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는 일본어를 안다. 그 사실을 알렐루야가 어떻게 알았냐면, 지금 술기운에 소파에 엎어져 졸고 있는 스메라기의 소파 밑으로 떨어진 손 아래 바닥에 읽다 만 듯, 편 채로 엎어놓은 일본어로 쓰여진 책이 떨어져 있어서이고. 그게 일본어인 건 어떻게 알았냐면 세츠나가 그 책을 펼쳐 읽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안가가 있는 세츠나는 일본어를 안다. 회화가 능숙한 정도는 아니지만, 뉴스를 듣거나 서류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는, 관광이 아닌 목적으로 체류하는 평범한 외국인을 연기할 정도로는 안다. 24세기가 되어서도 아직 자신의 언어를 유지하는 민족은 제법 있었다. 물론 그럴 만한 정치적 문화적 권력이 있을 때 이야기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인간실격?
책을 먼저 주운 것은 알렐루야였다. 한자 정도는 읽을 수 있다. 인혁련 출신이니까. 굳이 소리내서 읽은 것은 제목이 하도 걸작이라서다.
꽃 이름 외우기라도 하는 건지 하로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펠트와 간만의 휴가라고 신이 난 몇 명, 그리고 이꼴 저꼴 보기 싫다고 어느 구석에 틀어박힌 티에리아를 제외한 세 명의 마이스터, 알렐루야, 세츠나, 록온이 그 곳에 있었다. 알렐루야의 목소리를 듣고 다들 소리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뜬금없이 뭔 소리야, 알렐루야.
-아뇨, 그게 아니고 책 제목인데......
록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드물게 폭소했다. 잘 웃기는 해도 저렇게 웃는 사람은 아니다.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록온이 어이없는 표정을 계속 지은 채 알렐루야를 쳐다보았다.
-거 걸작이네. 뭔 책이 그래?
-그, 그러게요.
록온이 과잉반응을 보이자 알렐루야도 불안해졌다. 솔직히 제목이, 좀, 많이, 굉장히, 찔렸다. 인간실격. Human lost. 평범한 사람-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도리 같은 걸 모른다. 희대의 살인마 A(24세, 남성)가 희대의 살인마 B(19세, 남성) 쪽으로 다가와 책을 폈다.
-첫장부터 광고냐......근데 이거 무슨 책이야?
-글쎄요, 저도. 모르는 글자라......
-설마......
록온이 인상을 찌푸리자 알렐루야도 덩달아 인상을 썼다. 그 때 세츠나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단호한 동작으로 첫장을 폈다. 아까 록온이 편 부분과 반대쪽이었다.
-일본어다. 이 쪽부터 읽는다.
-어, 그래.
그리고 세츠나는 책 첫 문장을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생각 없겠지만- 또박또박 읽었다.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책을 읽는 세츠나는 무덤덤했지만 나머지는 어쩐지 머리가 아팠다. 첫대목이 주는 인상이 하도 어마무지해서 쩌억 굳어있다 먼저 해동된 쪽이 록온이었다. 아니, 마음 잡고 착실하게 살아가야 하는 16세 소년 앞에서 더 이상 읽고 싶은 내용이 아니었다. 물론 착실하게 살아가는 애가 이런 데 있으면 안 된다는 건 록온이 알고 알렐루야가 알고 스메라기가 알며 세츠나도 물론, 안다.
-수기?
-글쎄, 모르겠다.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에게 물어봐라.
-자는데?
-응? 아니 안 자.
떠드는 통에 깬 모양이다. 한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한 손으론 얼굴을 문지르며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있던 전술예보사가 일어났다.
-아, 시끄러웠나봐. 미안, 미스 스메라기.
-아냐아냐, 이제 슬슬 일어나서 머리도 좀 정리해야 하고........뭐야, 왜 남이 보는 책을 막 들고 가?
스메라기가 펄쩍 뛰며 세츠나의 손에 있던 책을 뺏았다.
-아, 아뇨 스메라기 씨. 그냥 바닥에 떨어져 있길래 그냥.
알렐루야가 엄청 찔리는 표정으로 변명했다. 스메라기는 책을 한 번 보고 알렐루야와 록온, 세츠나를 한 번 둘러보고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공범들에게 뭔가를 들킨 사람의 모습이었다.
-응, 하긴 제목이 좀 자극적이긴 하지.
-무슨 책이우?
-이거......소설이에요 소설. 그냥 자기가 인간실격이라고 믿는 어떤 사람의 수기 형식으로 된 건데.
-흐음.
록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메라기를 보고 보란 듯 한숨을 쉬었다.
-이런 거 좀 들고 다니지 말라고. 뭐예요 이 누가 봐도 뜨끔한 제목은.
-뜨끔하니 그나마 다행 아냐? 거기서 남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끝장이잖아.
스메라기가 록온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인간실격, 이라는 제목이 유달리 큰 글자로 박혀있는 그 책은 많이 읽은 듯 손때가 묻어있었다.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가 평소에 소설을 읽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전술예보사가 읽어야 할 문서는 그런 게 아니니까. 아마 이 책이, 그녀의 애독서이겠거니.
-좋아하는 책이야. 휴가 나와선 좋아하는 책을 읽어야지.
스메라기가 웃으며 덧붙였다.
-제목 보고 무슨 흉악한 책인가 했잖아요.
록온이 웃었다.
-하긴 좀 찔리죠, 인간실격.
알렐루야도 웃으며 거들었다. 희대의 테러리스트들이 서로 인간실격자로서 동질감을 느끼며 뭉치려는 순간 낮지만 어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뭐가 찔리나.
세츠나가 진지한 얼굴로 세명을 쳐다보고 있었다.
-응? 뭐 이런 거 저런 거 있잖아.
알렐루야가 변명하듯 말하자 세츠나는 확신을 실어 답했다.
-우리는 수치스럽지 않아.
굳이 말하자면 저 표정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신념을 가진 자의 표정이었다. 건담을 믿고 있는 어린 소년은 더 이상 자신이 하는 일에 회의하지 않았다. 수치스러우면 안 되고, 인간실격이어서도 안 된다.
-그래, 지금 하는 일도 부끄럽지 않고 나도 부끄럽지 않아. 다만 이제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에선 확실히 실격처리된 상태라는 거지. 그게 찔리네......세츠나, 나가서 크리스 좀 불러줄래. 이제 슬슬 일해야지.
세츠나는 대답하지 않고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알렐루야는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스메라기 씨랑 록온이 인간실격이 더 실감나지 않으려나, 하고.  그냥 감일 뿐이라 말로 옮기지는 않았다. 아무리 사회성이 부족해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법.
이미 처음부터 실격이었으니 실감나고 말고 할 게 없는 입장인 자신이나 더 어린 나이에 손에 피를 묻힌 티가 나는 세츠나야 더 할 말이 없고. 인간실격, 이라는 게 제대로 감이 오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인간도 아니었는데 뭘. 알렐루야는 씁쓸하게 중얼거렸고 반신은 이번엔 웬일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후로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그 책을 읽는 것을 볼 수 없었지만 알렐루야는 얼마 후 한 잔 하러 들른 스메라기의 침대머리맡에서 그 책을 또 발견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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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좋아하는 데 나이는 상관없죠. 그저 다메정신으로 단결하면 됩니다. 하지만 만 26세에도 애독서라면 참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자이를 삽질대마왕이라 부르며 애증으로 한결같이 핥는 저도 그 짓은 안 합니다.
문제는 어제 커피아이스크림 먹고 뻗어서 골골거리다가 생각난 거라는 거. 뭐죠 저?

수정보고 있습니다. 일 하는 틈틈이 아이디어 까먹기 싫다면서 끄적거리는 인간은 미친 거 맞다고 물론 생각합니다. 그, 그래도 할 일은 한다고요......

그리고 이제 와서 밝히는데 저 문장 책 첫페이지에 나오는 거 아니에요. 사실 진짜 첫문장은 나는 그 남자의 사진을 세 장, 본 적이 있다. 입니다. 거기서 몇 쪽 뒤에 제1의 수기, 부터 그 문장이 나오거든요. 하하하하. 스루합시다 스루.
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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