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 일 주일 만에 야자를 마치고 나오니 열 시 반이었다. 4월 치고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서 맨다리에 교복치마가 휘감겼다. 복잡한 게 싫어서 다른 애들이 다 나간 다음 복도를 나섰더니 학교 앞 길이 휑하다. 교실 불이 거의 다 꺼진 운동장은 어두워서 먼 곳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멋이라곤 없는 휑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자기 발자국 소리만 들리는 광경은 시열이 생각해도 좀 섬뜩한 데가 있었다. 누가 학교란 데는 애들이 아무도 없으면 굉장히 무서워서 괴담이 생기는 거라고 했는데 누구였지, 사제님이 또 어디서 이상한 책 읽고 해 주신 이야기였나. 발소리 뒤에 뭐가 따라오면 차라리 반가울지도 모른다. 4월 밤공기란 사람을 묘하게 만드는 작용이 있나.운동장을 벗어나 차도로 나오자 길 한 켠에 아는 얼굴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땐 그래서 더 반가웠지만 그다지 내색하지는 않았다. “시열이 언니~” “시열이 늦게 나왔네. 오늘도 수고 많았다.” 아소가 팔짝 뛰어 다가와 시열의 팔에 매달렸고 초로가 다가와서 시열의 가방을 받아들었다. “뭐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앉아있으면 되고……그런데 어쩐 일이에요?” “응? 일 하고 오다가 시열이 마칠 시간이라 데리러 왔지.” “아소랑 아저씨랑 둘이 일 했어?” “응, 아냐, 저기 오빠 온다.” “기다리셨죠- 어, 시열이 그새 나왔네?” 휘안이 비닐봉지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오빠도 왔네.” “응, 야자 한다고 수고했다. 암만 생각해도 이 동네 학교 이상해. 애를 왜 한밤까지 학교에 잡아둬?” “그치, 오빠 이상하지.” 아소와 휘안이 투덜대며 앞서 걸어가고 가방을 한쪽 어깨에 멘 초로가 시열과 나란히 걸었다. 봉지에 든 게 뭔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두 사람이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어서 말을 걸 수가 없다. 초로가 말을 보탰다. “그러게 말이야. 애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크는데 뭐 하는 건지.” “그러니까 저 야자 안 해도 되는데요.” 시열이 야자를 하게 된 것은 사실 카페 최연장조 두 사람이 어릴 때 친구들이 하는 건 다 해보고 커야 된다면서 야자를 하라고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어려서 남들 하는 거 다 해 봐야 커서 후회을 안 한다며 열을 내어 말하는데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심지어 사제님 학부모 상담날 학교에 오셔서 담임과 이야기까지 하고 갔었지. 우리 시열이 학교 생활 잘 하나요, 네, 뭐 잘 앉아있고 딱히 말썽은 안 피웁니다만 뭔가 애 같지가 않아서요. 애가 애 안 같으면 안 되죠, 잘 부탁드립니다. 아 네 근데 성적에 대해서는 궁금하신 게.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해야죠. …… 선생님 왜 말씀이 없으세요. 아, 아닙니다. 담임이 그녀를 맞이하여 당황하던 모습이 눈에 선해서 시열은 피식 웃었다. “왜?” 아소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고 떠들고 있던 휘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춤을 추는 사람이라 그런지 평소에도 몸놀림이 좀 다르긴 한데 오늘따라 동작이 경쾌하다. “아니, 오빠. 전에 사제님 학교 오셨을 때 담임이, 영어로 인사 했는데 사제님이 멍하게 쳐다보면서 한국말로 해 주세요, 그랬던 거 생각나서.” “그러게 왜 사제님이 가셨어. 아저씨 보내지.” “학교 꼭 와 보고 싶다셨거든. 동풍이 오빠네도 갔대.” “거기도 꽤 떠들썩했겠네.” 휘안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월광과 싸울 때 빼고는 그다지 없다. 이상하게 다들 땅에서 둥둥 떠서 걸어가는 듯하다. 위화감을 느끼던 시열마저 전염되어 쿡쿡 웃으며 걷다 보니 평소 집으로 가던 방향이 아니었다. “우리 지금 어디 가요?” “어, 말 안 했어?” 셋이 동시에 입을 모아 답했다. 아소 너 말 안 했니? 오빠가 말 한다며, 내가 언제. 시열은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들 묘하게 들떠 있어. “전혀요.” “아. 꽃놀이.” “이 밤에요?” “그게 월광이가 좋은 데 알고 있다고 해서.”
카페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작고 소박한 공원에 밤에 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뭐든 밤에 보면 다르다더라고. 좀 더 요기롭다던가.” 그렇게 말하는 휘안의 붉은 머리마저 밤의 불빛 아래서 보니 새롭게 보인다. 꽃들도 낮에 보는 꽃들과 달리 어둠 속에 새겨놓은 듯 묘한 질감으로 풍경에 붙박혀 있었다. 좀 더 손에 잡히지 않을 듯 비현실적이고, 좀 더 투명해 보이고, 좀 더 평소 보던 풍경처럼 확실하지 않아서 번질 듯 하고. 두 그루의 큰 목련나무 사이에 엷은 주황색 가로등 불이 비치고 있었고 목련꽃은 큰 등불처럼 흔들리며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벚꽃 잎이 공중에 떴다 천천히 가라앉았고 그 뒤로 진달래가 엷게 분홍빛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 옆에 버들가지가, 개나리가 찰랑찰랑 흔들리고 있었다. 온갖 색채가 가로등 불빛 밑에서 안개처럼 뒤섞이고 있었다. 그리고 목련나무 쪽을 다시 보니 돗자리에서 아는 얼굴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시열이 왔어, 월광 언니.” “오 시열이 어서 와. 날씨가 미쳐서 벚꽃이랑 목련이랑 진달래가 같이 피니 이것도 꽤 진풍경이긴 해.” “시열이 어서 오렴.” 월영과 월광과 심현이 인사를 건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월광이 키들키들 웃으며 한쪽 무릎을 세운 양반다리로 앉아 세운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한 손으론 술잔을 내밀고 있었고 그 잔을 심현이 채워주고 있었다. 동풍이 돗자리에 누워 꽃잎을 흔드는 바람을 구경하고 있었고 월영이 어느새 달려와 아소의 손을 잡고 벚나무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꽃잎을 맞아보려는 모양이다. “오빠 술 사왔어?” “애들 마실 음료수까지 추가해서 사 왔다. 넌 나보다 술이 먼저냐?” “아냐 그럴 리가. 애들이 먼저고 그 다음이 술이고 다음이 오빠지. 시열이 어서 와서 앉아!” 가볍게 티격거리는 월광과 휘안도 오늘은 꽤 기분이 좋아보인다. 순식간에 돗자리까지 밀려와서 앉으니 동풍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돌아보니 하늘을 보고 있다. 같이 보란 뜻이지, 저건. 동풍의 옆에서 하늘을 보니 주황빛으로 빛나는 목련꽃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보면 제일 예쁘다.” “그렇네.” 아무 말 없이 하늘만 보고 있어도 어쩐지 많은 말을 한 기분이었다. 나란히 앉아 하늘을 보고 있다 옆에서 주스잔을 내밀어서 주위를 돌아보니 머리에 꽃잎이 붙은 월영과 아소, 서로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휘안과 월광, 진달래를 쓰다듬고 있는 심현, 그리고 주스잔을 내밀고 있는 초로가 보였다. 이래서 사람들은 꽃을 보러 가는구나, 시열은 새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 하나를 배운 기분으로 초로가 내민 잔을 잡았다.
윈디 언니 리퀘, 꽃놀이 하는 T.A 1차 창작을 간만에 하려니 글이 안 나옵니다ㅠㅠ 요 근래 삶이 고달프신 우리 언니를 위해서. 그리고 밤에 꽃구경 가고 싶었는데 못 간 나를 위해서. 꽃은 밤에 보면 더 좋아요 흑흑.
아, 그리고 하루에 리퀘를 두 개 받은 이유. 양다리를 걸칠 땐 두 상대 모두에게 극진하게 해야 나중에 칼침을 안 맞는대요(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