑고 달고 화끈하다고 표현하자 옆에 앉아있던 동풍이 미소지었다. 기분 좋게 적당히 마시고 살짝 취기가 올라 둥실둥실 몸이 땅에서 떠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휘적휘적 걸어가 찬물로 씻고 말간 몸과 마음으로 잠들 수 있는 그런 밤이었다. 말은 안 해도 다들 그런 기분이었으리라.
-사제님, 화 나셨어요? 그런 중에 술김에 흘린 질문에 돌아온 답이 너무도 뜻밖이라 놀란 월영이 물었다. -아니, 그냥 좀 취한 거 같은데. 짤막하게 대답하고 심현은 보일듯 말듯 미소지었다. 원래 저 세계 사람들은 얼굴 근육이 부족해서 표정 만드는 게 힘든 거 아닌가 하는 고민을 아소가 해 본 적 있을 만큼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적은 얼굴이었다. -그럼 사제님 정말 안 행복한 거예요? 심각한 얼굴로 묻는 아소의 머리를 심현이 살짝 쓰다듬었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취한 거 맞다. 사제님은 취하면 감정이 풍부해진다. 시열은 마음속에 메모했다. -그거 아냐. 이다, 아니다로 나누기 복잡해서 그래. 오, 우리 사제님이 긴 이야기를 하실 모양이군. 초로가 웃으며 거들자 잠시 쑥스러운 듯 먼 데를 보고 있던 심현이 헛기침을 했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되니? -안 돼요. 월영이 놀래키셨잖아요. 쟤 오늘 잠 못자면 사제님 책임. 월광이 반농담처럼 던진 말에도 그녀는 진지했다. -그러네. 설명이 너무 작았나봐. 그럴 땐 적었구나, 인데요. 드물게 휘안이 그녀의 어눌한 한국어를 지적했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다들 조금씩 평소보다 정신을 풀어헤치고 있는 그런 밤이었다. -뭣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 그래, 내가 아직 월광이보다 어릴 때 이야긴데 다들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낮은 목소리가 마치 연설을 할 때처럼 독특한 발성으로 울렸다. -소원을 이루는 꿈을 꾼 적이 있었지. 언제나 그렇듯 낯선 단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사제가 되고 싶었어. 그걸 해야만 했고 또 그걸 하고 싶었거든. 정말로 사제가 되었지. 지금도 내 이름은 사제잖아?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중얼거리자 휘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되고 보니, 내가 정말로 원한 것이 맞는데도 가끔 생각이 드는 거야. 이 모든 걸 다시 되돌린다면 좋을 텐데, 하고. -사제 일이 싫으셨나요? 솔직한 어린아이의 화법이 이럴 땐 고마운 법이다. 이미 나이든 어른이라면 묻기 힘들 질문을 동풍이 대신 해 주었다. 그 사제는 웃었다. -아니. 난 사제가 되고 싶었대도. 내가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데? 음,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렇지. 그냥 차라리 계속 소원을 이루는 꿈을 꾸었으면 하고 바랐어. 내가 가장 원하는 일을 하는 순간에도. 어쩌면 그 일을 하고 싶은 꿈을 꾸고, 그 일을 하게 되는 꿈을 꾸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게 아닌가 하고. 아, 하고 휘안과 월광이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사제가 아니게 되었지. 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말은 금새 묻혔다. 대체 사제가 아니게 되는 건 무슨 뜻일까, 잠시 생각하던 월영은 이어지는 말에 머릿속에서 구르던 생각을 놓쳐버렸다. -그 때 나는 불행하거나 행복하냐고 내게 물을 여유가 없었어. 여기에 와서 처음엔, 다들 그랬겠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말을 배우고, 이름들을 새로 배우고, 새로운 생활습관을 익히고, 오늘처럼 처음 먹어보는 것들을 먹어보고. 이러느라 바빴어. 지금도 그러고 있잖니. 그 틈틈이 가끔 생각하는 거야. 나는 또 다시 소원을 이루는 꿈을 꾸게 되었구나, 하고.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시열의 머리를 심현이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럼 또 다시 꾸게 될 꿈은 뭐냐고, 용기를 내어 물어볼 요량으로 동풍이 심현을 쳐다보자 그녀는 입에 손가락 하나를 댔다. -진달래가 좋은데, 철쭉이라 아쉽다. 이 꽃 철쭉 맞지, 응, 그래. 내년엔 진달래 보러 가자. -사제님 지금 얼렁뚱땅 말 넘겼죠! 아 진짜, 이럴 때만 치사하게, 어른들 진짜 치사해요! 월광이 칭얼거리듯 화를 내자 심현은 유쾌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 안 치사해. 그냥 부끄러워서 그래. 그럼 다음에 또 술 마시러 나와요. 왜 그래야 하는데. 웃음 섞인 대화가 한 차례 파도치고 아까 하던 말들은 말에 쓸려 사라졌다. 그리고 심현은 혼자 생각했다. 행복하건 불행하건 여기가 내가 살아야 하는 세계고 여기서 새로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러므로 그런 건 물어도 대답해줄 수 없다고.
----------------------------------------------------------------- 술이 고파요. 누구 나랑 소주 두 병만 나눠마십시다. 한 병은 아저씨들 따르듯 꽉꽉 눌러 담으면 일곱 잔이니까 나눠 마시면 아쉽고 딱 한 병씩이 적당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저의 특기 중 하나는 어색한 자리에 가면 술 따위 마셔본 적도 없다는 듯 소주잔으로 입술만 적시면서 인상 쓰기, 술 못 마신다고 주장하기.......입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전 기분 좋은 날이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나 마음 편한 데 아니면 술 못 마셔요.
아니 이런 단순한 데서 시작했는데 저 언니는 왜 또 츤데레질이래요 기분나쁘게.
한동안 패러디만 죽어라 써 댔더니 이런 것도 쓰고 싶네요. 결론은 술 고프단 거였는데 뭐죠 저거;
눈을 뜨자 온통 어두운 청회색 세계였다. 아직 날 밝으려면 좀 남았나 하고 몸을 돌려 핸드폰을 여니 오전 여섯시가 좀 덜 되었다. 오늘은 날이 흐린가 하고 멀거니 핸드폰을 보고 있으려니 밝은 빛이 눈에 비쳤는지 자던 형우가 미간을 찌푸리고 몸을 뒤틀었다. 평소엔 예민과 담을 쌓고 사는 놈이 잠 잘 때는 인기척에 예민하다. 얼른 핸드폰을 접었음에도 형우가 부시시 눈을 뜨고 신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몇 신데? -이제 여섯 시. -어, 여섯 시? 형우가 후닥닥 몸을 일으켰다. 이불 밖으로 빠져 나가 간밤에 벗어놓은 옷을 주섬주섬 걸치더니 얼른 밖으로 나갔다. 얼굴에 물이라도 축이러 가려는 게지. 신재가 바지를 꿰어 입고 이불 위에 주저앉아 티셔츠에 목을 밀어넣고 나서 눈을 들어 보니 형우는 아직도 문 안에 있었다. 문고리만 잡고 있었다. 문을 열며 복도를 슬쩍 살피는 모양이 꼭 죄 진 놈 같아 웃겼다. 신재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옆방 사는 놈 나가고 없다고 어제 안 카더나. 그냥 나가라. -그래도. -수상하게 생각할 놈 아무도 없거든? 남자 자취방에 남자가 와서 자는데 뭐 문젠데? 아줌마한테 허락도 받았잖아. -어 뭐. 눈치만 슬슬 살피고 있는 꼴이 우습다 못해 짜증이 난 신재는 이불 밖으로 나가 아직도 문고리를 잡고 복도로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있는 형우의 등을 펵 소리가 나도록 걷어찼다. -야, 아프잖아! -아프라고 차지 아프지 말라고 차나? 등을 쓰다듬으며 형우가 불평을 하건 말건 신재는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 걸려있는 형우의 상의와 목도리를 팔에 걸고 방구석에 놓여있던 형우의 가방을 발로 차던졌다. 상의와 목도리는 형우의 등을 향해 정확히 날아가 머리와 어깨 위에 얹혔다. 졸지에 옷을 뒤집어쓰게 된 형우가 뒤로 돌아 신재를 노려보았다. -뭐고? -씻고 나가라고. -야, 밥은 먹여 보내라! -웃기네. 가다 니 알아 사먹어라. 부당한 대우라도 받은 듯 항의하던 형우는 신재의 대꾸를 듣고 멀거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 묻었나? -니 오늘은 또 뭐 땜에 카는데. -뭘? 니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학교 간다더니. 얼른 가라. -거 참. 옷을 입고 가방을 멘 형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간다. 나중에 보자. 뒤도 안 돌아보고 자취방을 빠져나가는 발소리와 대문을 여는 금속성 소리가 났다가 멎고 한참을 있다가 신재는 창문을 열고 이불을 퍽퍽 소리가 나게 털기 시작했다. 내가 미친 놈이지, 내가 정신이 나갔지 하는 추임새를 넣어 가면서.
----------------------- 2007년 정초에 썼던 얘들 둘 나오는 외전을 기억하는 분이 계시려나. 아무튼 그겁니다. 올해는 꼭 다 쓰고야 말겠어요.
"오빠, 힘 좀 써라. 박스가 뭐가 무거워?" "야, 그럴 거면 네가 들어라!" 뭐 이런 계집애가 다 있나. 휘안은 책으로 꽉 찬 라면박스를 두 개째 옮기며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경험을 했다. 정신줄이 본체와 접속을 해제할 때는 뚝, 소리가 납니다. 정말입니다.
"오빠-도와줄 거지?" 월광이가 음흉한-본인은 상큼하고 소녀답고 우아하다 주장하는-미소를 지으며 다가올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 휘안은 경계경보를 발령시키고, 미간에 주름을 잡고 월광이를 노려보았다. "뭘, 어떻게, 언제 도와줘야 되는지 말 안 하면 안 해 줘." "와, 치사해! 당연히 그냥 도와줘야지! 오빠가 돼갖고 동생 부탁 하나 못 들어주냐?" 네가 날 언제 오빠로 대접이나 했었냐, 라는 말은 실체를 갖추지 못하고 사라졌다. 꺼내봐야 좋은 게 하나도 없으니까. 게다가 빚도 있었고. 사실 자신은 빚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며칠 전, 월광이가 꼭 가게 문 닫고 먹겠다고 찍어놓은 호두파이를 아무 것도 모르고 팔아버린 후로 월광이가 얼마나 으르렁거리며 화를 냈는지. 장사한 것도 죄가 되나요. 휘안은 한숨을 쉬었다. “왜, 싫어?” “아, 아니……. 싫긴 누가 싫대. 뭐 하면 되는지 이야기 좀 해 보라구.” 월광이의 미소를 보며 휘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눈 딱 감고 하루만 이 몸을 희생하면 며칠은 편히 살 수 있을 거야.
……희생이 과하지 않나요, 이건? 월광이가 방에서 라면상자를 발로 차서 밀고 나오더니만 그 안에서 얇고 묘하게 이상한 기운이 풍기는 책을 꺼내며 한 권씩 비닐로 포장하라고 한 것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그런데 그 책을 이고, 큰 우드락도 지고 양재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서-당연히 차비도 안 준다.- 책을 책상까지 운반하라는 것이다. 그 크기만 빌어먹게 큰 유리건물은 대체 뭐 하는 곳이냐. 그곳은 이상한 옷을 입은 아이들로 북적였고 -심지어 한길가에서 머리 위로 토끼귀 처럼 올린 손을 파닥이며 춤을 추는 애들이 없나 동물 잠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애들이 없나!-책상과 의자가 빽빽하게 놓여있고 택배상자가 즐비했다. “야, 월광아……. 좀 받아는 주면 안 되냐?” 책상 위에 박스를 던지다시피 놓으려다 월광이의 눈초리에 다시 박스를 곱게 바닥에 내려놓으며 휘안이 투덜댔다. 손목이 아프고 허리가 아팠다. “그거 중요한 거야. 막 다루면 안 돼.” 아,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그리고 책 꺼내서 여기 진열하고, 여기 이거 세워서 판넬 좀 만들어.” 아까 자신이 날라온 큰 우드락판을 자르기까지 하란다. 이거 네 일 아니냐? “넌 뭐 할 건데?” “나? 팬시 붙이고 오빠가 세운 판넬 꾸며야지.” 아, 그래. 너 하월광이지. 내가 깜박 잊을 뻔 했구나. 월광이의 손에는 알록달록한 종이조각 코팅한 것들이 잔뜩 들려있었다.
장내는 북적였고, 월광이가 앉아있는 곳-부스라고 했다-에도 누군가가 들러 책이며 그 코팅종이를 사 갔다. 월광이는 손님들과 꺄악 **님 오랜만이에요 요즘은 뭐 버닝하세요 좋은 책 건지셨어요 등등 인사를 주고 받았고 그 동안 휘안이는 책을 건네고 돈을 받고 잔돈을 계산하고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하고 체크도 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했다, 노는 거 빼고. “재고 처리하러 왔어요. 그린 님은 뭐 하러 오셨어요?” “책 사러 왔죠. 줄 안서려고 부스 냈어요. 더블오 파거든요, 요새.” “와, 좋으시겠다. 메이저네요? 매진됐음 좋겠어요.” 그리고 월광이는 휘안이가 못 하는 그 유일한 일을 하고 있었다. 조금 화가 났다.
그 때. “어! 월광아!” “언니, 오빠!”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리고 월광의 얼굴이 굳었다. “뭐야, 세상에. 아저씨? 사제님? ……월영이랑 시열이, 동풍이에……누가 아소를 여기 데려왔어?” 비명으로 시작한 말이 분노로 끝났다. 주위를 돌아보며 아시아에 이렇게 게이가 많았냐며 신기해 하는 초로와 이런 거 파는 건가요, 재미있겠는데 나도 해 볼까 하며 즐겁게 부스를 구경하는 심현과 파랗게 질린 동풍이와 노멀 에로본을 사고 얼굴 붉히는 월영이와 무심한 표정으로 월광의 부스로 척척 걸어와서 의자에 앉아 자는 시열이와 팬시 보고 신나하고 나도 동물 잠옷 입고 싶다고 조르는 아소를 보고 놀라지 않으면 그게 이상하긴 하지. 하지만 월광의 반응은 휘안의 생각과 조금 달랐다. “누가 여기 가르쳐줬어요? 뭐? 거실 컴퓨터에 약도가 남아있어? 아소 너 누가 언니 하던 거 훔쳐보래? 그리고 사제님 하긴 뭘 해요오! 그림 그리고 글쓰시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심현은 나 그림도 글도 자신없는데 하며 동인계 진출의 꿈을 접었다.- 야 월영이 너 그거 사 가라 그냥! 보기만 하지 말고! 그리고 누가 동풍이 데리고 나가란 말야, 아저씨 여기 게이 페스티벌 아니라고요!” 살짝, 유쾌했다.
----------------------------------------- 부스에서 썼습니다. 저건 진짜 삼돌이네요. 머슴.
언니한테 리퀘를 받았습니다. 별로 안 깁니다 OTL 그리고 원래 이런 건 일 하면서 써야 제 맛입니다. 제 마음이 바빠서 좀 비약이 심합니다만;
대한민국에서 성년 기준이 만 18세였나, 19세였나, 20세였나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떨 때는 20세고 또 어떨 때는 18세고 바뀌기도 자주 바뀌고 해서. 아무튼 내가 있던 곳에선 몇 살 부터 술을 마실 수 있었더라. 기억이 희미한 과거를 떠올리며 휘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얘 여기선 미성년인데 여기서 술 마시게 놔 둬도 되는 거냐. 문이야 닫았다고 해도 여기는 다과를 파는 가겐데. 카페 한 구석에 앉아서 혼자 술을 따라 안주도 없이 홀짝홀짝 술잔을 비우고 있는 월영이 보였다. 쟤 도대체 언제 부터 저기서 저러고 있었지. 사실 잔이라고 해 봐야 가게에서 에스프레소를 낼 때 쓰는 잔이고 그러니까 거기에 소주를 담아마시면 정말로 폼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마신다. 술병을 잡고 잔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손목을 살짝 구부려 잔에 다르는데 넘치지도 않는다. 조르륵, 잔을 한 절반쯤 채웠을까. 그렇게 흐르듯 술을 따라 역시 눈은 먼 데 두고 잔을 잡아 한 두 모금에 넘기고, 잠시 인상을 쓰고, 술병을 쳐다보다 다시 술을 따라 마시고. 자세히 보니 녹색 병은 소주병이 아니었다. 색은 녹색인데 병이 네모졌다. 저거 이름이 그러니까, 아, 그래. 고량주. 굉장히 독했지 아마? 그리고 빈 병이 하나, 술이 찬 병이 하나 있는 것을 본 휘안은 머리가 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취하면 실수를 한 적도 있다는 거,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런 술을 왜 혼자 홀짝거리면서 마시고 있냐고, 안주도 없이, 같이 마실 사람도 없이.
-야, 월영아! -왜, 오빠? 휘안이 부르자 월영이 탁자에 기댄 몸을 일으켜 사람을 쳐다본다. 목소리는 좀 잠겼지만 알코올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돌아다본 얼굴도 눈 빼고는 말짱하다. 그래, 본래 알코올은 증발하는 물질......이 아니고 월영이 쟤 정말 술 세구나. 아니아니 이것도 아니다. 휘안은 월영의 얼굴에서 위화감을 감지했다. 어떻게 독주를 마시고 눈 빼고는 다 말짱할 수 있냐고. 한 부분만 처져 있는 건 뭔가 잘못된 거다. 이건 그러니까, 놔둘 문제가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한 휘안은 월영에게 다가갔다. 여차하면 술병을 뺏아버릴 생각을 하고. -왜 그래. 안 마시던 술을 마시고. -음, 그냥. -이제 그만 마시고 올라가. 가게는 내가 정리할테니까, 응? 휘안이 말하자 월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조금만 더 마시고 갈게. 잠시 나 좀 놔두면 안 될까? -뭣 땜에 그래? 월영은 휘안의 얼굴을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빈 그릇을 털어내듯 아무 것도 얹혀있지 않은 얼굴을 조금 좌우로 흔들며 웃었다. -별 거 아냐. 그냥 옛날 생각도 좀 나고 해서. 이계에서 온 멤버들 치고 옛날 생각이 괴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과거가 괴로운 것도 종류가 여러가지다. 자신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 그 곳에서 살 수 없어서 이리로 온 사람, 그리고 월영이처럼 정말로 좋아하고 아끼던 것들을 모두 두고 와서 미련이 남고 회한이 남는 사람. 하필 가게에 남은 사람은 자기 뿐이었다. 고로 월영이를 말릴 사람도 자기 뿐이다. 휘안은 잔을 하나 가져와서 월영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의자를 하나 빼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 오빠? -먹어 없애면 줄어들테고, 그럼 가서 자겠지. 오빠도 한 잔 줘라. 월영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으며 휘안의 잔에 넘실넘실,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그리고 잘 안 먹던 독주를 마시고 잠든 휘안을 월영이 '오빠는 술이 약해서 큰일이야.'라며 방에 데려다줬다는 후일담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이다.
1. 집에 일찍 온 시열과 동풍이 거실에서 뭔가 만들고 있었다. 아소도 재미있겠다고 끼어들었고 일이 없어 한가하게 있던 월영도 도울 게 있으면 하겠다고 나섰다. 주방을 뒤져 종이컵을 꺼내더니 컵 밑 부분에 십자 모양 작은 칼집을 내고, 컵 바깥에 색지를 붙이더니 '고시철회 협상무효'라는 메시지를 쓰고 있었다. 시열은 색마분지에 MB OUT이라는 메시지를 매직펜으로 쓰더니 다른 종이에다 심시티는 혼자 해라, 고 쓰고 있었다. 옆에서 아소가 구호 옆에다가 눈이 찢어진 쥐를 그리고 있었다. 월영은 카페에서 초를 찾아 들고 왔다. "뭐 하니?" 방에서 비척비척 걸어나온 초로가 하품을 크게 하더니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 아저씨. 웬일로 낮잠을 다 주무세요?" 동풍이 초로를 보고 반색했다. 요 근래 얼굴을 보기 힘든 사람이 카페의 30대들이었다. 지난 봄부터 무슨 일만 있으면 고궁으로 불려나가더니, 이제 호출되는 일이 잦아졌다. 심현의 표정이 가라앉은지 1주일이 넘었고-사제였으면서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이렇게 약해서 되겠냐며 심현이 피식 웃었는데 그 웃는 표정이 엄청나게 심각했다고 아소가 주장했다.-초로의 담배도 조금씩 늘어갔다. "피곤해서. 방금 들어왔거든." "사제님 뭐 하세요?" "주무셔. 많이 피곤한 모양이더라. 근데 보자.......이게 다 뭐냐?" 초로는 거실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종이며 펜이며를 바라보았다. "학교 숙제야?" "아뇨. 저희 할 일이 좀 생겨서요." 시열이 대답했다. "MB가 누구지......아." 초로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알겠다는 듯 손바닥을 쳤다. "그러니까 이거 뭐냐. 반정부 집회?"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들을 훑어보는 초로의 표정이 어땠는지, 아이들이 피식 웃기 시작했다. "에이 아저씨도, 직접 민주주의라니까요." 이것은 시열의 한 마디이고, "야, 직접민주주의가 뭔지 설명부터 해 드려야지." 이것은 동풍의 한 마디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요." 이것은 월영의 한 마디이고, "이럴 때 본때를 보여줘야한다고 낚시하는 아저씨들이 그랬어요." 이것은 아소의 한 마디였다. 이 녀석들, 절대로 내가 나가지 말라고 말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구나. 아이들이 한꺼번에 재잘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없었는지 잠시 미간을 찌푸린 초로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국민의 뜻을 받들라, 이거지?" "네. 이 나라에는요, 국민들의 뜻을 반영하는 정치가가 나온 적이 별로 없었어요. 요 최근 60년간요. 그래서 가끔 나라꼴이 이상해지려고 하면 국민들이 나서는 거랬어요." 동풍이 초로를 위해 설명했다. "그게 민주주의라고요." 아하, 초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짓 하면 안 된다." "네."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촛불 들고 있는 비폭력집회인걸요. 위험할 거 아무 것도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시열이가 생긋 웃었다.
2. 뉴스를 보던 월광이 저 자식 죽여버리겠다고 난리를 치는 것을 휘안이 간신히 뜯어말려놓았으나 월광은 짜증나고 열 받아 못 살겠다면서 카페 구석에 고이 모셔놓은, 얼마 전에 차장님이 갖다놓은 술병 마개를 열고 안주 하나 없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 그렇게 마시는 거 아니라며 심현이 부엌에서 강냉이를 좀 들고 왔고 월광은 강냉이 안주 삼아 브랜디를 목에 털어넣고 있었다. 옆에서 휘안이 그 모습을 보며 오늘 밤에도 이 기집애가 날 괴롭히다 자겠구나, 하며 슬퍼하고 있었다. 뉴스를 보던 초로가 한숨을 쉬었다. "휘안 군, 요샌 손님들도 별로 없지?" "네." "우리도 바쁘니까 어떻게 보면 참 다행이긴 한데 말이다." 월광이가 마시는 술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두 남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 이렇게 일하다가 한 사람 쓰러지거나, 아예 정말로 싸고 질 좋은 능력자로 대체되는 거 아냐?" "에이 설마요." "가능성 없진 않은 거 두 분 다 알고 계시죠?" 월광이가 술병을 내려놓고 살짝 혀꼬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나라에 와서 산 지가 몇 년인데, 이렇게 앞이 안 보인 적도 처음이었다. 초로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투표권 우리도 주면 안 되나?" "투표권은 왜요?" "우리 의견도 선거에 반영해야 될 거 아냐. 우리 대한민국 정부 소속 아냐?" "원래 대한민국이 외국인에게 박하답니다." 외국인이랄지, 외계인이랄지, 이계 출신들이 쓴 웃음을 지었다. 이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살면서 느낀 점들을 떠올리니 참 막막했다. 초로가 반론했다. "우리는 사실상 한국인 아닌가? 이만하면 한국인이잖아." 한국에서 한국 이름을 가지고, 이 나라에서 인생을 마치겠다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는데 왜 우리는 한국인이 아닌가. 월광이 아주 간단하게 답을 말해주었다. "아저씨, 투표권 원하시면 돈을 많이 버셔서 대한민국 1%가 되세요." "얘가 좀 취했나보네, 월광아, 진리는 술 깨고 말해야 하는 거다. 아냐?" 휘안이 쓰게 웃었다. "안되겠다, 휘안아. 월광이 자기 방에 데려다주러 가자." 심현이 몸을 일으켰다. 둘이 월광을 부축해서 옮기는 것을 보며 초로는 월광이 마시던 술병에 손을 뻗었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는 옛말이 틀리진 않은데, 어째서 내가 살려고 마음먹은 이 곳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일단 한 잔 마시고 나서 생각을 좀 더 해 봐야겠다.
--------------------------- 저번에 쓴 글 뒷이야기를 좀 잇고 싶었어요. 저번 글도 너무 못 써서 나중에 수정 들어갈 생각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쓰는 버릇 좀 고쳐야 되는데 말이에요.
돌로 포장된 마당에, 2층으로 쌓아올린 기와지붕이 날렵했다. 지붕 위에는 동물 모양의 뭔가가 달려있었고 지붕아래에는 붉고 푸른 무늬가 화려했다. 현판에는 단정한 글씨체로 근정전, 이라고 적혀있었다. 아니, 심현이 모국식 발음으로 읽자 월광이 그게 아니라고 가르쳐주었다. 심현은 전에 도시락을 싸서 카페 전원이 이곳에 놀러온 날을 떠올렸다. 아소가 뭐든 신기해하며 이곳 저곳을 다니며 구경했고 월영이도 즐거워했었다. 휘안이 낯선 건물에 대해 묻자 월광이가 전에 이게 다 무슨 뜻인지 설명을 해 주었는데. 저건 십이지라는 열 두 동물이랬지. 그리고 저게 단청이랬지. 붉은 기둥과 녹색 문살이 의외로 잘 조화가 되었다. 저런 색을 써도 난잡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놀라웠다. 입구에서 준 안내팜플렛에 의하면 이 건물은 예전, 이 나라의 왕이 집무를 보던 곳이라고 했다. 모국에서 언젠가 큰 행사가 있어 궁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때도 이렇게 넓은 마당이 있고 품계석이 위엄있게 박혀있었지. 심헌은 위엄과 품위를 갖춘 건물을 한참 쳐다보았다. -이런 일만 없으면 참 좋은 곳이겠어요. -그렇게 보여요? 초로가 지도를 들여다보다 심현을 쳐다보자 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어서는 안 될 일 때문에 건물이 고생이겠군요. -하긴. 초로가 한숨을 쉬었다. 백주대낮에 화기가 도성을 덮친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일 자체는 간단했다. 심현이 화마를 찾고, 초로가 화마를 다른 공간으로 보내는 간단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화마가 있는 곳이 경복궁이라는 점이다. 처음에 일을 의뢰하러 과장이 카페에 왔을 때에도 심현은 그 점을 이상하게 여겼다. -과장님, 이상합니다. -뭐가요? -왜 저기 화마가 있습니까? 심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했다. 한국어로 물어보려니 조금은 힘이 드는지 카페사람들이 간신히 현대인답게 고쳐놓은 말투가 또 묘하게 어색하게 변했다. -왜, 라뇨? -저기는 궁궐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런 건물은 어떻게든 모든 화를 막기 위해 대비를 세워두는 거 아닙니까. -대비가 아니고 대책입니다. 음, 맞아요. 심현의 실수를 교정해주고 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런 데 출몰하면 안 되는 게 화마인데, 이번에 일이 좀 생겨서 말입니다. -일? -뉴스 보셨잖습니까. 사제님 남대문 보셨죠? -남대문? 아아, 저번에 타버린 그거 말씀인가요. -네. 그 문이 수도로 침입하는 화기를 막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불에 타면서 요새 수상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에요. 두 분, 잘 부탁합니다. 두 사람 말고도 몇 명의 에이전트들이 서울시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화마를 막고 있노라고 과장은 드물게도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심현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초로가 힐난조로 물었다. -정부는 뭐 하나? 아니 세상에 저런 건물이 타게 놔 둔단 말이야? -더 이상 묻지 마. 나도 요새 괴롭거든. 과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보니 안색이 영 좋지 않다. 초로가 반 농담조로 물었다. -자네가 괴로울 일이 다 있어? 과장이 초로를 돌아보고 웃었으나 그 웃는 얼굴에 날이 섰다. 목소리 톤을 낮추고 과장이 천천히 말했다. -농담 아니니까 그만 해. 진짜 공무원 생활 하며 이런 꼴은 처음 겪는다. 초로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저 친구 저런 표정 짓는 건 몇 년간 알아오면서 처음 보는데.
-간신히 잡았어요. 심현이 경복궁을 한 바퀴 돌다시피해서 화마들을 한 자리로 모았다. 초로가 처음 들어보는 기도며 낯선 말과 동작이 굉장히 많이 보였다. 화마들은 궁의 구석진 곳 여기저기 모여 꼭 지하철에서 뛰어다니는 초등학생마냥 발랄하게 떠들고 놀았다. 초로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심현의 설명은 그랬다. 심지어는 비웃듯 드므 위에 앉아 놀고 있는 화마도 있다며 심현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이렇게나 많았어요? 제법 수가 많아지자 붉은 기운이 희미하나마 초로의 눈에도 보일만큼 뚜렷하게 맺히기 시작했다. -네. 아주 제 세상이던걸요. 심지어 저기 쟤. 궁 뒤뜰에서 나무에 앉으려는 걸 간신히 이리로 데려왔어요. 심현이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심현의 뒤를 쫓으며 궁 여기저기의 공간을 일그러뜨려 화마들을 함정처럼 한 곳에 몰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던 초로도 심현이 하는 일을 보았다. 뛰고, 잡고, 소리지르고. 평소 쓰지 않던 강한 어조로 읊는 기도문은 생경했다. 그의 모국어를 모르는 초로의 귀에도 날서고 강압적인 내용임이 틀림없었다. -그럼 이제 다들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야지? 초로는 화마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심현이 잡은 화마들이 모두 한 군데로 모여들도록 쳐 놓은 결계를 푸는 동시에 다른 공간을 여는 작업을 개시했다. 신경이 여러군데로 분산되어 몹시 어려웠으나 화마들은 다행히도 고분고분히 초로가 이끄는 대로 다른 공간으로 빨려들 듯 이동했다. 간신히 끝을 내고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소매 끝으로 훔치며 초로가 심현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다 이리로 몰려왔답니까? 심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끈하게 태우려면 이 정도는 태우고 싶었대요. 평소에 못 해 봐서 짜증났답니다, 말이 되나요? -그러게 화마지. 이제 집에 갑시다. 가서 좀 쉬어야지요. 어째 좀 화가 난 듯한 심현을 달래듯 웃으며 초로가 말했다. -아마 다음부턴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이렇게 화마가 설치는 게 비정상이죠. 그러나 초로의 바람은 실현되지 못했다.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경운궁, 서울 시내 궁이라는 궁은 다 돌았고 궁궐 안의 전각 위치마저 외울 지경에 이르렀다. 궁 뿐만이 아니었다. 남산에도, 오래된 건물에도 화마는 나타났다. 갈수록 심현이 화마들을 상대하는 손속이 거세졌고, 초로 혼자 공간을 제어하기 어려워 초로를 돕기 위해 동풍이나 휘안이 불려갈 때도 있었다. 화마가 불을 붙여 바람을 억제하고 불을 다루느라 네 명이서 밤새 뛰어다닌 적도 있었다. 심현의 눈가에 다크서클이 생긴 지 며칠이 되었고, 초로의 손엔 평소보다 담배가 자주 들려있었다. 늦은 시간에 둘이 카페에 들어오면 시열이나 동풍이가 따로, 때로는 같이 가게에서 양초와 종이컵을 챙겨 나가는 날이 늘어갔다. 그 등 뒤에 대고 월광이가 조심해서 다녀와, 절대 교복 입지 말고 누가 어느 학교냐고 묻거든 묵비권 행사해, 알겠지? 같은 말을 한 마디씩 일러주었으나 두 사람은 정신이 없어 무슨 일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느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나중에 휘안에게 묻자 휘안이 촛불집회라고, 이 정부에서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들어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간다고 일러주었다. 한국 사정에 둔한 심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낮에 화마가 거리를 활보하는 나라가 정상일 리가 없지. 그것도 옛 수도의 중심지에. 며칠 후 부터는 월광이가 휘안이를 끌고 시열, 동풍, 월영을 동반하고 거리로 나가는 일까지 생겼다. 일을 끝내고 막 돌아온 심현과 초로가 마침 가게를 나서려던 그들과 마주쳤고, 우리도 가겠다는 말에 두 분은 오늘은 좀 쉬시고, 내일부터 다시 가서 서울 도처에 출몰하는 화마를 막아달라며 월광이 웃었다. -초에서 불이라도 옮겨붙어 봐요. 당장 우리가 폭도들 되는 건데. 힘드시겠지만 부탁할게요, 아저씨. 네? -그래, 우리가 그건 확실하게 막아줄테니 다녀와라. 조심하고. 알겠지? -그래. 월광이 꼭 조심해라. 유치장까지 가면 우리 말도 잘 안 들어줘. 이미 유치장이 어떤 곳인지 경험해 본 심현의 말에 월광은 한층 유쾌하게 웃었다. -알겠어요 사제님. 그럼 아소 들어오면 저녁 부탁할게요. 그런데 아소 어디 갔어? -언니, 실은 아소 현장에 있는데. 시열이 눈치를 보듯 월광을 쳐다보며 말했고 월광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 그 이야기를 왜 이제 해! 어린애를 혼자 보내서 뭘 어쩌려고! -그치만 걔 정말 신나하면서 달려갔는걸. 이런 건 꼭 가 줘야 한다고. -아휴, 정말. 아무튼 두 분 집 좀 잘 부탁해요! 나란히 인사를 하고 다섯 명은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 듯 가게를 나섰다.
그날 밤, 모처럼 느긋하게 앉아 심현은 독서를 하고, 초로는 입에 담배를 물고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심현은 담배 한 대 정도로는 별 잔소리를 하지 않는, 담배연기에 둔한 비흠연자여서 초로가 담배를 태우거나 말거나 책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채널이 넘어가다 어느 채널인지,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광우병이 어쩌고 불법시위가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렸고, 초로는 채널을 고정시켰다. 독서를 하던 심현이 책을 덮고 화면을 주시했다. -불법이었나요? 의아한 얼굴로 심현이 말했다. 우리 아이들이 나간 시위가 불법일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 나라 법은 나도 잘 모르지. 그런데 아까 애들이 헌법에 결사, 집회의 권리가 있다는 말은 했어요. -집회의 권리? -모여서 자기 의견을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는 말이죠. 초로의 설명에 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네. 당연하죠. 이 나라는 국민이 정치를 한다고 하셨죠? -그랬지. 그런데 요새 보면 그거 맞는 말인지 헛갈린단 말이죠. 사제님도 그러시오? -네, 사실 잘 모르겠어요. 두 사람이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동안 다음 뉴스가 시작되었다. 그 화면에 찍힌 것은 낯이 익은 건물이었다. 담장 지붕은 내려앉아있었고 그 아래엔 무언가 부서진 흔적이 가득했다. 화마의 흔적이라 보기엔 담장엔 물에 쓸린 자국이 확연했다. 심현과 초로 둘 다 놀란 얼굴로 텔레비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제님, 저기 경복궁 아니오? -어, 예. 그러네요. 담이 왜 저래요? 며칠 전에 담장 근처에서 놀던 화마를 심현이 잡자, 재밌는데 왜 이러냐고 떼를 써서 심현이 화를 낸 적이 한 번 있었다. 화마를 향해 미간을 모으고 인상을 찌푸리며 태우려거들랑 파란 지붕 건물로 가서 확 불이나 질러 보라고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초로가 얼른 공간을 열어 화마를 이공간으로 보냈다. 도대체 화마한테 무슨 무서운 말을 하는 거냐고 하자 심현은 얼굴을 조금 붉히며 요새 월광이가 그런 말을 자주 하는 걸 듣다 보니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며 웃었다. 멀리서 온 이 사제는 보기보다 과격한 데가 있어서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폭발할 때가 있었는데 이번엔 수위가 조금 높았다. 도대체 왜 그랬냐고 묻자 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피곤한 티가 역력히 얼굴에 드러났다. 표정이 부족한 사람이라 평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드러나지 않는 만큼 이번의 돌발행동은 남들이 하는 것보다 훨씬 과격해 보였다. 아무튼 그 후로 화마가 덕수궁에 모이는 일은 없었고 그래서 궁궐은 멀쩡했는데 도대체 저게 무슨 일인가. -조용. 뉴스에서 설명한대요. 두 사람다 말을 멈추고 화면을 주시했다. 화면에선 건조한 목소리의 아나운서가 멘트를 읽고 있었다. -촛불시위로 인해 오늘 오전, 덕수궁 돌담이 무너졌습니다. 시위참가자들이 담장에 올라가…… 초로가 드물게도 거친 동작으로 텔레비전을 끄고 담배에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실내에서는 금연이라는 듯 인상을 찌푸린 심현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저러라고 화마를 잡았나? 참 기가 막히군. -말씀이 지나치세요. 그래도 화마가 저기 머물렀다면 건물이 다 탔을 거예요. 심현이 조용히 말했다. -그렇지만 사제님도 화나지 않나요. 이게 뭡니까. 저 흔적이 물이지 어디 사람 발자국 흔적이오? -그거야 그렇죠. 저렇게 빤히 보이는데 왜 저런 말을 할까요? 텔레비전에서는 계속 폭력시위의 문제점을 논하는 방송이 이어지고 있겠지. 초로는 고개를 저었다. -알잖아요. 이런 게 권력이지. -네, 그랬죠. 심현이 땅이 무너질 것 같은 한숨을 쉬었다. 둘은 한 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이런 꼴을 보자고 이 먼 세계까지 흘러왔는가 하며 심현은 자신의 나라에서 있었던 권력투쟁에 대해 떠올렸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심현이 말을 꺼냈다. -이게 혹시 그건가요? -그거라니? -호랑이를 피했더니 승냥이를 만났다고. -정확하십니다. 사제님 한국어가 많이 느셨군. 초로가 미소를 지었다. 심현도 미소를 지었으나 이내 그 미소는 사그러들었다. -그런데 하나도 기쁘지 않네요. 대체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요. 이런 식이어서는 화마들도 없어지지 않을거예요. 저 화기를 따라 같이 모여들텐데. -하긴. 초로가 아무 것도 없는 화면을 노려보다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저 애들, 오늘 촛불 들고 나간댔죠? -그랬죠. -우리 내일부터는 같이 갑시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아요. -네. 저 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죠. 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마도, 카페의 어린 아이들도, 이 나라의 자연도 모든 것이 어떻게 될지 난감하기만 했다. 앞이 보이지 않은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깜깜한 적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며칠 후의 어느 날. -아니 그러게 준공무원쯤 되시는 분들이 왜 그러셨습니까. 닭장차에 실려있던 -심현은 닭장차라는 말을 듣고 쿡쿡 웃었다. 물론 닭장에 대해 설명을 들은 다음이었다.- 이들은 과장이 현장에 나타나자마자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월광이 그래, 어디 나도 닭장차투어 한 번 해 보자, 유행이라며? 왜, 잡아가시지, 권력은 무섭냐? 등등의 대사에 온갖 욕을 섞어 퍼부어대려는 것을 간신히 휘안과 초로가 진정시켰다. 심현은 닭장차 안에 있는 사람들을 두고 내리기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으니 과장의 표정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차에서 내렸다. 카페에 도착할 때 까지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도착하자마자 미성년자들이 울먹거리며 네 사람을 맞이해서 아이들을 달래느라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까의 사건에 대해 과장이 처음으로 꺼낸 말이 저것이었다. -그치만 과장님, 저거. 텔레비전 화면을 가리키는 동풍의 손 끝을 따라가 보니 화면에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전교조, 라고 적힌 노란 깃발. 동풍이 느릿하니 말을 시작했다. -저 분들 중에도 공무원 있잖아요. 과장이 동풍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시열이 동풍을 거들었다. -맞아요. 사립학교는 전교조 못 들어가게 한댔어요. 우리 사회 선생님 전교조라서 학교에서 되게 구박받는다던데. 그치? -응. 저 분들도 하는 거니까 우리 보고 그러지 마세요. 도대체 고등학생이 언제부터 전교조에 저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어이없어하는 과장의 눈에 상황파악이 안 되어서 저게 뭐냐고 묻는 이계 출신 멤버들에게 설명을 해 주는 월광이 보였다. 선생님들이에요. 노조인 셈이죠. 우리나라 정부랑 보수언론이 제일 싫어한답니다. -저 분들이야 한국에서 계속 아이들 가르칠 분들이지만 여러분은 한국 출신도 아니시잖습니까. 그렇게까지 열성적으로 나서시지 않아도.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곳 아닌가. 내 보금자리가 불안한데 손을 놓고 있으면 될 일도 안 되지. 초로가 받아쳤고, 월영이 가세했다. -제 고향은 아니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 다들 실제로 고생하고 있고요. 올해 들어 일이 좀 많았어요? -그건 월영이 말이 맞아요. 과장님도 아시잖아요. 화마. 전 무슨 일이 생길까봐 불안합니다. 심현이 드물게 강경한 말투로 나섰다. 과장은 난처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잘 알겠습니다. 아무튼 조심하세요. 소문에 지금 강경진압책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강경? 여기서 뭘 더 강경해진단 거예요. 진짜 뭐라도 하려고? 월광이 발끈해서 주먹까지 쥐며 벌떡 일어났다. -자세히는 나도 모르지. 그런데 물대포에 물감을 섞는다는 둥, 예-전에 나왔던 시위진압법들이 하나씩 등장하고 있어. 조심해라. 다들 이 카페가 없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카페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에 카페 안이 조용해졌다.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정착한 곳인데. -그거 하나 이해 못 하면 그건 지도자가 아량이 요만큼도 없는 거지. 심현이 말했다. -설마 그 정도까지 하겠어? 그래도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사제님, 아량 없는 거 맞아요. 그치만 돈 되는 건 좋아하니까 우릴 쉽게는 못 놓을 거예요. 월영이 한 마디 하자 월광이 우울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아냐, 더 싸고 질 좋은 특수능력자로 대체할지도 몰라. 전원 굳은 표정으로 월광을 쳐다보았다. 여덟명의 머릿 속엔 동시에 그간 뉴스에서 보았던 온갖 민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경제만 살린다면 뭐든 좋다던 현 정권의 주장과 비정규직에 대한 뉴스와.......순간적으로 온갖 것들이 스쳐지나갔고, 서로 얼굴을 마주본 여덟 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쉬었다. -야, 그거 가능성 있는데. 휘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긴 이 나라는 싸고 질 좋은 걸 좋아해서 뭐든 시장경제에 맡기면 되는 줄 알지. 씁쓸한 얼굴로 초로가 휘안의 말을 받았다. -우리 일 못 하는 거예요? 심현이 하늘을 보며 한숨쉬었다. -우리 전부 비정규직으로 돌리고 일 못 하면 바로 자르는 거예요? 시열이 질린 얼굴로 말했다. 얼마 전 학교상담에서 졸업하면 취직할 거니까 대학은 안 갈 거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온 시열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 그럼 우리 일 못 하면 카페에서도 나가야 하는 거야? 동풍이 말했다. -그럴 리 있냐? 그러면 가서 싸워야지. 월광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와, 그럼 월광이 언니, 우리 전부 총파업해야 하는 거야? 특수능력자 민영화 반대하는 거야? 아소가 눈을 반짝였다. -그럴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휘안이 신음하듯 말했다. -대체 이 사람 누가 뽑은 거예요? -최소한 우린 아니다. 동풍의 질문 아닌 질문에 이계출신 멤버들이 합창하듯 답했다. -난 다른 후보 찍었어. 월광이 덧붙였다. 그리고 또 몇 군데서 한숨이 이어졌다. 내 주위에선 아무도 안 찍었다는데 대체 그럼 누가 저 사람을 찍은 거야? 그러나 이번에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 하는 김에 사제씨가 폭발할 때는 언제인가, 에 대한 답을 해 보았습니다. 이걸로 탕아월드 질문 이벤트, 완료했습니다. 깔깔깔.
오후라 햇빛이 살짝 노란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떨어진 햇빛이 툭 하고 튀어올라 녹슨 철제 난간에 둔하게 부서졌다. 조각난 햇빛이 눈에 들어가 따가웠던지 옥상 철제 난간에 등을 걸치듯 기대고 숨을 몰아쉬던 남자가 왼손으로 눈을 가렸다. “눈 따가우세요?” “새끼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옥상에 서 있는 남자는 두 명이었다. 두 남자의 손목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오른손목에 수갑이 묶인 남자가 더 젊었다. 색이 바랜 듯 엷은 갈색 머리에 입술이 얇았고, 검은 셔츠에 바지가 퍽이나 수상해 보였다. 왼쪽 손목에 수갑을 찬 남자가 으르렁거리자 갈색 머리 남자가 대꾸했다. “그럼 좀 쉬세요. 왜 계속 씩씩거리고 계세요?” “너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왼손목에 수갑을 찬 남자가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언뜻 보기에도 피곤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입을 일그러뜨리고 얼굴을 쓸어내린 손을 들어 머리를 움켜쥐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내 손이랑 네 손이 같이 묶이는데?” “제 말이요. 저 그만 가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나요?” 갈색머리 남자는 짐짓 괴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왼쪽 어깨를 으쓱했다. 왼쪽 손목에 수갑을 찬 짧은 검은머리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가긴 어딜 가! 오늘은 결판 좀 내야 쓰겠다. 도둑놈이 어딜 가?” “에이 형사님도. 괴도라면 도망가는 게 정석이죠.” “내가 오늘 너 묶어놓은 건 정말 후회 안 할 자신있다.” “묶여있는 게 좋으신가봐요?” 괴도가 느물거리듯 말하자 스포츠머리에 가까운 짧은 검은머리 남자, 형사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자기 주먹을 노려보았다. “그냥 사기를 치지, 혀 돌아가는 거 보니까 아주 적성에 딱이네.” 형사가 혀를 차자 괴도는 피식 웃었다. 웃자 눈이 반달모양으로 가늘어져 형사는 그 눈부터가 참 얄밉다는 생각을 했다. “에이,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어떻게 사람을 갖고 놉니까?” 형사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괴도를 노려보았다. “씹새야 너 이거 풀리면 보자.” “예, 예. 맘대로 하세요.” 형사가 노려보던 말던 상관하지 않고, 괴도는 난간에 머리를 기대고 다리를 쭉 뻗은 자세를 잡았다. 한숨을 쉬고 형사도 오른손으로 땅을 짚고 다리를 폈다. “그런데 너 정말 이거 못 푸냐?” “형사님은 열쇠 없으세요?” 형사가 왼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괴도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저번처럼 주머니 뒤져서 수갑 열까봐 두고 왔지.” 괴도는 오른쪽을 보며 생긋 웃었다. “에이. 사람을 못 믿으니까 둘이서 이 꼴이잖아요.” 형사는 웃는 얼굴이 꼭 여우새끼 같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어떻게 하면 이게 난간에 연결이 될 수 있냐?” “그러게 누가 수갑을 두 개 들고 오시랬나요.” “저번처럼 네놈이 수갑을 박살낼까봐 그랬지 나야.” “형사님은 저한테 애정이 너무 부족하시다니까요. 그렇게 절 못 믿으세요?” 괴도가 입을 삐죽거리자 형사가 주먹을 쥐고 괴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미친 새끼야, 경찰이 도둑놈을 믿냐? 믿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이 있어야죠!” 괴도는 머리를 마구 내저으며 주먹을 피했다. 잠시 공방전이 이어지고 형사가 한숨을 쉬며 주먹을 내렸다. “너랑 말 섞은 내가 바보지. 됐다. 무전 쳤으니까 조만간 누가 오겠지. 좀 쉬자. 그런데 너 진짜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저도 몰라요. 실수한 거죠.” “꼴 좋~다. 그러게 누가 방심하래.” 괴도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형사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날씨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2년째 쫓아다니던 놈을 잡으니 속이 시원해서 날씨가 좋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놈이 뭐라고 깐죽대도 진심으로 화가 나지 않는 것도 분명 그래서일 거라고 형사는 막연히 생각했다. “형사님?” 괴도가 형사를 불렀고, 멍하니 딴 생각을 하던 형사는 놀라 팔을 당기다 말고 씃, 소리를 내며 팔을 움츠렸다. 괴도가 오른쪽을 쳐다보았다. “다쳤어요?” 눈살을 찌푸리며 형사가 말했다. “수갑에 손목이 쓸려서 그런다. 아까 좀 난동을 피웠어야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형사가 괴도의 한 팔을 꺾으려는 순간, 괴도가 형사의 주머니에서 수갑을 하나 더 꺼냈다. 놀란 형사와 티격태격 싸우는 사이에 어찌된 일인지 수갑은 한쪽 끝이 형사의 수갑에, 한 쪽 끝이 난간에 잘 채워져 있었고, 형사와 괴도는 잠시 멍하니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조금 후, 둘은 손목을 미친 듯 흔들어대며 이럴 수는 없다고 외쳐대며 10여분을 반광란 상태로 보냈다. 그러다 무전을 치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은 형사였다. 괴도 잡기에 혼을 바쳤으나 혼만 바치고 소득은 없는 그를 위해 보내줄 순찰차는 없었는지 묘하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듯 했다. 아무튼 수갑을 풀겠다고 무리한 짓을 해서인지 손목엔 금속이 스쳐서 빨갛게 부어오른 자국이 몇 개 있었다. 살이 심하게 쓸린 탓인지 핏방울도 조금 비쳤다. 형사의 손목을 보던 괴도가 왼손을 뻗어 묶여있는 형사의 팔을 잡고, 자기 쪽으로 팔을 당겼다. “뭐 하려고?” “치료요.” 괴도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놔라.” 형사가 팔에 힘을 주었다. 괴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손목을 내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들었다. “싫습니다.” 괴로가 머리를 숙이고 가슴으로 형사의 팔을 잡아 눌렀다. 잠시 다리와 가슴 사이에 팔이 갇힌 형국이 된 형사가 팔을 빼려고 당기려는 순간, 괴도가 턱으로 수갑을 밀고 상처에 혀끝을 내밀어 부은 곳을 핥았다. 축축한 혀가 스치고 지나가자 잠시 뜨거운 느낌이 들다, 타액이 식으며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의외의 행동에 허를 찔린 형사가 잠시 힘을 풀자 괴도는 그 기세를 타서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며 손목을 당겼다. 팔이 당겨지자 형사의 몸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괴도는 형사의 팔목에 맺힌 피를 살짝 핥더니 피가 맺힌 부위를 빨고, 피 섞인 타액은 괴도의 혀를 타고 목으로 넘어갔다. 팔목에 댄 입술을 옆으로 밀듯 옮기고 다시 부은 부위를 핥았다. 혀가 지나가자 형사는 등을 움찔했고, 형사가 움찔거리지 않으려고 몸을 긴장시키자 괴도의 혀끝이 상처를 쓸듯 훑었다. 미묘한 감각에 팔목이 간지럽다고 형사는 생각했다. 상처를 핥던 괴도가 고개를 들고 형사를 쳐다보며 웃었다. “상처에선 참 묘한 맛이 나지 않아요?” “핥지 마라.” 형사는 고개를 돌렸고 괴도는 입끝을 들어올리고 웃었다. “형사님 얼굴 빨갛네요?” “그럼 이 상황에서 얼굴이 빨개지지 파래지냐?” 형사 자신이 생각해도 참 말이 안 되는 발언이었다. 그 사실을 의식하고 옆을 보자 괴도가 킥킥 웃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자식이 못 웃게 할까 고민하는데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형사가 반색했다. “저 소리 들리냐?” “네, 들려요.” 풀이 죽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생생한 괴도의 목소리가 한참 위에서 들렸다. 앉은키가 나랑 비슷했던 것 같은데 목소리가 왜 이렇게 위에서 들릴까, 하고 옆을 본 형사는 놀랐다. “어, 어?” 어느새 괴도는 수갑을 풀고 일어나 있었다. 물론 형사의 손목은 그대로인 채로, 게다가 도망갈 채비를 완전히 갖추고.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형사를 향해 괴도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야, 너!” “형사님, 정말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 주세요.” 괴도는 슬쩍 형사의 손을 잡고, 놀란 형사가 허둥대는 사이 형사의 눈에 눈을 맞추고 손바닥에 입술을 갖다 댔다. 손바닥에 닿는 따뜻한 기운에 한 번 놀라고, 사람의 날숨이 만드는 간지러움에 당황하고, 입술을 누르는 감촉에 굳은 형사를 놀리듯 괴도는 웃었다. “다음엔 다른 플레이하고 놀아요. 그럼 안녕~.” 이새끼야 죽을래! 라고 외치려고 입을 움직이는 순간 괴도는 사라졌다. 동료들이 도착해서 본 것은 수갑에 묶여 난간에 매달려서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형사뿐이었다.
------------------------- 에로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당위성도 없어 죄송합니다. 그런데 늘 이런 식이어서 더 죄송할 것도 없을 것 같네요;
-말이 안 되는 소립니다. 심현은 눈 앞에 서 있는 유령에게 말했다. -애초에 이승과 저승이 유별하다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이 곳에서의 존재기반이 약하신 분이 여기에서 무엇을 더 이루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눈 앞의 공기가 일렁이는 것으로 보아 유령이 무어라고 말을 한 모양이었다. 월영은 동풍을 흘끗 쳐다보다. 동풍이 긴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상황은 악화된 듯 했다. 세 명이 있는 폐가의 벽이 조금씩 흔들리며 벽에서 떨어진 가루가 세 명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점점 벽의 진동이 거세졌으나 움직이거나 소리를 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벽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더니, 진동이 멎었다. 심현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하실 말씀은 그것 뿐이신 걸로 알고 저도 마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이 아이들 좀 보세요. 여자아이 쪽은 지금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못 듣습니다. 그게 다예요. 여기 있어봐야 계속 이런 것 밖에 못 보십니다. 얼마나 허무한가요. 허무하다, 는 말을 입에 올리며 심현은 그야말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집의 벽을 울리고 , 물건을 옮기는 것 뿐이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그걸로 도대체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벽의 진동이 갑자기 커졌다. 월영의 귀에도 웅웅거리는 묘한 소리가 들렸다. 벽에서 뭔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동풍이 바람을 일으켜서 떨어지는 것들이 사람에게 맞지 않도록 했다. 동풍이 만든 바람벽의 뒤에서 월영이 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심현은 다시 유령과 대화를 시도했다. -계속 여기 계시면 이런 일 뿐일 겁니다. 찾아오는 사람은 저희 같은 사람들 뿐.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거예요. -계속 이렇게 행동하시면, 점점 당신과 이승 사이의 차이가 벌어지게 되겠지요. 그런 것을 원하셨나요? 대화가 계속 이어졌고 월영의 연주 덕인지 진동이 조금씩 약해졌다. 어느새 진동은 거의 멎어 동풍이 바람을 일으키지 않아도 괜찮은 정도로 진정이 되었다. -자, 그러니 이제 그만 가시지요. 시열의 눈에 동풍과 심현이 무언가를 잡고 여는 것처럼 보였지만 열린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공기가 조금 달라진 것을 느끼고 다시 동풍을 보니, 동풍이 한 손으로 슬쩍 V 자를 그리고 있었다. 드디어 일이 끝났구나 싶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심현을 쳐다본 월영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굳고 말았다. -가시는 길은 이쪽입니다. 무려 한 손으로 길을 안내하는 것 같은 포즈까지 잡으며 심현이 온화하고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월영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있나 싶었는지 얼른 월영의 시선을 따라 옆을 쳐다본 동풍이,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으나 심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잠시 후, 폐가는 조용해졌다. 남은 것은 유령이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일으킨 잔해 뿐이었다. 그렇게 폐가에서 벌어진 이상현상에 대한 일은 끝났지만, 아이들은 귀신보다 더 어이없는 것을 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뒷정리를 마치고 카페로 돌아가는 길, 버스를 타고 맨뒷좌석에 셋이 나란히 앉아서 한참을 가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제님이 그렇게 말 많이 하시는 거 처음 봤어요. 심현과 같이 일을 해 보기는 처음인 월영이 입을 열었다. -난 사제님이 그렇게 웃는 것도 처음 봤어요. 심현과 몇 번 같이 일을 해 본 동풍이 입을 열었다. -으응. 심현은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떄, 월영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 전화다. 과장님이네. 월영은 전화를 받았다. -아, 과장님? 네. 저희 일 잘 끝났어요. 주변 정리도 했고요, 아까 주신 것도 쳐 놨어요. 그거 이제 건물 철거한다는 표시 맞죠? 네. 뒷일 잘 부탁드릴게요. 통화를 끝낸 월영은 전화기를 넣고, 통화하는 것을 흥미진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심현에게 물었다. -사제님은 전화기 없으세요? -나? 있긴 있는데...... 심현은 들고 있던 천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이게 흔들려서 받아보면 벌써 끊겼더라고. 참 이상하지? -그래서 저한테 전화하신 거로군요. 그게 제일 빨랐을 것이다. -응? 무슨 말이야? -아니에요. 그런데 사제님. 월영이 말을 이었다. -아까 웃으시니까 참 보기 좋던데. -그래요, 웃는 게 좋아요. 동풍이 말을 거들었다. -아, 그거? 잠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심현이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잘 안 되어서. -안 돼요? -응. 원래 내가 항상 이 얼굴이잖아. 처음에는 참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말수도 적고 표정이 부족해서 이 사람은 이 곳이 싫은 걸까 하고도 생각했다. 말수가 적은 건 단지 말을 하기 힘들 뿐이어서이고, 표정이 원래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심현을 만나고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심현이 월영에게 물었다. -음, 그런데 내가 아까 많이 웃었나봐? -네, 활짝 웃으셨어요. -그게 신기했구나. -네. -어려서부터 그랬어. 이야기를 듣는지 마는지 잘 안 열리는 창문을 열심히 열고 있던 동풍이 심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카페 안에서 과거 이야기는 서로 묻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제라고 말만 들었지 어떤 사제인지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심현은 머릿속에서 말을 고르는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나는 아주 어려서 일을 시작했거든. 그런데 내가 사제니까, 어린애같이 굴면 이상할 거 아냐.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그래서 잘 못 웃으시는 거예요? 월영은 성실히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심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아니. 그래서 열심히 웃었지.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설명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심현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음......그게......내가 웃어야 안심이 되지 않겠어. 그 말을 끝으로 심현은 혼자 생각에 잠겼고, 월영은 혼자 열심히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혹시 신자들 앞에서 여유있게 보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에 생각이 미쳤을 때, 심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원래 사제들이 다 그래. 창가에 앉은 동풍은 창문을 열고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어느새 심현도 가방에서 뭔가 꺼내서 읽기 시작해서 월영은 혼자 생각했다. 방금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갔다. 그리고 역시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카페에 애초에 한 눈에 보고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는 했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버스에서 내려 카페로 돌아간 다음, 월영이 나머지 멤버들에게 사제님이 그렇게 말도 많이 하고 웃기도 하고 큰 동작도 취하는 걸 처음 봤다고 이야기해 주자, 같이 일을 나가 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한 번도 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예 월영이 하는 말을 믿지 않으려고 했다. 그 광경을 본 심현은 원래 사제들은 그렇다는 말을 되풀이했고, 월광이 혹시 사제님만 그런 거 아니냐고 묻자 한참을 고민하더니 생각 좀 해 봐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나머지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사제를 하게 된 걸까를 각자 생각해 보았으나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후, 코드네임 야누스가 얼굴을 두 개 가진 신의 이름이자 이중성을 뜻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월광에게서 들은 월영은 무릎을 딱 쳤다. 정말 저 분에게 어울리는 이름 아닌가 하고.
-------------------- 제가 설정을 해 놓고도 사제씨의 이중성에 대해 한 번도 설명을 하지 않은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설명 좀 해 보려고 썼습니다. 그래요 저는 설정의 당위성을 위해 글도 급조하는 여자예요;
리뉴얼을 좀 했습니다. 앞에 쓴 글은 비공개로 돌려놓을게요 리플 달아준 윈디 언니, 론, 미니, 은이 미안해요.
팔성현 현립도서관은 지상 1층, 지하 1층으로 된 작은 건물로 지상에 000번, 700번에서 900번까지 20000여권의 책과 3000권 정도 되는 정기간행물을, 지하에 그 나머지 15000여권의 책과 사서 사무실-을 빙자한 창고를 둔 조그마한 도서관이었다. 40000여권에 가까운 책을 구비한 도서관이 작은 도서관이라고 하면 말이 안 된다는 주장은, 이 도서관이 그냥 도서관이 아닌 현립도서관이라는 점을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지도상에서야 큰 현이었지만 산이 많고 농지가 많았으며 결정적으로 인구수도 적었고, 취학연령이 된 인구수는 다른 현에 비해 더더욱 적었으므로 그 작은 도서관은 그 현에 단 하나뿐인 도서관이었다. 그러므로 그 도서관에 근무하는 정 9품 사서관인 이유원 여사(女士) 또한 그 현의 유일한 사서였다. 품계가 정 9품밖에 안 되기는 하나 나라의 녹을 먹는 어엿한 관리요, 사서관이기는 해도 과거시험에 합격을 하였으니 학당에 있는 훈장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인재일 이유원 여사는, 전혀 마을 주민들에게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현의 중심지에서 떨어진 그 작은 도서관에 상주하여 주민들도 그의 얼굴을 본 이가 드물기 때문이 그 첫째 이유요 그를 한 번이라도 보면 도무지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는 커녕 예의상으로라도 국가의 동량이라고는 못 부를 그의 행태가 그 둘째 이유이다. 도서관에서 4개월 정도 일을 한 팔성현 양수현에 거주하는 강수련 양(19세)은 그를 떠올리면 처음 구한 직장에서 맞은 어색하고 황당한 기분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곤 한다.
-저, 사서님. 그날 처음으로 사서보조로 도서관에서 일하게 된 강수련 양이 울상을 지으며 도서관 구석 책꽂이 앞에 웅크리고 앉아 혼자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쉬다 책꽂이를 봤다 하는 사서에게 다가갔다. -예. 이유원 사서는 눈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저 퇴근해야 하는데요. 처음 자신을 보자마자 이따 점심시간에 여기 책꽂이 정리 한 번 해 주시고, 마치기 전에 1층이랑 지하 책꽂이 정리 해 주시고 가면 됩니다. 대출 권수는 무조건 한 번에 세 권 이상은 안 되고요, 라는 말을 남기고 표표히 1층으로 사라져버린 사서를 겨우 만났더니 사서는 책꽂이에 눈을 박고 책과 눈싸움이라도 하듯 책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겨우 용기를 내서 꺼낸 말에 사서는 짧은 대답을 던졌다. -하세요. -사서님이 안 가시면 문을 못 잠급니다. 기가 막힌 강수련 양이 항의를 해 보려고 했으나 도무지 책등에다 소리 지르는 것처럼, 말이 통하지 않았다. 사서는 여전히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만 내밀며 말했다. -열쇠 저 주세요. 열쇠를 내밀자 사서는 열쇠를 쥐고 책과의 대화를 다시 시도했다. 무슨 접신이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도서관 정리와 대출 반납을 돕는 것이 사서보조라고 알고 일을 하게 된 강수련 양은 첫날 퇴근을 하면서도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마차를 기다리다 만난 마을 사람들이 그의 황당함을 더해주었다. -아, 아가씨도 도서관에서 일하는가? -하이고, 그럼 그 사서님이랑 일하는 게야? -사서님이 사람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좀……그 뭐냐, 좀 별나지? -말은 바로 해라. 좀 별난 거냐? 많이 별난 거지. -자넨 도서관 가 본 적도 없잖은가? -안 가면 몰라? 동네에 소문이 짜아한데? 강수련 양은 직장을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후로도 그는 근무시간에 사서와 제대로 대화해 보지도 못 하고, 일도 많이 배우지 못 하고, 게다가 밥까지 혼자 먹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사서는 근무시간 동안에는 1층 서가를 왔다갔다 하며 책을 정리하고 대출을 하는 등, 입은 한 마디도 안 뗄지언정 월급만큼 일은 했지만 근무시간이 끝나면 책꽂이와 책과 대화를 시도하며 시간을 보냈고 강수련 양과는 말 섞는 날이 드물었다. 사람 좋아하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그에게는 크나큰 비극이었다. 물론 도서관 이용자들은 즐거웠다. 도서관에 이유원 사서가 발령받아 온 지난 1년 동안 그렇게 사교성이 좋은 사서를 본 적이 없는 탓이다. 강수련 양이 사서보조를 그만두던 날, 도서관 이용객들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고 한다. 즉 이유원 사서는 그런 사람이었다. 직업인으로서는 실격이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설명이 필요했던 것 같지만 위의 기록이 다가 아니라는 점이 기가 막힐 뿐이다.
직장을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은 이유원 사서도 자주 했다. 책을 볼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월급은 원하는 만큼 책을 사 보기엔 적었다. 그나마 가장 책과 가깝고 책을 빌려보기 좋다는 점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도서관 지하에 있는 사무실을 사택 삼아 먹고 자고 뒹굴며 책을 보고, 휴관일엔 창문 앞에 누워 빛을 받으며 책을 보는 것이 이유원이 업무 시간이 아닐 때 하는 유일한 일이었다. 잠드는 것이 싫어서 억지로 책을 보다 쓰러져 잠들었고, 음식은 잡화점에서 손닿는 대로 사서 대충 먹었으며 요리는 환경상 못 하기도 하지만 사실상 귀찮아서 안 한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청소는 책을 보다 책표지에 먼지가 묻으면 가끔 했고, 관복 이외의 옷을 입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책을 빌려주거나 연체된 책을 받을 때 빼고 유원이 말을 하는 것을 듣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도서관을 그나마 자주 이용하는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우리 마을 사서님은 혹시 아주 권세 높은 집안 따님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돈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인물도 안 따라주고 성격이 저래서 시집가기 글렀으니 집안에서 음직으로 아무 자리나 던져준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고, 그 설은 매우 신빙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도서관 앞에서 음울한 얼굴로 책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모습은 남에게 신뢰감을 주기 어려웠다. 하지만, 한량은 그나마 유흥업에 돈이라도 쓰니 하다못해 지하경제라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고나 하지-라는 소리는, 유원이 책을 찾거나 책장 정리를 하는 모습 앞에서는 쑥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어쨌거나 맡은 일은 해냈다. 일을 빨리 해 놓고 책을 보며 즐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속사정이야 주민들이 알 바 아니었지만. 아무튼 유원은 세도가의 자제도 아니었고 부모의 권세로 도서관에 틀어박히게 된 것도 아니었다. 유원은 그런 소문은 듣지 못했지만, 진작부터 내가 부모 권세로 직업을 구했으면 차라리 1년 내내 책만 읽고 책 감상 써서 돈 버는 직업을 찾겠다는 소리를 한 적이 있었으니 확실한 말이리라. 1년 4개월 전. 그러니까 이유원이 과거를 보기 1개월 전에 벌어진 일이다. 유원의 아버지 정 6품 행정관 이성택 공이 어느 날 저녁, 딸을 사랑으로 불렀다. 전에 없던 일이라 궁금하게 여기면서도 유원은 읽던 책 사이에 책갈피를 끼워두고 사랑으로 건너갔다. 이성택 공은 정좌를 하고 딸을 맞았다. -유원아. -네. 인사를 올리자마자 공은 평온한 얼굴로 첫마디를 던졌다. -너 다음 1일 되거든 나가라. -네? 기가 막힌 유원이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공의 얼굴은 물처럼 담담한 것이 평정심의 극치였다. -나가라고, 물론 돈 같은 거 부쳐줄 거라고 기대하는 거 아니지? -어, 어, 아버지. 갑자기 왜 그러세요? 공은 온화하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과년한 딸애 먹이고 재우는 돈이 아까워서 그런다. 나가. 아버지의 충격적인 언사에 유원이 기껏 항의한답시고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저는 사회성도 없고 돈도 벌 줄 모릅니다! -안다. 나도 다 큰 딸내미 평생 먹여주고 입혀주며 끼고 사는 법 몰라. -아니 나가라고 하시려면 대책은 세우게 해 주시고 나가라 하셔야죠! 제가 장사를 할 줄 압니까, 재주가 있어 뭘 만들 줄 압니까, 그렇다고 과거를 봐서 벼슬살이 할 능력이 된답니까? 어디 가엾은 남자 하나 잡아다 저 떠넘길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성격 괴팍하다 소문나서 혼담도 안 들어오는 거 아시잖습니까. 하다못해 가게에서 물 따르는 일도 못 하는 애가 저잖습니까. 아버지, 갑자기 왜 이러세요? 유원이 근 9개월 만에 세 문장 이상 되는 긴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을 보고 이 공은 피식 웃었다. -뭐 방법은 하나지. 이성택 공은 서안에 올려놓은 종이를 한 장 딸에게 내밀었다. -한 달 뒤에 과거 본다더라. 쳐 봐라. 달리 방법이 없잖느냐. 이유원이 결코 적지 않은 집안 서가의 책을 모두 읽어치운 것은-읽다 읽다 읽을 것이 없어 아버지가 종종 다 못 끝내고 집에까지 들고 오는 공문서를 읽어치우고 어린 동생이 읽는 그림책도 싹싹 읽어치우고 심지어 유원의 세 오라비가 고이고이 숨겨놓은 도색서적까지 모두 독파한 것은 계례도 올리기 전의 일이었다. 속 모르는 친척들은 신동이 났다고 좋아했으나 이 공과 유원의 어머니 되는 전씨 부인의 입장은 달랐다. 저건 신동이 아니고 간서치라오, 라고 말을 할 수도 없으니. 서당에 다닐 때는 워낙 읽어둔 것이 많아 딱히 공부를 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어 학당에 진학할 성적이 되느냐 마느냐로 고민할 일은 없었으나 학당에 진학하자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수업 시간 중에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교과서만 읽고 있었으며 쉬는 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가리지 않아서 가뜩이나 좁은 인간관계 폭은 더 좁아져 학교에서 부모님을 호출하는 지경에 이르자 이 책과 자기자신 밖에 모르는 골치아픈 딸은 아예 현실도피를 책으로 해 버릴 작정을 하고 책에 파고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대학에는 입학을 하였으나 그의 책에 대한 편집증을 어여삐 여긴 교수들의 연이은 간절한 초청을 차 버린 것도 이유원 자신이었다. 책 읽는 건 좋지만 연구는 자신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나이 스물 셋이 되도록 집에서 먹고 자며 책만 읽는 간서치 중의 간서치가 지금 이성택 공의 눈앞에 있는 하나뿐인 딸이었다. -아버지. 종이를 슬쩍 보고 유원이 아버지를 불렀다. -왜 그러냐. -진사과가 아니네요? 이 공은 건방만 늘어가는 딸을 노려보았다. -너 정 7품 이상 가는 관직은 못 할 거다. 지금 공부해서 되겠냐? 높은 자리일 수록 시험도 어려워지는 법. 유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건요? -거기 잘 봐라. 유원이 종이를 찬찬히 읽어보더니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삼과 아닙니까? -그래. -설마 아전과나 사범과는 아니죠? -할 수나 있냐? -아뇨. 유원은 고개를 저었다. -사서과면 네가 대학에서 공부한 것과도 관련이 있지 않느냐. -하지만 아버지, 취미가 직업이 되면 불행해진다던데요. -해 보지도 않고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이 공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유원은 조금 불안해졌는지 고개를 숙이고 종이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자신 없다는 소리는 듣지도 않을 테니 꺼내지도 말거라. -……어떻게 아셨습니까. 유원의 대답이 이 공은 피식 웃었다. 널 스물 세 해 동안 키우고 돌본 사람이 누군데 그걸 모를까. -일단 가서 쳐 봐라. 시험 붙으면 집에서 안 쫓아낼 테니. 일단 쳐 보라는 말로 시작된 이성택 공의 딸을 회유하기 위한 말은 계곡에 물 흐르듯 쉬지 않고 이어졌다. 물론 이 공은, 너를 쫓아내려면 집에 있는 책을 몽땅 들어내야 해서 귀찮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튼 유원은 아버지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쨌는지 시험을 쳐 보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전과, 사서과, 사범과, 합쳐서 삼과라고 부르는 시험은 한 달 뒤였다.
오래된 전통은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꼭 쓸데없는 전통은 끝까지 남는 법이다. 과거도 마찬가지였다. 옛날처럼 십 몇 년을 공부해야 붙네 마네 하는 일은 이제는 없어졌지만 일단 사서오경에 대한 기본지식과 언어구사력, 역사상식을 묻고, 각 과목별로 다양한 것들의 물어보는 것이 과거의 기본이다. 진사과나 생원과쯤 되면 사람을 각 과목별 수험서를 한 권씩 들고 와서 사람이 자는 데 위에 덮어놓으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 날 정도니 공부할 양으로 사람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 과거인 것이다. 삼과도 명색이 과거라 수험서로 사람을 죽일 수는 없어도 사람을 노이로제에 걸리게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시험까지 남은 기간은 한 달. 이 공은 시시때때로 요즘 방값이 비싸다느니, 혼자 살면 생활비는 얼마가 든다느니, 큰 방 얻을 돈 없을 테니 네 책은 두고 가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딸에게 조근조근 들려주었고, 이유원은 앞의 두 마디에는 불퉁하게 알았어요, 공부하고 있습니다를 반복하다가도 마지막 한 마디에는 아버지 제발! 최선을 다 할 테니 책에는 손대지 마세요! 라고 비명을 질러댔다. 다섯 살 아래인 남동생마저 누나 책은 내가 잘 보겠다며 이기죽대면 유원은 너 그 책 안 보고 다 팔아 술 마실 거잖아! 라며 화를 냈다. 그리고 말도 안 되게도, 한 달 동안 공부를 한 덕인지, 이유원은 끝에서 두 번째로 사서과에 합격했다. 무려 면접까지 합격한 것이다. 유원의 합격통지를 들은 이 공의 첫 마디는 "도대체 꼴찌가 누군지 궁금하다. 내 딸 보다 못 친 녀석이 있다니 뉘 댁 자제인지 참." 이었으나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다. 여튼 유원은 팔성현 현립도서관의 사서로 발령이 났고, 그제야 그러고 보니 시험 붙으면 전국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거였는데 그 생각을 못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못 읽은 책, 즉 새로 산 책만 몇 보따리 챙겨 집을 떠날 차비를 마친 날, 유원의 어머니는 유원의 방에 있는 책 위에 큰 천을 덮어 먼지가 안 들어가게 싸 두었다. 사실은 그 책꽂이가 어지간히 싫었던 모양이라며 유원은 웃었으나 어머니는 웃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말은 사실인 듯 했다. 그렇게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여동생이 집을 떠나는 건 섭섭했는지 장가를 들어 분가한 유원의 큰오빠가 축하를 하러 왔고, 한 집에 사는 유원의 둘째 오빠와 그 아내가 축하차 떡을 했다. 대학에서 접장을 맡은 셋째 오빠도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와 제법 분위기가 오붓해지자 유원의 동생이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땐 이러지 않더니 어찌 이리 차별이 심하냐며 잠시 투덜댔으나 그건 사소한 문제였다. 가족들이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뜬 후, 유원은 이 공의 방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 이 공은 정좌를 하고 서안 앞에 앉아 있다 유원을 보고 읽던 책을 덮었다. "유원아." "네." "제발 책 본다고 일 안 하는 일은 없길 바란다."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밥은 제 때 먹고." 이 공의 목소리에는 시험 공부 안 한다고 딸을 볶을 때 만큼이나 절실함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유원은 아버지야 절실하건 말건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쫓아내려가 하셨던 거 다 압니다, 아버지.” “들켰구나.” 이 공은 맥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뻔한 이야기죠. 뭐 걸려든 저도 접니다만 저 내쫓으려고 마음 먹으셨잖습니까. 그 시점에서 저런 자잘한 걱정은 접으셨어야죠." "그리 속이 좁아서야……아비야 너 혼자 먹고 살 길 걱정되니까 극약처방을 한 거 아니냐." 이 공이 머쓱하게 웃자 유원이 아버지를 쳐다보고 피식 웃었다. "그걸 속 좁게 생각하면 내쫓는 거죠. 마음 비우십시오. 그래야 걱정을 덜 하십니다." "걱정하지 말란 소리를 꼭 그런 식으로 해야겠느냐?“ “걱정하지 마시라는 게 아니고 마음을 비우시란 말입니다.” “내 딸이지만 정말 네 성격도 문제다." "저도 그래서 앞으로 어찌 살지 걱정입니다." 이 공이 기가 막혀 던진 말에 유원은 태연히 대답을 하고 여행길에 소용될 물건들을 챙겨 짐을 꾸리기 위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유원이 다음 날 임지로 부임하기 전 임금을 만나-라기보다 모든 관료들과 신진관료들이 모이는 어전회의에 참석했을 때 이 공은 딸을 보았지만 반가운 기색을 비치지 않고,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딸의 옆을 지나갔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이유원 사서가 도서관에 발령을 받은 지 어느덧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이유원은 여전히 쉬는 시간엔 책을 읽고 자기 전엔 책을 읽고 식사를 할 때도 책을 읽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동풍 군 전학 생각 있습니까? 여름방학 끝무렵, 가게에 불쑥 찾아온 과장이 동풍에게 물었다. -음......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데요? -거 괜히 물었군요. 그럼 시열 양이랑 같은 학교로 전학을 가는 건 어때요? -별 상관 없어요. 동풍이는 언제나처럼 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학수속을 밟아볼까요, 하던 과장의 말이 순간 튀어나온 목소리에 묻혔다. -우리 학교요? 왜요? 어쩐 일로 안 자고 한 구석에 앉아서 깨작깨작 영어 숙제라나, 문제집을 끌어안고 씨름하고 있던 시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집중하고 공부하라니까. -오빠는, 지금 집중이 문제가 아니잖아. 옆에 앉아서 설탕통에 설탕을 채워넣고 있던 휘안이 시열에게 타박을 주었으나 시열의 관심사는 이미 동풍과 과장의 대화로 옮겨간 후였다. -과장님, 왜 동풍이 오빠가 우리 학교에 전학와요? -아 뭐, 별 거 아닙니다. 두 사람 다 일 때문에 가끔 학교를 빠질 때가 있는데, 두 학교에 다 사정을 설명하기 귀찮다고 그래서들 말이죠. 관리직은 귀찮아요, 특히 공무원은 더. -그럼 행정상의 편의 때문에 저의 학교생활을 희생하라는 말씀이세요? 일을 할 때가 아니면, 특히 학교생활과 관련된 일이면 매사 무관심일변도로 나가던 시열의 반응은 의외로 강경했다. -동풍이 오빠 거주지 주소 여기로 되어있잖아요! 친척이랑 한 학교면 귀찮은 일이 엄청 생길텐데 나보고 어쩌라고요, 싫어요. -어......그럼 귀찮게 안 하고 다닐게. -그게 오빠 맘대로 될 거 같아? -시열 양, 동풍 군이 시열 양을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거예요. -아, 정말! 과장님은 졸업하신지 오래되어서 기억 못 하시는 거죠? 진짜 귀찮단 말이에요! 수상하다, 대놓고, 노골적으로 수상하다! 휘안은 이 곳에서 학교를 다닌 경험은 없지만, 과거 사관학교에 다니던 자신을 떠올리며 시열의 행동을 분석해보았다. 1학년이랬으니까 군기가 안 잡혀서 기합이라도 받는 걸까? 복장불량이라고 뒤뜰에 불려가서 구르나? 왼손에 들랬던 가방 오른손에 들어서 혼났나? 칼을 제대로 손질하지 않았나? -휘안이 오빠. 뭐 생각하는지 대충 알겠는데, 그런 거 절대 아니거든? 무슨 표정을 어떻게 지었는지 시열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알았어요. 오빠 오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요. 대신 나 귀찮게 하면 알아서들 해요. 귀찮다는 표정으로 던지듯 말을 하고, 시열은 다시 영어문제집으로 눈을 돌렸다. -특히 동풍이 오빠. 조심하는 게 좋아. 오빠한테도 귀찮은 일이 될 수 있으니까. -어, 어.
새로 입은 교복이 어색해다는 생각을 하며 동풍은 교무실 문을 열었다. 교무실 책상 위에 이름표가 붙어 있어서 새 담임을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30대 후반, 40대 초반쯤으로 보이고 조금 구겨진 트레이닝 복을 입은 남자교사는 미간에 주름이 잡힌 것 빼고는 그렇게 인상이 나빠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마동풍.......교과서는 행정실에서 받아 왔고? -예. -그으래. 그럼 이따 쉬는 시간에 교실로 가라. 자리 하나 만들어놨으니까. -예. -아따, 그 놈 참 얌전하네. 그런데 남고에서 공학으로 전학와서 적응하기 힘들겠어. 내신 관리하기 힘들텐데 왜 이리로 왔어? -이 학교에 사촌이 있어서요. -친척 누구? -아실지 모르겠는데 1학년 한시열이라고...... -어, 너 한시열이네 친척이야? 서류를 읽던 교사의 눈이 갑자기 멈추었다. -어.......네. 아세요? -작년에 수업 들어갔지. 내 교직생활 14년 동안 체육 시간에 실기연습 하는 동안 선생 눈 피해서 운동장 구석에서 자는 놈은 또 처음 봤다는 거 아니냐. 너도 많이 자냐? -.......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옆자리에 앉아 국어교과서를 보고 있던 여자 교사가 고개를 홱 돌렸다. -한시열요? 그 50분 수업시간 중 30분은 자고 20분은 깨어있는 한시열? 그 소리를 필두로, 교무실에 있던 교사들 중 서너명이 갑자기 정말 할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 시간에는 20분은 깨어있어요? 제 시간에는 안 일어난 적도 있어요. 그러고보니 시열이 작년에 권 선생님 반이었죠? -아아. 시열이? 종례하러 들어갔는데 안 일어나서 꺠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다고요. -누구요? 시열이? 걔 사촌오빠라고? 시열아, 유명인사였구나. 동풍은 무의식중에 허공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 3주 전이었나, 미니네서 자고 오던 날, 미니와 이야기하던 중에 나온 소재입니다. 뒷이야기는 미니가 써도 좋다고 하면 쓰겠습니다. 왜냐면 이 이야기의 절반은 미니 아이디어였어요.
-미겔은 세상 바람둥이들의 귀감이라니까. 크리스틴이 비아냥조로 중얼거린 한 마디를 미겔은 애써 못 들은 척 넘겼으나 여자가 셋, 남자가 하나인 장소에서 남자 하나 바보 만드는 건 마음만 먹으면 일도 아니라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어디 갈 리 없다. 애니가 눈을 반짝였다. -한 번에 양다리를 걸치지 않으며 모든 상대에겐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하며 정리는 깔끔하게 하며 매달리는 법이 없으니 세상 바람둥이들이 보고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니겠냐, 크리스 말은 그거지? -뭐, 내가 말하려는 거랑은 좀 다르지만 저 사람이 뒷정리가 깔끔하다는 건 나도 인정할 만 해. -그런데 왜? 별 스캔도 없잖아. -없으면 뭐 해. 스캔들보다 더 나쁜 게 미겔이 하고 다니는 짓이라고. 어제 애니는 못 봤지? -뭔데? 서류를 철하는 척 펀치를 들고 열중하고 있던 아요툰데가 아예 펀치와 서류철을 내려놓고 크리스틴 옆으로 다가왔다. -아요툰데도 못 봤어? 음,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크리스틴이 미겔을 흘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속을 긁으려고 작정하고 말을 꺼낸 것이니, 미겔이 눈썹을 찌푸리고 저걸 어떻게 말려야 잘 말렸다는 소리를 들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면 크리스틴의 의도는 99% 성공한 것이다. 과연 미겔은 미간을 찌푸린 채 크리스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제 점심시간에 길 가는데 어떤 아가씨가 미겔을 보더니 갑자기 한길에서 막 울면서 뛰어가더라고.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미겔이 난감한 얼굴로 말을 흐리잖아? 이런 경우는 십중팔구 그거지. 치정극. 어쨌든 미겔이 그 여자한테 뛰어가서 뭐라고 뭐라고 한참 이야기를 하더라? 그런데 그 여자가 미겔을 노려보더니 따귀를 때리는 거야. 너무 정석적이라서 할 말이 없더라니까. 그리고 크리스틴이 씩 웃으며 미겔을 돌아보았다. -당신 또 차였지? 미겔은 아예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걸 그렇게 폭로하다니, 너무하지 않나? 배려심은 사회인에게 중요한 덕목이야. -시끄러워. 학교에서나 선생인 척 하라니까. 크리스틴이 으르렁거리자 미겔은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그 꼴을 보며 깔깔대며 웃고 있던 애니가 말했다. -미겔이 연애 성공하는 거 본 적 있는 사람? -한 번도 없지. 늘 차이지 않았나? 아요툰데가 대답했고 두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바람이 아니라니까. 미겔이 끼어들었으나 그의 발언은 여자들에게는 낙엽 떨어지는 소리만큼의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듯 했다. 세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애니가 말했다. -사실 미겔이 늘 잘 하긴 하지 않았어? 그런데 차이잖아, 항상. -그야 당연하지. 아요툰데가 끄덕였다. -남자는 안정이라니까. 미하일한텐 그게 없다고. 안정감도 없고, 그렇다고 긴장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여자가 오래 사귀고 싶겠어? 미겔이 변명했다. -매번 상대에게 충실한 법이라고 말하면 안 되나? 그래도 난 매번 진심이었는데. -그런데 늘 차여? 크리스틴이 아예 깔깔깔 웃기 시작했고 미겔의 미간은 더더욱 구겨졌다. 저러다 화라도 내지 싶었는지 아요툰데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그만. 크리스틴, 너 오늘 기분 안 좋아? -몰라. 크리스틴은 표정과 동작-등을 돌리고 앉는 것으로 그녀 자신이 한 대답을 부정했다. 아요툰데가 웃었다. -그래도 미겔을 놀려서 기분풀이하는 건 나쁜 짓이잖아. 그만하고, 그리고 미겔? 미겔이 돌아보자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크리스틴이 뭔 생각인지는 몰라도, 난 너한테 꼭 한 마디 해야겠어. 미겔, 그러지 마. -뭘 그러지 말라는 건지 잘 모르겠어. -모르면 스스로 찾아봐.
--------------------- 맨 위에 쓴 문장이 퍼뜩 떠올라서 대충 모니터에다가 낙서를 해 봤고요, 대략 이런 느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크리스틴은 기분 나쁘면 미겔을 물고 늘어져 괴롭히는 버릇이 있고요 미겔은 폭발하면 애를 들들들 볶아대고 애니는 크리스틴이랑 죽이 맞아서 나쁜 장난도 자주 치고 그럴 떄 마다 고생하는 건 왕언니 몫. 사실 미겔이 성실하지 못한 연애질하고 돌아다니는 걸 어서 써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게 시작인데, 앞으로는 크리스틴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될 일은 없습니다. (끝을 낸다면 에필로그만은 미겔의 시점에서 한 번 진행하고 싶지만.)이 네 사람이 작은 능력으로 악몽을 대신 꿔 준다던가 (미겔의 능력에 대해선 수정을 좀 할 참입니다.) 없어진 물건을 찾아준다던가 하는 소소한 일상을 그린 이야기가 될 예정입니다만.
내 이야기는 작년 9월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막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이었고 영문학 강의를 하나 신청해 두었다. 사실 강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요한 건 강의 이름이 아니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미리 읽어 본 강의자료에 적힌 이름은 MIguel J. M. Valelin이라는, 어째 스페인 사람 냄새가 나는 이름이었다. 스페인계 내지는 히스패닉이겠거니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스페인 사람은 어릴 때 보고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영국에 왔을 때, 옆집에 스페인 사람이 살았는데 처음 본 스페인 아이들은 키도 작은 편이고 얼굴도 머리색도 검어 어렸던 나는 저 아이들은 ‘영국 사람’이 아닌가보다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영어로 자기 의견 표시하는 것도 힘들던 나보다 훨씬 유창한 영어를 사용했고 그렇게 나의 편견은 하나씩 하나씩 박살이 났다. 다 똑같아 보이던 그들의 얼굴을 구분하고, 악센트에서 그들의 출신을 구분하게 되며 나는 어느새 나이를 먹고 영국인이 되어갔다. 나는 그들을 관찰하며 나의 정체성을 쌓아온 셈이다. 나이들어 처음 만나는 만나는 스페인 사람은 어떤 느낌일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학기가 시작되었고, 영문학 강의 첫 시간이었다. 강의실에 도착하니 아직 수업은 시작하지 않았지만 나와 같은 신입생인 듯한 어설픈 아이들이 의자에 앉아 소곤거리고 있었다. 한 명은 어찌나 어설프던지, 세상에 단정하게 검은 수트를 입고는 교수용 의자에 앉아서 창 밖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 녀석을 보고 피식 웃었는데, 갑자기 그 녀석이 고개를 돌리고 나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씨익이라고 해 봐야 입매만 살짝 위로 들리는 정도였지만. 아무튼 그 녀석 참, 부끄러운 줄 알긴 아나보다 하고 피식 웃었는데 그 녀석이 벌떡 일어나더니 교단으로 걸어가는 거다. “그만 출입문을 닫아 주십시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조교였나? 어째 신입생 치곤 나이가 들어 보이더라니, 하고 있는데 그 녀석은 또박또박, 사투리 하나 섞이지 않은 정확한 발음으로 이어 말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과 한 학기 동안 수업을 하게 된 미겔 하비에르 마르케스 발레린입니다.” 교수의자에 앉아 있다고 그가 교수일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영국사람은 모두 금발벽안이라 믿은 것도 편견이듯이. 하지만 이름이 스페인식인데 스페인 사람다운 외모를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일까? 척 봐도 저 얼굴이 슬라브계면 슬라브계지 어디가 스페인계란 말인가. 금발에 팔다리는 길지, 눈은 파랗지, 상식과 편견은 잘못 썰어놓은 당근 같은 것이다. 어디가 이 쪽이고 어디가 저 쪽인지 모르게 딱 붙어 있어서 나누기 애매한. 교실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난감한 듯 눈썹을 살짝 위로 치켜올렸다. “미겔 마르케스라고 부르면 됩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스페인계이고, 세상엔 상식으로 밀어붙이기 애매한 일도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고 수업을 시작합시다. 물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영문학에 대한 상식이 이번 수업에선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만…….” 그러고보니 러시아 사람 성 같기도 하네, 도대체 뭐 저렇게 이름이랑 안 어울리는 얼굴이 다 있담. 뒷자리에서 그런 대화가 들렸다. 스페인식 이름을 가진 금발벽안의 남자. 나는 이 젊은 강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기 중간의 일이다. 과제를 받고, 상담을 하기 위해 미겔 마르케스를 만나 상담을 했다. “<영문학에 대한 편견과 진실>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쓰겠다고……. 어디 초안을 좀 보죠.” 그는 내 초안을 읽고 평을 하기 시작했다. 반 학기 동안 느낀 것이지만 이 사람은 스페인계 주제에 표정도 매우 부족했다. “제목에 비해 접근법이 지나치게 제한적이고 참고한 자료도 마찬가지 아닌가. 특정 분야의 책을 인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 분야는 이럴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야 제목이 울겠죠.” 많이 분했다. 나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했는데 하필 가장 싫어하는 강사가 나의 과제에 대해 길게 지적을 늘어놓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아무리 대화주의적인 접근법이라고 하나 다른 분석방식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요. 한 쪽을 비판할 땐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하는 게 좋아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지적에 어쩌다가 내가 폭발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꼭 선생님 같은데요.” “나?” “네. 성함만 듣고 스페인계라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스페인 계가 맞아요.” “하지만 얼굴은 슬라브계에 가까워 보이는걸요. 정말 스페인 사람 맞으신가요?” 나와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그는 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머니를 닮았지요.” “그래서, 항상 뭐든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보라는 건가요? 어떤 식으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까? 당신이 이상한 경우잖아요, 이건? 모든 사물을 선입견을 가지고 보지 말라, 말은 좋죠. 사실은 당신의 콤플렉스 아닌가요?” “크리스틴 맥클레인 양.” 이것도 인종차별이라면 차별인데, 너무했다 싶은 찰나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얼굴만 보고 누가 당신의 이름이 크리스틴 맥클레인이라고 생각할까요. 완벽한 동양계인데.”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 때 그도 분명 기분이 나빴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 때 다른 생각을 했다. 아, 이래서 나는 이 사람을 싫어하는구나, 하고. 문을 닫고 나온 다음부터는 잘 모르겠다. 어떻게 어떻게 한 학기를 버틴 것 같은데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와 다시는 만날 일이 없었다. ……였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지가 못하다. 1학년 과정을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는데 일이 괜찮으면 주급이 짜고 액수가 괜찮으면 시간이 맞지 않고, 다 괜찮으면 벌써 누가 일자리를 꿰찬 다음이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벽보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회사 이름도 없고 연락처로 쓸 전화번호 하나 없는 수상한 벽보 따위, 봤어도 못 본 척 해야 옳았지만, 주급이 다른 곳의 두 배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결연하게, 벽보에 적힌 사무실로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벽보 보고 왔는데요.” “어머, 벽보?” 사무실 안은 좀 어두웠다. 책상에 두 개, 구석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고 그 근처엔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 조금 수상하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하지만 도로 나가기엔 이미 늦었다. 문 바로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은 키가 큰 흑인 여자였고 그녀는 벽보 이야기를 듣자 반색하며 벌떡 일어나 내 손을 덥석 잡은 것이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앤서니, 드디어 한 명 왔어!” “앤서니가 아니고 애니라고 부르랬잖아!” 건너편 책상에서 벌떡 일어선 건 긴 금발이 인상적인 미인이었는데, 말을 하자 마자 더 인상적인 점이 추가되었다. 굵은데다 톤도 상당히 낮은, 아주 멋진 남성의 목소리였다. 여기 도대체 뭐 하는 곳이람. 드랙퀸? “아, 그랬지. 아가씨, 벽보를 읽고 온 게 확실해? 누가 소개시켜 준 게 아니고?” 아무튼 키 큰 흑인 여자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무언가 판단하듯- 물었다. “요 앞에 붙어있던 벽보 아닌가요?” “드디어 찾았다, 미하엘, 미하엘!” 흑인 여자가 고개를 돌리고 누군가를 불렀다. 커튼 뒤에서 뭐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커튼 뒤에 빈 공간이 더 있었나, 특이한 사람이 하나 더 있나 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미하엘이 아니고 미겔.” 그 특이한 사람 하나 더, 는 나를 보자 마자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벽보는 아무한테나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진부한 동화 같은 이야기는 이쯤 하고, 아무튼 나에게는 직장이 생겼다. 월급에 비해서는 일은 쉽다. 거창한 일도 아니다. 분위기는 한가하고, 네 명 모두가 여기 모여서 하는 일이라곤 가끔 경과를 보고하거나 회의를 하기 위해서 정도. 그저 가끔, 작은 도움을 주면 된다. 나를 가르친 아요툰데-그 흑인여자다. 나이지리아에서 왔다던가.-가 일을 받아오고, 우리에게 할 일을 가르쳐주면 미겔이나 애니, 내가 일을 한다. 그러나 함께 일을 하는 지금이라고 미겔 마르케스가 좋은 건 절대로 아니다. 이젠 그의 존재자체가 기분나쁜 건 아니다. 그는 슬라브계처럼 생긴 스페인인, 나는 동양인처럼 생긴 영국인. 하지만 아직도 그는 싫다. 오히려 전보다 더 기분나쁜 점이 추가되었다. 학교에서는 몰랐던 것을 여기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 인간이 신사라고 주장하는 여자애들을 이리 끌고 와서 진실을 보여주고 싶지만 어쩌랴, 봐도 믿지 않을 것을.
참고로 크리스틴은 끝까지 미겔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합니다. 미겔도 직장 안에 있는 여자들에겐 손 안 뻗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