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져가세요, 홍보해 주세요. 부디, Please, お願い!
카페 6.9 카운터 앞에 B4 사이즈의 종이가 수북히 쌓였다. 그리고 그 앞에 이상한 팻말이 붙어 있었다. 동글동글한 글자체로 적힌 작은 팻말이었다.
"뭐야 이거. 포스터? .......금홍아 금홍아? 밴드 이름이 왜 이러냐?"
"아 어때서, 곱잖아요! 운율도 살아있구만."
수북히 쌓인 종이 중 한 장을 집어든 효석이 종이에 적힌 문구를 읽자 이상이 버럭 화를 냈다. 효석은 한숨을 푹 쉬고, 포스터를 끌어안고 쉿쉿거리는 이상은 무시한 다음, 바로 유정에게 다가갔다.
"혹시 이 아가씨가 그 아가씨?"
"......부탁이니 아무 말씀 마시고 포스터 가져가세요. 안 가져가면 해경 형 낙심한단 말이에요."
유정은 먼 산을 쳐다보았다. 13장이 줄어서 남은 포스터는 487장.

"해경아, 이거 어디서 구했어?"
"인쇄소 아저씨한테 부탁했어요. 500장만 더 뽑아달라고."
"어떻게 알고 부탁했냐......돈은 네가 내고?"
"우연히요. 뭐 어때요, 예쁘잖아. 태원 형도 가져가요. 회사에도 붙이고, 응?"
"아니 그건 좀......"
이상은 단골들에게 포스터를 강제로 안기기 시작했다. 지용이 서른 장을 들고 갔고, 효석은 내가 이걸 왜 붙여야 되냐며 투덜거리며 들고 갔으면서 연구실 입구에 곱게 붙여주었는데 이상에게는 붙였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 구본좌, 아니 본웅은 즐거워하며-그러나 포스터를 이상이 가져온 것 자체는 대놓고 짜증을 내며 포스터를 들고 가 미술과 연습실을 도배해놓고 후배들에게 공연 관람을 종용했다. 구본좌는 법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울고 불며 후배들은 표를 샀다.
그리고 공연 사흘 전.
"네 카페 6.9입니다. 네? 네.......아, 네. .......네, 죄송합니다. 철거할게요. 예, 다음엔 그러지 않게 주의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유정이 심각한 목소리로 통화를 마치고, 커피를 손으로 쥐어짜던 이상을 노려보았다.
"해경이 형."
"왜, 왜 그래?"
유정의 등 뒤에서 묘한 오라와 기백이 피어오르는 것을 이상은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지옥 바닥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포스터 말인데."
"포스터? 그게 왜?"
"금홍 씨한테 이야기했어? 형이 그거 홍보하는 거 알고 있냐고. 말하고 들고 온 거 맞아?"
"......아."
이상이 무릎을 쳤다.
"형은 도대체가!"
이 뒤는 여백이 없어 적지 않노라......가 아니고, 유정이 수라로 변신하는 장면을 묘사할 수 없어 적지 않는다. 아무튼 포스터는 모두 수거했다. 이상이. 울면서. 끗.

그리고 덤.
"다 수거한 거죠?"
"응, 철거된 거랑 지용이가 가져간 거 빼고."
"그러고 보니 지용이가 서른 장 들고 갔죠, 걔 왜 그렇게 많이 들고 갔대?"
"지용이도 금홍 씨 좋아하나?"
"세상 남자가 다 해경이 형 같은 줄 알아요? 적당히 하지?"
".........그래, 미안타."
"아니 다행이네."
유정에게 사흘 정도 은근히 볶이느라 진이 다 빠진 이상은 반박 한 마디 못 해보고 풀 죽은 목소리로 금방 사과했다. 그러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왜 서른 장이지?

"지용아, 너 그 포스터 다 어쨌냐?"
"아 그거요?"
학교 앞 자취생의 모범이라 할 만한 모습으로 테이블에 비치된 브라운 슈거를 사탕처럼 먹고 있던 지용은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자취방이 우풍이 심해요. 그래서 창문 막는다고. 형 그거 종이가 두꺼워서 그런가, 문 막아놓으니까 바람도 안 들고 되게 따뜻해요!"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이상은 지용을 한참 응시하다, 얼른 뒤돌아서 주방으로 뛰어들어갔다. 한 손으로 눈가를 훔치며 뛰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진짜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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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디 언니 생일 리퀘입니다. 29일이지만 오늘 저녁엔 좀 할 일이 있어서 미리 써 올렸어요. 늦는 거 보단 낫겠다 싶어서. 아무튼 언니 올해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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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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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디 언니 리퀘, 꽃놀이 하는 T.A
1차 창작을 간만에 하려니 글이 안 나옵니다ㅠㅠ 요 근래 삶이 고달프신 우리 언니를 위해서.
그리고 밤에 꽃구경 가고 싶었는데 못 간 나를 위해서. 꽃은 밤에 보면 더 좋아요 흑흑.

아, 그리고 하루에 리퀘를 두 개 받은 이유. 양다리를 걸칠 땐 두 상대 모두에게 극진하게 해야 나중에 칼침을 안 맞는대요(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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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행복하세요?
이렇게 물으면 보통 대답은 네, 혹은 아니요, 혹은 그건 왜 묻소, 이렇게 세 가지로 나뉘게 되어 있다. 그런 답이 나오게 되어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심현은 언제나 그렇듯 별 표정없이 심각하고 진지하기만 한 얼굴을 살짝 찌푸리고 대답했다. 드문 일이었다.
-그거 사는 데 그렇게 중요한 거야?
뜻밖의 답에 허를 찔린 월영이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냥 회식 같은 것이다. 아니,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모여서 뭔가 먹는 걸 빼면 일반적인 회식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과 같은 부분은 거의 없다. 그저 두어 달에 한 번, 힘든 일을 하고 나면 나오는 돈에서 일정 금액을 떼서 모아두었다-돈 관리는 초로가 했다.-다들 모여 늘 먹는 밥 말고, 각자 즐기는 간식 같은 것을 먹는 자리. 몇 명씩 모여서 술을 한 두 잔 나눠 마시고 술을 못 마시는 멤버들, 미성년들이나 심현 같은 이들은 차를 마시는 평화로운 모임이 어쩌다 꽃이 곱게 잘 피었다는 이유만으로 가게 밖으로 이어진 것이다. 강변에는 벚나무가 하나 가득, 산에 가면 진달래가 피었다지만 가로수에 대신 철쭉이 활짝 핀 그런 좋은 밤이었다. 마침 달까지 살짝 붉은 빛을 띤 보름달이라 매우 고왔다. 풍류가 별 거냐며 호기롭게 잔을 돌리는 월광 덕에 심현도 잔을 잡았다. 못 드시는 줄 알았어요, 아니 그냥 습관상 안 마시는 거야. 사실 오늘 처음 마시는 거다. 와, 그럼 우리 사제님 첫 음주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건배! 잔잔한 웃음이 섞인 대화가 오고 갔다. 부드럽게 부풀어오른 맥주 거품이 달처럼 둥글었다. 입 속에서 구른 거품이 목으로 둥실둥실 넘어간다. 낯선 감촉에 눈을 크게 뜬 심현에게 초로가 웃으며 소주잔을 건넸다. 이거 예쁘지 않나요. 잔을 받아들어 살짝 마신 심현이 쓰고 맑고 달고 화끈하다고 표현하자 옆에 앉아있던 동풍이 미소지었다.
기분 좋게 적당히 마시고 살짝 취기가 올라 둥실둥실 몸이 땅에서 떠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휘적휘적 걸어가 찬물로 씻고 말간 몸과 마음으로 잠들 수 있는 그런 밤이었다. 말은 안 해도 다들 그런 기분이었으리라.

-사제님, 화 나셨어요?
그런 중에 술김에 흘린 질문에 돌아온 답이 너무도 뜻밖이라 놀란 월영이 물었다.
-아니, 그냥 좀 취한 거 같은데.
짤막하게 대답하고 심현은 보일듯 말듯 미소지었다. 원래 저 세계 사람들은 얼굴 근육이 부족해서 표정 만드는 게 힘든 거 아닌가 하는 고민을 아소가 해 본 적 있을 만큼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적은 얼굴이었다.
-그럼 사제님 정말 안 행복한 거예요? 심각한 얼굴로 묻는 아소의 머리를 심현이 살짝 쓰다듬었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취한 거 맞다. 사제님은 취하면 감정이 풍부해진다. 시열은 마음속에 메모했다.
-그거 아냐. 이다, 아니다로 나누기 복잡해서 그래.
오, 우리 사제님이 긴 이야기를 하실 모양이군. 초로가 웃으며 거들자 잠시 쑥스러운 듯 먼 데를 보고 있던 심현이 헛기침을 했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되니?
-안 돼요. 월영이 놀래키셨잖아요. 쟤 오늘 잠 못자면 사제님 책임.
월광이 반농담처럼 던진 말에도 그녀는 진지했다.
-그러네. 설명이 너무 작았나봐.
그럴 땐 적었구나, 인데요. 드물게 휘안이 그녀의 어눌한 한국어를 지적했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다들 조금씩 평소보다 정신을 풀어헤치고 있는 그런 밤이었다.
-뭣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을까. 그래, 내가 아직 월광이보다 어릴 때 이야긴데
다들 가만히 앉아 귀를 기울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낮은 목소리가 마치 연설을 할 때처럼 독특한 발성으로 울렸다.
-소원을 이루는 꿈을 꾼 적이 있었지.
언제나 그렇듯 낯선 단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사제가 되고 싶었어. 그걸 해야만 했고 또 그걸 하고 싶었거든. 정말로 사제가 되었지. 지금도 내 이름은 사제잖아?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중얼거리자 휘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되고 보니, 내가 정말로 원한 것이 맞는데도 가끔 생각이 드는 거야. 이 모든 걸 다시 되돌린다면 좋을 텐데, 하고.
-사제 일이 싫으셨나요?
솔직한 어린아이의 화법이 이럴 땐 고마운 법이다. 이미 나이든 어른이라면 묻기 힘들 질문을 동풍이 대신 해 주었다. 그 사제는 웃었다.
-아니. 난 사제가 되고 싶었대도. 내가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데? 음, 어디까지 했더라. 아 그렇지. 그냥 차라리 계속 소원을 이루는 꿈을 꾸었으면 하고 바랐어. 내가 가장 원하는 일을 하는 순간에도. 어쩌면 그 일을 하고 싶은 꿈을 꾸고, 그 일을 하게 되는 꿈을 꾸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게 아닌가 하고.
아, 하고 휘안과 월광이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그리고 나는 사제가 아니게 되었지.
아주 평온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말은 금새 묻혔다. 대체 사제가 아니게 되는 건 무슨 뜻일까, 잠시 생각하던 월영은 이어지는 말에 머릿속에서 구르던 생각을 놓쳐버렸다.
-그 때 나는 불행하거나 행복하냐고 내게 물을 여유가 없었어. 여기에 와서 처음엔, 다들 그랬겠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말을 배우고, 이름들을 새로 배우고, 새로운 생활습관을 익히고, 오늘처럼 처음 먹어보는 것들을 먹어보고. 이러느라 바빴어. 지금도 그러고 있잖니. 그 틈틈이 가끔 생각하는 거야. 나는 또 다시 소원을 이루는 꿈을 꾸게 되었구나, 하고.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시열의 머리를 심현이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럼 또 다시 꾸게 될 꿈은 뭐냐고, 용기를 내어 물어볼 요량으로 동풍이 심현을 쳐다보자 그녀는 입에 손가락 하나를 댔다.
-진달래가 좋은데, 철쭉이라 아쉽다. 이 꽃 철쭉 맞지, 응, 그래. 내년엔 진달래 보러 가자.
-사제님 지금 얼렁뚱땅 말 넘겼죠! 아 진짜, 이럴 때만 치사하게, 어른들 진짜 치사해요!
월광이 칭얼거리듯 화를 내자 심현은 유쾌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 안 치사해. 그냥 부끄러워서 그래. 그럼 다음에 또 술 마시러 나와요. 왜 그래야 하는데. 웃음 섞인 대화가 한 차례 파도치고 아까 하던 말들은 말에 쓸려 사라졌다. 그리고 심현은 혼자 생각했다. 행복하건 불행하건 여기가 내가 살아야 하는 세계고 여기서 새로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러므로 그런 건 물어도 대답해줄 수 없다고.

-----------------------------------------------------------------
술이 고파요. 누구 나랑 소주 두 병만 나눠마십시다. 한 병은 아저씨들 따르듯 꽉꽉 눌러 담으면 일곱 잔이니까 나눠 마시면 아쉽고 딱 한 병씩이 적당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저의 특기 중 하나는 어색한 자리에 가면 술 따위 마셔본 적도 없다는 듯 소주잔으로 입술만 적시면서 인상 쓰기, 술 못 마신다고 주장하기.......입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전 기분 좋은 날이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나 마음 편한 데 아니면 술 못 마셔요.

아니 이런 단순한 데서 시작했는데 저 언니는 왜 또 츤데레질이래요 기분나쁘게.

한동안 패러디만 죽어라 써 댔더니 이런 것도 쓰고 싶네요. 결론은 술 고프단 거였는데 뭐죠 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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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온통 어두운 청회색 세계였다. 아직 날 밝으려면 좀 남았나 하고 몸을 돌려 핸드폰을 여니 오전 여섯시가 좀 덜 되었다. 오늘은 날이 흐린가 하고 멀거니 핸드폰을 보고 있으려니 밝은 빛이 눈에 비쳤는지 자던 형우가 미간을 찌푸리고 몸을 뒤틀었다. 평소엔 예민과 담을 쌓고 사는 놈이 잠 잘 때는 인기척에 예민하다. 얼른 핸드폰을 접었음에도 형우가 부시시 눈을 뜨고 신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몇 신데?
-이제 여섯 시.
-어, 여섯 시?
형우가 후닥닥 몸을 일으켰다. 이불 밖으로 빠져 나가 간밤에 벗어놓은 옷을 주섬주섬 걸치더니 얼른 밖으로 나갔다. 얼굴에 물이라도 축이러 가려는 게지. 신재가 바지를 꿰어 입고 이불 위에 주저앉아 티셔츠에 목을 밀어넣고 나서 눈을 들어 보니 형우는 아직도 문 안에 있었다. 문고리만 잡고 있었다. 문을 열며 복도를 슬쩍 살피는 모양이 꼭 죄 진 놈 같아 웃겼다. 신재는 쏘아붙이듯 말했다.
-옆방 사는 놈 나가고 없다고 어제 안 카더나. 그냥 나가라.
-그래도.
-수상하게 생각할 놈 아무도 없거든? 남자 자취방에 남자가 와서 자는데 뭐 문젠데? 아줌마한테 허락도 받았잖아.
-어 뭐.
눈치만 슬슬 살피고 있는 꼴이 우습다 못해 짜증이 난 신재는 이불 밖으로 나가 아직도 문고리를 잡고 복도로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있는 형우의 등을 펵 소리가 나도록 걷어찼다.
-야, 아프잖아!
-아프라고 차지 아프지 말라고 차나?
등을 쓰다듬으며 형우가 불평을 하건 말건 신재는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 걸려있는 형우의 상의와 목도리를 팔에 걸고 방구석에 놓여있던 형우의 가방을 발로 차던졌다. 상의와 목도리는 형우의 등을 향해 정확히 날아가 머리와 어깨 위에 얹혔다. 졸지에 옷을 뒤집어쓰게 된 형우가 뒤로 돌아 신재를 노려보았다.
-뭐고?
-씻고 나가라고.
-야, 밥은 먹여 보내라!
-웃기네. 가다 니 알아 사먹어라.
부당한 대우라도 받은 듯 항의하던 형우는 신재의 대꾸를 듣고 멀거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뭐 묻었나?
-니 오늘은 또 뭐 땜에 카는데.
-뭘? 니 집에 가서 옷 갈아입고 학교 간다더니. 얼른 가라.
-거 참.
옷을 입고 가방을 멘 형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간다. 나중에 보자.
뒤도 안 돌아보고 자취방을 빠져나가는 발소리와 대문을 여는 금속성 소리가 났다가 멎고 한참을 있다가 신재는 창문을 열고 이불을 퍽퍽 소리가 나게 털기 시작했다. 내가 미친 놈이지, 내가 정신이 나갔지 하는 추임새를 넣어 가면서.

-----------------------
2007년 정초에 썼던 얘들 둘 나오는 외전을 기억하는 분이 계시려나. 아무튼 그겁니다. 올해는 꼭 다 쓰고야 말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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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힘 좀 써라. 박스가 뭐가 무거워?"
"야, 그럴 거면 네가 들어라!"
뭐 이런 계집애가 다 있나. 휘안은 책으로 꽉 찬 라면박스를 두 개째 옮기며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경험을 했다. 정신줄이 본체와 접속을 해제할 때는 뚝, 소리가 납니다. 정말입니다.

"오빠-도와줄 거지?"
월광이가 음흉한-본인은 상큼하고 소녀답고 우아하다 주장하는-미소를 지으며 다가올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 휘안은 경계경보를 발령시키고, 미간에 주름을 잡고 월광이를 노려보았다.
"뭘, 어떻게, 언제 도와줘야 되는지 말 안 하면 안 해 줘."
"와, 치사해! 당연히 그냥 도와줘야지! 오빠가 돼갖고 동생 부탁 하나 못 들어주냐?"
네가 날 언제 오빠로 대접이나 했었냐, 라는 말은 실체를 갖추지 못하고 사라졌다. 꺼내봐야 좋은 게 하나도 없으니까. 게다가 빚도 있었고. 사실 자신은 빚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며칠 전, 월광이가 꼭 가게 문 닫고 먹겠다고 찍어놓은 호두파이를 아무 것도 모르고 팔아버린 후로 월광이가 얼마나 으르렁거리며 화를 냈는지. 장사한 것도 죄가 되나요. 휘안은 한숨을 쉬었다.
“왜, 싫어?”
“아, 아니……. 싫긴 누가 싫대. 뭐 하면 되는지 이야기 좀 해 보라구.”
월광이의 미소를 보며 휘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눈 딱 감고 하루만 이 몸을 희생하면 며칠은 편히 살 수 있을 거야.

……희생이 과하지 않나요, 이건?
월광이가 방에서 라면상자를 발로 차서 밀고 나오더니만 그 안에서 얇고 묘하게 이상한 기운이 풍기는 책을 꺼내며 한 권씩 비닐로 포장하라고 한 것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그런데 그 책을 이고, 큰 우드락도 지고 양재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서-당연히 차비도 안 준다.- 책을 책상까지 운반하라는 것이다. 그 크기만 빌어먹게 큰 유리건물은 대체 뭐 하는 곳이냐. 그곳은 이상한 옷을 입은 아이들로 북적였고 -심지어 한길가에서 머리 위로 토끼귀 처럼 올린 손을 파닥이며 춤을 추는 애들이 없나 동물 잠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애들이 없나!-책상과 의자가 빽빽하게 놓여있고 택배상자가 즐비했다.
“야, 월광아……. 좀 받아는 주면 안 되냐?”
책상 위에 박스를 던지다시피 놓으려다 월광이의 눈초리에 다시 박스를 곱게 바닥에 내려놓으며 휘안이 투덜댔다. 손목이 아프고 허리가 아팠다.
“그거 중요한 거야. 막 다루면 안 돼.”
아,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그리고 책 꺼내서 여기 진열하고, 여기 이거 세워서 판넬 좀 만들어.”
아까 자신이 날라온 큰 우드락판을 자르기까지 하란다. 이거 네 일 아니냐?
“넌 뭐 할 건데?”
“나? 팬시 붙이고 오빠가 세운 판넬 꾸며야지.”
아, 그래. 너 하월광이지. 내가 깜박 잊을 뻔 했구나. 월광이의 손에는 알록달록한 종이조각 코팅한 것들이 잔뜩 들려있었다.

장내는 북적였고, 월광이가 앉아있는 곳-부스라고 했다-에도 누군가가 들러 책이며 그 코팅종이를 사 갔다. 월광이는 손님들과 꺄악 **님 오랜만이에요 요즘은 뭐 버닝하세요 좋은 책 건지셨어요 등등 인사를 주고 받았고 그 동안 휘안이는 책을 건네고 돈을 받고 잔돈을 계산하고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하고 체크도 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했다, 노는 거 빼고.
“재고 처리하러 왔어요. 그린 님은 뭐 하러 오셨어요?”
“책 사러 왔죠. 줄 안서려고 부스 냈어요. 더블오 파거든요, 요새.”
“와, 좋으시겠다. 메이저네요? 매진됐음 좋겠어요.”
그리고 월광이는 휘안이가 못 하는 그 유일한 일을 하고 있었다. 조금 화가 났다.

그 때.
“어! 월광아!”
“언니, 오빠!”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들리고 월광의 얼굴이 굳었다.
“뭐야, 세상에. 아저씨? 사제님? ……월영이랑 시열이, 동풍이에……누가 아소를 여기 데려왔어?” 비명으로 시작한 말이 분노로 끝났다.
주위를 돌아보며 아시아에 이렇게 게이가 많았냐며 신기해 하는 초로와 이런 거 파는 건가요, 재미있겠는데 나도 해 볼까 하며 즐겁게 부스를 구경하는 심현과 파랗게 질린 동풍이와 노멀 에로본을 사고 얼굴 붉히는 월영이와 무심한 표정으로 월광의 부스로 척척 걸어와서 의자에 앉아 자는 시열이와 팬시 보고 신나하고 나도 동물 잠옷 입고 싶다고 조르는 아소를 보고 놀라지 않으면 그게 이상하긴 하지. 하지만 월광의 반응은 휘안의 생각과 조금 달랐다.
“누가 여기 가르쳐줬어요? 뭐? 거실 컴퓨터에 약도가 남아있어? 아소 너 누가 언니 하던 거 훔쳐보래? 그리고 사제님 하긴 뭘 해요오! 그림 그리고 글쓰시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심현은 나 그림도 글도 자신없는데 하며 동인계 진출의 꿈을 접었다.- 야 월영이 너 그거 사 가라 그냥! 보기만 하지 말고! 그리고 누가 동풍이 데리고 나가란 말야, 아저씨 여기 게이 페스티벌 아니라고요!”
살짝, 유쾌했다.

-----------------------------------------
부스에서 썼습니다. 저건 진짜 삼돌이네요. 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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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한테 리퀘를 받았습니다. 별로 안 깁니다 OTL 그리고 원래 이런 건 일 하면서 써야 제 맛입니다. 제 마음이 바빠서 좀 비약이 심합니다만;

대한민국에서 성년 기준이 만 18세였나, 19세였나, 20세였나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떨 때는 20세고 또 어떨 때는 18세고 바뀌기도 자주 바뀌고 해서. 아무튼 내가 있던 곳에선 몇 살 부터 술을 마실 수 있었더라. 기억이 희미한 과거를 떠올리며 휘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얘 여기선 미성년인데 여기서 술 마시게 놔 둬도 되는 거냐. 문이야 닫았다고 해도 여기는 다과를 파는 가겐데. 카페 한 구석에 앉아서 혼자 술을 따라 안주도 없이 홀짝홀짝 술잔을 비우고 있는 월영이 보였다. 쟤 도대체 언제 부터 저기서 저러고 있었지. 사실 잔이라고 해 봐야 가게에서 에스프레소를 낼 때 쓰는 잔이고 그러니까 거기에 소주를 담아마시면 정말로 폼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마신다. 술병을 잡고 잔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손목을 살짝 구부려 잔에 다르는데 넘치지도 않는다. 조르륵, 잔을 한 절반쯤 채웠을까. 그렇게 흐르듯 술을 따라 역시 눈은 먼 데 두고 잔을 잡아 한 두 모금에 넘기고, 잠시 인상을 쓰고, 술병을 쳐다보다 다시 술을 따라 마시고. 자세히 보니 녹색 병은 소주병이 아니었다. 색은 녹색인데 병이 네모졌다.
저거 이름이 그러니까, 아, 그래. 고량주. 굉장히 독했지 아마?
그리고 빈 병이 하나, 술이 찬 병이 하나 있는 것을 본 휘안은 머리가 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취하면 실수를 한 적도 있다는 거,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저런 술을 왜 혼자 홀짝거리면서 마시고 있냐고, 안주도 없이, 같이 마실 사람도 없이.

-야, 월영아!
-왜, 오빠?
휘안이 부르자 월영이 탁자에 기댄 몸을 일으켜 사람을 쳐다본다. 목소리는 좀 잠겼지만 알코올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돌아다본 얼굴도 눈 빼고는 말짱하다. 그래, 본래 알코올은 증발하는 물질......이 아니고 월영이 쟤 정말 술 세구나. 아니아니 이것도 아니다. 휘안은 월영의 얼굴에서 위화감을 감지했다. 어떻게 독주를 마시고 눈 빼고는 다 말짱할 수 있냐고. 한 부분만 처져 있는 건 뭔가 잘못된 거다. 이건 그러니까, 놔둘 문제가 아니다. 거기까지 생각한 휘안은 월영에게 다가갔다. 여차하면 술병을 뺏아버릴 생각을 하고.
-왜 그래. 안 마시던 술을 마시고.
-음, 그냥.
-이제 그만 마시고 올라가. 가게는 내가 정리할테니까, 응?
휘안이 말하자 월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냐, 조금만 더 마시고 갈게. 잠시 나 좀 놔두면 안 될까?
-뭣 땜에 그래?
월영은 휘안의 얼굴을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빈 그릇을 털어내듯 아무 것도 얹혀있지 않은 얼굴을 조금 좌우로 흔들며 웃었다.
-별 거 아냐. 그냥 옛날 생각도 좀 나고 해서.
이계에서 온 멤버들 치고 옛날 생각이 괴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과거가 괴로운 것도 종류가 여러가지다. 자신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사람, 그 곳에서 살 수 없어서 이리로 온 사람, 그리고 월영이처럼 정말로 좋아하고 아끼던 것들을 모두 두고 와서 미련이 남고 회한이 남는 사람.
하필 가게에 남은 사람은 자기 뿐이었다. 고로 월영이를 말릴 사람도 자기 뿐이다. 휘안은 잔을 하나 가져와서 월영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 의자를 하나 빼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 오빠?
-먹어 없애면 줄어들테고, 그럼 가서 자겠지. 오빠도 한 잔 줘라.
월영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으며 휘안의 잔에 넘실넘실, 술을 한 잔 따라주었다.

그리고 잘 안 먹던 독주를 마시고 잠든 휘안을 월영이 '오빠는 술이 약해서 큰일이야.'라며 방에 데려다줬다는 후일담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이다.

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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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에 일찍 온 시열과 동풍이 거실에서 뭔가 만들고 있었다. 아소도 재미있겠다고 끼어들었고 일이 없어 한가하게 있던 월영도 도울 게 있으면 하겠다고 나섰다.
주방을 뒤져 종이컵을 꺼내더니 컵 밑 부분에 십자 모양 작은 칼집을 내고, 컵 바깥에 색지를 붙이더니 '고시철회 협상무효'라는 메시지를 쓰고 있었다. 시열은 색마분지에 MB OUT이라는 메시지를 매직펜으로 쓰더니 다른 종이에다 심시티는 혼자 해라, 고 쓰고 있었다. 옆에서 아소가 구호 옆에다가 눈이 찢어진 쥐를 그리고 있었다. 월영은 카페에서 초를 찾아 들고 왔다.
"뭐 하니?"
방에서 비척비척 걸어나온 초로가 하품을 크게 하더니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 아저씨. 웬일로 낮잠을 다 주무세요?"
동풍이 초로를 보고 반색했다. 요 근래 얼굴을 보기 힘든 사람이 카페의 30대들이었다. 지난 봄부터 무슨 일만 있으면 고궁으로 불려나가더니, 이제 호출되는 일이 잦아졌다. 심현의 표정이 가라앉은지 1주일이 넘었고-사제였으면서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이렇게 약해서 되겠냐며 심현이 피식 웃었는데 그 웃는 표정이 엄청나게 심각했다고 아소가 주장했다.-초로의 담배도 조금씩 늘어갔다.
"피곤해서. 방금 들어왔거든."
"사제님 뭐 하세요?"
"주무셔. 많이 피곤한 모양이더라. 근데 보자.......이게 다 뭐냐?"
초로는 거실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종이며 펜이며를 바라보았다.
"학교 숙제야?"
"아뇨. 저희 할 일이 좀 생겨서요."
시열이 대답했다.
"MB가 누구지......아."
초로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알겠다는 듯 손바닥을 쳤다.
"그러니까 이거 뭐냐. 반정부 집회?"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들을 훑어보는 초로의 표정이 어땠는지, 아이들이 피식 웃기 시작했다.
"에이 아저씨도, 직접 민주주의라니까요."
이것은 시열의 한 마디이고,
"야, 직접민주주의가 뭔지 설명부터 해 드려야지."
이것은 동풍의 한 마디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요."
이것은 월영의 한 마디이고,
"이럴 때 본때를 보여줘야한다고 낚시하는 아저씨들이 그랬어요."
이것은 아소의 한 마디였다. 이 녀석들, 절대로 내가 나가지 말라고 말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구나. 아이들이 한꺼번에 재잘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없었는지 잠시 미간을 찌푸린 초로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국민의 뜻을 받들라, 이거지?"
"네. 이 나라에는요, 국민들의 뜻을 반영하는 정치가가 나온 적이 별로 없었어요. 요 최근 60년간요. 그래서 가끔 나라꼴이 이상해지려고 하면 국민들이 나서는 거랬어요."
동풍이 초로를 위해 설명했다.
"그게 민주주의라고요."
아하, 초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짓 하면 안 된다."
"네."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촛불 들고 있는 비폭력집회인걸요. 위험할 거 아무 것도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시열이가 생긋 웃었다.

2. 뉴스를 보던 월광이 저 자식 죽여버리겠다고 난리를 치는 것을 휘안이 간신히 뜯어말려놓았으나 월광은 짜증나고 열 받아 못 살겠다면서 카페 구석에 고이 모셔놓은, 얼마 전에 차장님이 갖다놓은 술병 마개를 열고 안주 하나 없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 그렇게 마시는 거 아니라며 심현이 부엌에서 강냉이를 좀 들고 왔고 월광은 강냉이 안주 삼아 브랜디를 목에 털어넣고 있었다. 옆에서 휘안이 그 모습을 보며 오늘 밤에도 이 기집애가 날 괴롭히다 자겠구나, 하며 슬퍼하고 있었다. 뉴스를 보던 초로가 한숨을 쉬었다.
"휘안 군, 요샌 손님들도 별로 없지?"
"네."
"우리도 바쁘니까 어떻게 보면 참 다행이긴 한데 말이다."
월광이가 마시는 술병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두 남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 이렇게 일하다가 한 사람 쓰러지거나, 아예 정말로 싸고 질 좋은 능력자로 대체되는 거 아냐?"
"에이 설마요."
"가능성 없진 않은 거 두 분 다 알고 계시죠?"
월광이가 술병을 내려놓고 살짝 혀꼬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나라에 와서 산 지가 몇 년인데, 이렇게 앞이 안 보인 적도 처음이었다. 초로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투표권 우리도 주면 안 되나?"
"투표권은 왜요?"
"우리 의견도 선거에 반영해야 될 거 아냐. 우리 대한민국 정부 소속 아냐?"
"원래 대한민국이 외국인에게 박하답니다."
외국인이랄지, 외계인이랄지, 이계 출신들이 쓴 웃음을 지었다. 이 나라에서 외국인으로 살면서 느낀 점들을 떠올리니 참 막막했다. 초로가 반론했다.
"우리는 사실상 한국인 아닌가? 이만하면 한국인이잖아."
한국에서 한국 이름을 가지고, 이 나라에서 인생을 마치겠다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는데 왜 우리는 한국인이 아닌가. 월광이 아주 간단하게 답을 말해주었다.
"아저씨, 투표권 원하시면 돈을 많이 버셔서 대한민국 1%가 되세요."
"얘가 좀 취했나보네, 월광아, 진리는 술 깨고 말해야 하는 거다. 아냐?"
휘안이 쓰게 웃었다.
"안되겠다, 휘안아. 월광이 자기 방에 데려다주러 가자."
심현이 몸을 일으켰다. 둘이 월광을 부축해서 옮기는 것을 보며 초로는 월광이 마시던 술병에 손을 뻗었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는 옛말이 틀리진 않은데, 어째서 내가 살려고 마음먹은 이 곳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 일단 한 잔 마시고 나서 생각을 좀 더 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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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쓴 글 뒷이야기를 좀 잇고 싶었어요. 저번 글도 너무 못 써서 나중에 수정 들어갈 생각입니다. 생각나는 대로 쓰는 버릇 좀 고쳐야 되는데 말이에요.

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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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을 조금 했습니다. 탕아월드의 질문 이벤트까지 한 큐에 해결 봤습니다.

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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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디 언니 리퀘글입니다. 늦게 드려 죄송합니다.

오후라 햇빛이 살짝 노란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떨어진 햇빛이 툭 하고 튀어올라 녹슨 철제 난간에 둔하게 부서졌다. 조각난 햇빛이 눈에 들어가 따가웠던지 옥상 철제 난간에 등을 걸치듯 기대고 숨을 몰아쉬던 남자가 왼손으로 눈을 가렸다.
“눈 따가우세요?”
“새끼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옥상에 서 있는 남자는 두 명이었다. 두 남자의 손목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오른손목에 수갑이 묶인 남자가 더 젊었다. 색이 바랜 듯 엷은 갈색 머리에 입술이 얇았고, 검은 셔츠에 바지가 퍽이나 수상해 보였다. 왼쪽 손목에 수갑을 찬 남자가 으르렁거리자 갈색 머리 남자가 대꾸했다.
“그럼 좀 쉬세요. 왜 계속 씩씩거리고 계세요?”
“너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왼손목에 수갑을 찬 남자가 자유로운 오른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언뜻 보기에도 피곤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입을 일그러뜨리고 얼굴을 쓸어내린 손을 들어 머리를 움켜쥐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내 손이랑 네 손이 같이 묶이는데?”
“제 말이요. 저 그만 가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나요?”
갈색머리 남자는 짐짓 괴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왼쪽 어깨를 으쓱했다. 왼쪽 손목에 수갑을 찬 짧은 검은머리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가긴 어딜 가! 오늘은 결판 좀 내야 쓰겠다. 도둑놈이 어딜 가?”
“에이 형사님도. 괴도라면 도망가는 게 정석이죠.”
“내가 오늘 너 묶어놓은 건 정말 후회 안 할 자신있다.”
“묶여있는 게 좋으신가봐요?”
괴도가 느물거리듯 말하자 스포츠머리에 가까운 짧은 검은머리 남자, 형사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자기 주먹을 노려보았다.
“그냥 사기를 치지, 혀 돌아가는 거 보니까 아주 적성에 딱이네.”
형사가 혀를 차자 괴도는 피식 웃었다. 웃자 눈이 반달모양으로 가늘어져 형사는 그 눈부터가 참 얄밉다는 생각을 했다.
“에이,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어떻게 사람을 갖고 놉니까?”
형사는 생글생글 웃고 있는 괴도를 노려보았다.
“씹새야 너 이거 풀리면 보자.”
“예, 예. 맘대로 하세요.”
형사가 노려보던 말던 상관하지 않고, 괴도는 난간에 머리를 기대고 다리를 쭉 뻗은 자세를 잡았다. 한숨을 쉬고 형사도 오른손으로 땅을 짚고 다리를 폈다.
“그런데 너 정말 이거 못 푸냐?”
“형사님은 열쇠 없으세요?”
형사가 왼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괴도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저번처럼 주머니 뒤져서 수갑 열까봐 두고 왔지.”
괴도는 오른쪽을 보며 생긋 웃었다.
“에이. 사람을 못 믿으니까 둘이서 이 꼴이잖아요.”
형사는 웃는 얼굴이 꼭 여우새끼 같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어떻게 하면 이게 난간에 연결이 될 수 있냐?”
“그러게 누가 수갑을 두 개 들고 오시랬나요.”
“저번처럼 네놈이 수갑을 박살낼까봐 그랬지 나야.”
“형사님은 저한테 애정이 너무 부족하시다니까요. 그렇게 절 못 믿으세요?”
괴도가 입을 삐죽거리자 형사가 주먹을 쥐고 괴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미친 새끼야, 경찰이 도둑놈을 믿냐? 믿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이 있어야죠!”
괴도는 머리를 마구 내저으며 주먹을 피했다. 잠시 공방전이 이어지고 형사가 한숨을 쉬며 주먹을 내렸다.
“너랑 말 섞은 내가 바보지. 됐다. 무전 쳤으니까 조만간 누가 오겠지. 좀 쉬자. 그런데 너 진짜 이거 어떻게 한 거야?”
“저도 몰라요. 실수한 거죠.”
“꼴 좋~다. 그러게 누가 방심하래.”
괴도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형사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날씨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2년째 쫓아다니던 놈을 잡으니 속이 시원해서 날씨가 좋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놈이 뭐라고 깐죽대도 진심으로 화가 나지 않는 것도 분명 그래서일 거라고 형사는 막연히 생각했다.
“형사님?”
괴도가 형사를 불렀고, 멍하니 딴 생각을 하던 형사는 놀라 팔을 당기다 말고 씃, 소리를 내며 팔을 움츠렸다. 괴도가 오른쪽을 쳐다보았다.
“다쳤어요?”
눈살을 찌푸리며 형사가 말했다.
“수갑에 손목이 쓸려서 그런다. 아까 좀 난동을 피웠어야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형사가 괴도의 한 팔을 꺾으려는 순간, 괴도가 형사의 주머니에서 수갑을 하나 더 꺼냈다. 놀란 형사와 티격태격 싸우는 사이에 어찌된 일인지 수갑은 한쪽 끝이 형사의 수갑에, 한 쪽 끝이 난간에 잘 채워져 있었고, 형사와 괴도는 잠시 멍하니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조금 후, 둘은 손목을 미친 듯 흔들어대며 이럴 수는 없다고 외쳐대며 10여분을 반광란 상태로 보냈다. 그러다 무전을 치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은 형사였다. 괴도 잡기에 혼을 바쳤으나 혼만 바치고 소득은 없는 그를 위해 보내줄 순찰차는 없었는지 묘하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듯 했다.
아무튼 수갑을 풀겠다고 무리한 짓을 해서인지 손목엔 금속이 스쳐서 빨갛게 부어오른 자국이 몇 개 있었다. 살이 심하게 쓸린 탓인지 핏방울도 조금 비쳤다. 형사의 손목을 보던 괴도가 왼손을 뻗어 묶여있는 형사의 팔을 잡고, 자기 쪽으로 팔을 당겼다.
“뭐 하려고?”
“치료요.”
괴도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놔라.”
형사가 팔에 힘을 주었다. 괴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손목을 내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하게 들었다.
“싫습니다.”
괴로가 머리를 숙이고 가슴으로 형사의 팔을 잡아 눌렀다. 잠시 다리와 가슴 사이에 팔이 갇힌 형국이 된 형사가 팔을 빼려고 당기려는 순간, 괴도가 턱으로 수갑을 밀고 상처에 혀끝을 내밀어 부은 곳을 핥았다. 축축한 혀가 스치고 지나가자 잠시 뜨거운 느낌이 들다, 타액이 식으며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의외의 행동에 허를 찔린 형사가 잠시 힘을 풀자 괴도는 그 기세를 타서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며 손목을 당겼다. 팔이 당겨지자 형사의 몸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괴도는 형사의 팔목에 맺힌 피를 살짝 핥더니 피가 맺힌 부위를 빨고, 피 섞인 타액은 괴도의 혀를 타고 목으로 넘어갔다. 팔목에 댄 입술을 옆으로 밀듯 옮기고 다시 부은 부위를 핥았다. 혀가 지나가자 형사는 등을 움찔했고, 형사가 움찔거리지 않으려고 몸을 긴장시키자 괴도의 혀끝이 상처를 쓸듯 훑었다. 미묘한 감각에 팔목이 간지럽다고 형사는 생각했다.
상처를 핥던 괴도가 고개를 들고 형사를 쳐다보며 웃었다.
“상처에선 참 묘한 맛이 나지 않아요?”
“핥지 마라.”
형사는 고개를 돌렸고 괴도는 입끝을 들어올리고 웃었다.
“형사님 얼굴 빨갛네요?”
“그럼 이 상황에서 얼굴이 빨개지지 파래지냐?”
형사 자신이 생각해도 참 말이 안 되는 발언이었다. 그 사실을 의식하고 옆을 보자 괴도가 킥킥 웃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자식이 못 웃게 할까 고민하는데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형사가 반색했다.
“저 소리 들리냐?”
“네, 들려요.”
풀이 죽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생생한 괴도의 목소리가 한참 위에서 들렸다. 앉은키가 나랑 비슷했던 것 같은데 목소리가 왜 이렇게 위에서 들릴까, 하고 옆을 본 형사는 놀랐다.
“어, 어?”
어느새 괴도는 수갑을 풀고 일어나 있었다. 물론 형사의 손목은 그대로인 채로, 게다가 도망갈 채비를 완전히 갖추고.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 형사를 향해 괴도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야, 너!”
“형사님, 정말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 주세요.”
괴도는 슬쩍 형사의 손을 잡고, 놀란 형사가 허둥대는 사이 형사의 눈에 눈을 맞추고 손바닥에 입술을 갖다 댔다. 손바닥에 닿는 따뜻한 기운에 한 번 놀라고, 사람의 날숨이 만드는 간지러움에 당황하고, 입술을 누르는 감촉에 굳은 형사를 놀리듯 괴도는 웃었다.
“다음엔 다른 플레이하고 놀아요. 그럼 안녕~.”
이새끼야 죽을래! 라고 외치려고 입을 움직이는 순간 괴도는 사라졌다. 동료들이 도착해서 본 것은 수갑에 묶여 난간에 매달려서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 형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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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당위성도 없어 죄송합니다. 그런데 늘 이런 식이어서 더 죄송할 것도 없을 것 같네요;

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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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안 되는 소립니다.
심현은 눈 앞에 서 있는 유령에게 말했다.
-애초에 이승과 저승이 유별하다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이 곳에서의 존재기반이 약하신 분이 여기에서 무엇을 더 이루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눈 앞의 공기가 일렁이는 것으로 보아 유령이 무어라고 말을 한 모양이었다. 월영은 동풍을 흘끗 쳐다보다. 동풍이 긴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상황은 악화된 듯 했다. 세 명이 있는 폐가의 벽이 조금씩 흔들리며 벽에서 떨어진 가루가 세 명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점점 벽의 진동이 거세졌으나 움직이거나 소리를 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벽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더니, 진동이 멎었다. 심현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하실 말씀은 그것 뿐이신 걸로 알고 저도 마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이 아이들 좀 보세요. 여자아이 쪽은 지금 당신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못 듣습니다. 그게 다예요. 여기 있어봐야 계속 이런 것 밖에 못 보십니다. 얼마나 허무한가요.
허무하다, 는 말을 입에 올리며 심현은 그야말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집의 벽을 울리고 , 물건을 옮기는 것 뿐이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그걸로 도대체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벽의 진동이 갑자기 커졌다. 월영의 귀에도 웅웅거리는 묘한 소리가 들렸다. 벽에서 뭔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동풍이 바람을 일으켜서 떨어지는 것들이 사람에게 맞지 않도록 했다. 동풍이 만든 바람벽의 뒤에서 월영이 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심현은 다시 유령과 대화를 시도했다.
-계속 여기 계시면 이런 일 뿐일 겁니다. 찾아오는 사람은 저희 같은 사람들 뿐.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거예요.
-계속 이렇게 행동하시면, 점점 당신과 이승 사이의 차이가 벌어지게 되겠지요. 그런 것을 원하셨나요?
대화가 계속 이어졌고 월영의 연주 덕인지 진동이 조금씩 약해졌다. 어느새 진동은 거의 멎어 동풍이 바람을 일으키지 않아도 괜찮은 정도로 진정이 되었다.
-자, 그러니 이제 그만 가시지요.
시열의 눈에 동풍과 심현이 무언가를 잡고 여는 것처럼 보였지만 열린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공기가 조금 달라진 것을 느끼고 다시 동풍을 보니, 동풍이 한 손으로 슬쩍 V 자를 그리고 있었다. 드디어 일이 끝났구나 싶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심현을 쳐다본 월영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굳고 말았다.
-가시는 길은 이쪽입니다.
무려 한 손으로 길을 안내하는 것 같은 포즈까지 잡으며 심현이 온화하고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월영의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있나 싶었는지 얼른 월영의 시선을 따라 옆을 쳐다본 동풍이,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으나 심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잠시 후, 폐가는 조용해졌다. 남은 것은 유령이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일으킨 잔해 뿐이었다. 그렇게 폐가에서 벌어진 이상현상에 대한 일은 끝났지만, 아이들은 귀신보다 더 어이없는 것을 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뒷정리를 마치고 카페로 돌아가는 길, 버스를 타고 맨뒷좌석에 셋이 나란히 앉아서 한참을 가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사제님이 그렇게 말 많이 하시는 거 처음 봤어요.
심현과 같이 일을 해 보기는 처음인 월영이 입을 열었다.
-난 사제님이 그렇게 웃는 것도 처음 봤어요.
심현과 몇 번 같이 일을 해 본 동풍이 입을 열었다.
-으응.
심현은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떄, 월영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 전화다. 과장님이네.
월영은 전화를 받았다.
-아, 과장님? 네. 저희 일 잘 끝났어요. 주변 정리도 했고요, 아까 주신 것도 쳐 놨어요. 그거 이제 건물 철거한다는 표시 맞죠? 네. 뒷일 잘 부탁드릴게요.
통화를 끝낸 월영은 전화기를 넣고, 통화하는 것을 흥미진진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심현에게 물었다.
-사제님은 전화기 없으세요?
-나? 있긴 있는데......
심현은 들고 있던 천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이게 흔들려서 받아보면 벌써 끊겼더라고. 참 이상하지?
-그래서 저한테 전화하신 거로군요.
그게 제일 빨랐을 것이다.
-응? 무슨 말이야?
-아니에요. 그런데 사제님.
월영이 말을 이었다.
-아까 웃으시니까 참 보기 좋던데.
-그래요, 웃는 게 좋아요.
동풍이 말을 거들었다.
-아, 그거?
잠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심현이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잘 안 되어서.
-안 돼요?
-응. 원래 내가 항상 이 얼굴이잖아.
처음에는 참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말수도 적고 표정이 부족해서 이 사람은 이 곳이 싫은 걸까 하고도 생각했다. 말수가 적은 건 단지 말을 하기 힘들 뿐이어서이고, 표정이 원래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심현을 만나고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심현이 월영에게 물었다.
-음, 그런데 내가 아까 많이 웃었나봐?
-네, 활짝 웃으셨어요.
-그게 신기했구나.
-네.
-어려서부터 그랬어.
이야기를 듣는지 마는지 잘 안 열리는 창문을 열심히 열고 있던 동풍이 심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카페 안에서 과거 이야기는 서로 묻지 않는 게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제라고 말만 들었지 어떤 사제인지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심현은 머릿속에서 말을 고르는지,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나는 아주 어려서 일을 시작했거든. 그런데 내가 사제니까, 어린애같이 굴면 이상할 거 아냐.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그럼 그래서 잘 못 웃으시는 거예요?
월영은 성실히 이야기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심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응? 아니. 그래서 열심히 웃었지.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설명을 요구하고 싶었지만 심현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음......그게......내가 웃어야 안심이 되지 않겠어.
그 말을 끝으로 심현은 혼자 생각에 잠겼고, 월영은 혼자 열심히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혹시 신자들 앞에서 여유있게 보여야 한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에 생각이 미쳤을 때, 심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원래 사제들이 다 그래.
창가에 앉은 동풍은 창문을 열고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어느새 심현도 가방에서 뭔가 꺼내서 읽기 시작해서 월영은 혼자 생각했다.
방금 그녀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갔다. 그리고 역시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카페에 애초에 한 눈에 보고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는 했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버스에서 내려 카페로 돌아간 다음, 월영이 나머지 멤버들에게 사제님이 그렇게 말도 많이 하고 웃기도 하고 큰 동작도 취하는 걸 처음 봤다고 이야기해 주자, 같이 일을 나가 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한 번도 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아예 월영이 하는 말을 믿지 않으려고 했다. 그 광경을 본 심현은 원래 사제들은 그렇다는 말을 되풀이했고, 월광이 혹시 사제님만 그런 거 아니냐고 묻자 한참을 고민하더니 생각 좀 해 봐야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나머지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사제를 하게 된 걸까를 각자 생각해 보았으나 뾰족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 후, 코드네임 야누스가 얼굴을 두 개 가진 신의 이름이자 이중성을 뜻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월광에게서 들은 월영은 무릎을 딱 쳤다. 정말 저 분에게 어울리는 이름 아닌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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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설정을 해 놓고도 사제씨의 이중성에 대해 한 번도 설명을 하지 않은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설명 좀 해 보려고 썼습니다. 그래요 저는 설정의 당위성을 위해 글도 급조하는 여자예요;
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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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뉴얼을 좀 했습니다.
앞에 쓴 글은 비공개로 돌려놓을게요 리플 달아준 윈디 언니, 론, 미니, 은이 미안해요.

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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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풍 군 전학 생각 있습니까?
여름방학 끝무렵, 가게에 불쑥 찾아온 과장이 동풍에게 물었다.
-음......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데요?
-거 괜히 물었군요. 그럼 시열 양이랑 같은 학교로 전학을 가는 건 어때요?
-별 상관 없어요.
동풍이는 언제나처럼 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학수속을 밟아볼까요, 하던 과장의 말이 순간 튀어나온 목소리에 묻혔다.
-우리 학교요? 왜요?
어쩐 일로 안 자고 한 구석에 앉아서 깨작깨작 영어 숙제라나, 문제집을 끌어안고 씨름하고 있던 시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집중하고 공부하라니까.
-오빠는, 지금 집중이 문제가 아니잖아.
옆에 앉아서 설탕통에 설탕을 채워넣고 있던 휘안이 시열에게 타박을 주었으나 시열의 관심사는 이미 동풍과 과장의 대화로 옮겨간 후였다.
-과장님, 왜 동풍이 오빠가 우리 학교에 전학와요?
-아 뭐, 별 거 아닙니다. 두 사람 다 일 때문에 가끔 학교를 빠질 때가 있는데, 두 학교에 다 사정을 설명하기 귀찮다고 그래서들 말이죠. 관리직은 귀찮아요, 특히 공무원은 더.
-그럼 행정상의 편의 때문에 저의 학교생활을 희생하라는 말씀이세요?
일을 할 때가 아니면, 특히 학교생활과 관련된 일이면 매사 무관심일변도로 나가던 시열의 반응은 의외로 강경했다.
-동풍이 오빠 거주지 주소 여기로 되어있잖아요! 친척이랑 한 학교면 귀찮은 일이 엄청 생길텐데 나보고 어쩌라고요, 싫어요.
-어......그럼 귀찮게 안 하고 다닐게.
-그게 오빠 맘대로 될 거 같아?
-시열 양, 동풍 군이 시열 양을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거예요.
-아, 정말! 과장님은 졸업하신지 오래되어서 기억 못 하시는 거죠? 진짜 귀찮단 말이에요!
수상하다, 대놓고, 노골적으로 수상하다! 휘안은 이 곳에서 학교를 다닌 경험은 없지만, 과거 사관학교에 다니던 자신을 떠올리며 시열의 행동을 분석해보았다. 1학년이랬으니까 군기가 안 잡혀서 기합이라도 받는 걸까? 복장불량이라고 뒤뜰에 불려가서 구르나? 왼손에 들랬던 가방 오른손에 들어서 혼났나? 칼을 제대로 손질하지 않았나?
-휘안이 오빠. 뭐 생각하는지 대충 알겠는데, 그런 거 절대 아니거든?
무슨 표정을 어떻게 지었는지 시열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알았어요. 오빠 오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요. 대신 나 귀찮게 하면 알아서들 해요.
귀찮다는 표정으로 던지듯 말을 하고, 시열은 다시 영어문제집으로 눈을 돌렸다.
-특히 동풍이 오빠. 조심하는 게 좋아. 오빠한테도 귀찮은 일이 될 수 있으니까.
-어, 어.

새로 입은 교복이 어색해다는 생각을 하며 동풍은 교무실 문을 열었다. 교무실 책상 위에 이름표가 붙어 있어서 새 담임을 찾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30대 후반, 40대 초반쯤으로 보이고 조금 구겨진 트레이닝 복을 입은 남자교사는 미간에 주름이 잡힌 것 빼고는 그렇게 인상이 나빠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마동풍.......교과서는 행정실에서 받아 왔고?
-예.
-그으래. 그럼 이따 쉬는 시간에 교실로 가라. 자리 하나 만들어놨으니까.
-예.
-아따, 그 놈 참 얌전하네. 그런데 남고에서 공학으로 전학와서 적응하기 힘들겠어. 내신 관리하기 힘들텐데 왜 이리로 왔어?
-이 학교에 사촌이 있어서요.
-친척 누구?
-아실지 모르겠는데 1학년 한시열이라고......
-어, 너 한시열이네 친척이야?
서류를 읽던 교사의 눈이 갑자기 멈추었다.
-어.......네. 아세요?
-작년에 수업 들어갔지. 내 교직생활 14년 동안 체육 시간에 실기연습 하는 동안 선생 눈 피해서 운동장 구석에서 자는 놈은 또 처음 봤다는 거 아니냐. 너도 많이 자냐?
-.......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옆자리에 앉아 국어교과서를 보고 있던 여자 교사가 고개를 홱 돌렸다.
-한시열요? 그 50분 수업시간 중 30분은 자고 20분은 깨어있는 한시열?
그 소리를 필두로, 교무실에 있던 교사들 중 서너명이 갑자기 정말 할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 시간에는 20분은 깨어있어요? 제 시간에는 안 일어난 적도 있어요. 그러고보니 시열이 작년에 권 선생님 반이었죠?
-아아. 시열이? 종례하러 들어갔는데 안 일어나서 꺠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다고요.
-누구요? 시열이? 걔 사촌오빠라고?
시열아, 유명인사였구나. 동풍은 무의식중에 허공을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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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전이었나, 미니네서 자고 오던 날, 미니와 이야기하던 중에 나온 소재입니다.
뒷이야기는 미니가 써도 좋다고 하면 쓰겠습니다. 왜냐면 이 이야기의 절반은 미니 아이디어였어요.

전학이나 시열이네 학교 이야기는 그냥 써 본 거니 사뿐히 무시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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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은 세상 바람둥이들의 귀감이라니까.
크리스틴이 비아냥조로 중얼거린 한 마디를 미겔은 애써 못 들은 척 넘겼으나 여자가 셋, 남자가 하나인 장소에서 남자 하나 바보 만드는 건 마음만 먹으면 일도 아니라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어디 갈 리 없다. 애니가 눈을 반짝였다.
-한 번에 양다리를 걸치지 않으며 모든 상대에겐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하며 정리는 깔끔하게 하며 매달리는 법이 없으니 세상 바람둥이들이 보고 배워야 할 덕목이 아니겠냐, 크리스 말은 그거지?
-뭐, 내가 말하려는 거랑은 좀 다르지만 저 사람이 뒷정리가 깔끔하다는 건 나도 인정할 만 해.
-그런데 왜? 별 스캔도 없잖아.
-없으면 뭐 해. 스캔들보다 더 나쁜 게 미겔이 하고 다니는 짓이라고. 어제 애니는 못 봤지?
-뭔데?
서류를 철하는 척 펀치를 들고 열중하고 있던 아요툰데가 아예 펀치와 서류철을 내려놓고 크리스틴 옆으로 다가왔다.
-아요툰데도 못 봤어? 음, 그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크리스틴이 미겔을 흘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속을 긁으려고 작정하고 말을 꺼낸 것이니, 미겔이 눈썹을 찌푸리고 저걸 어떻게 말려야 잘 말렸다는 소리를 들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면 크리스틴의 의도는 99% 성공한 것이다. 과연 미겔은 미간을 찌푸린 채 크리스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제 점심시간에 길 가는데 어떤 아가씨가 미겔을 보더니 갑자기 한길에서 막 울면서 뛰어가더라고.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미겔이 난감한 얼굴로 말을 흐리잖아? 이런 경우는 십중팔구 그거지. 치정극. 어쨌든 미겔이 그 여자한테 뛰어가서 뭐라고 뭐라고 한참 이야기를 하더라? 그런데 그 여자가 미겔을 노려보더니 따귀를 때리는 거야. 너무 정석적이라서 할 말이 없더라니까.
그리고 크리스틴이 씩 웃으며 미겔을 돌아보았다.
-당신 또 차였지?
미겔은 아예 한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걸 그렇게 폭로하다니, 너무하지 않나? 배려심은 사회인에게 중요한 덕목이야.
-시끄러워. 학교에서나 선생인 척 하라니까.
크리스틴이 으르렁거리자 미겔은 한숨을 쉬었다. 옆에서 그 꼴을 보며 깔깔대며 웃고 있던 애니가 말했다.
-미겔이 연애 성공하는 거 본 적 있는 사람?
-한 번도 없지. 늘 차이지 않았나?
아요툰데가 대답했고 두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바람이 아니라니까.
미겔이 끼어들었으나 그의 발언은 여자들에게는 낙엽 떨어지는 소리만큼의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듯 했다. 세 여자들은 자기들끼리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애니가 말했다.
-사실 미겔이 늘 잘 하긴 하지 않았어? 그런데 차이잖아, 항상.
-그야 당연하지.
아요툰데가 끄덕였다.
-남자는 안정이라니까. 미하일한텐 그게 없다고. 안정감도 없고, 그렇다고 긴장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여자가 오래 사귀고 싶겠어?
미겔이 변명했다.
-매번 상대에게 충실한 법이라고 말하면 안 되나? 그래도 난 매번 진심이었는데.
-그런데 늘 차여?
크리스틴이 아예 깔깔깔 웃기 시작했고 미겔의 미간은 더더욱 구겨졌다. 저러다 화라도 내지 싶었는지 아요툰데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그만. 크리스틴, 너 오늘 기분 안 좋아?
-몰라.
크리스틴은 표정과 동작-등을 돌리고 앉는 것으로 그녀 자신이 한 대답을 부정했다. 아요툰데가 웃었다.
-그래도 미겔을 놀려서 기분풀이하는 건 나쁜 짓이잖아. 그만하고, 그리고 미겔?
미겔이 돌아보자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크리스틴이 뭔 생각인지는 몰라도, 난 너한테 꼭 한 마디 해야겠어. 미겔, 그러지 마.
-뭘 그러지 말라는 건지 잘 모르겠어.
-모르면 스스로 찾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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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에 쓴 문장이 퍼뜩 떠올라서 대충 모니터에다가 낙서를 해 봤고요, 대략 이런 느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크리스틴은 기분 나쁘면 미겔을 물고 늘어져 괴롭히는 버릇이 있고요 미겔은 폭발하면 애를 들들들 볶아대고 애니는 크리스틴이랑 죽이 맞아서 나쁜 장난도 자주 치고 그럴 떄 마다 고생하는 건 왕언니 몫. 사실 미겔이 성실하지 못한 연애질하고 돌아다니는 걸 어서 써야 하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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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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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좀 정해 주십쇼. 전 죽어도 제목을 못 정하겠어요.

이게 시작인데, 앞으로는 크리스틴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될 일은 없습니다. (끝을 낸다면 에필로그만은 미겔의 시점에서 한 번 진행하고 싶지만.)이 네 사람이 작은 능력으로 악몽을 대신 꿔 준다던가 (미겔의 능력에 대해선 수정을 좀 할 참입니다.) 없어진 물건을 찾아준다던가 하는 소소한 일상을 그린 이야기가 될 예정입니다만.


참고로 크리스틴은 끝까지 미겔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합니다. 미겔도 직장 안에 있는 여자들에겐 손 안 뻗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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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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