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번째 덧글 달아주신 분께 리퀘를 받는 건 어떨까 싶네요. 지금까지 423개의 덧글이 달렸습니다. 그 중 백여개는 제가 달았습니다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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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오빠.
벽지를 바르느라 여관방에 놓인 몇 가지 안 되는 집기-옷걸이니 이불장이니 하는 것들을 옮기고 있는 청년을 지나, 도배풀을 쑤어 온 소녀가 뭘 물어볼 생각이었는지 청년을 불렀다.
-오빠 아니다, 아저씨야.
청년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청년의 등 뒤에 있던 소녀가 몸을 돌려 청년의 앞쪽으로 걸어가더니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제법 질기기까지 한 시선에 놀라 청년이 몸을 슬쩍 뒤로 빼자 소녀가 다시 물었다.
-암만 봐도 스물 너댓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왜 아저씨예요?
-나이를 봐서 어떻게 아냐.
내심 제 나이를 정확히 알아맞힌 소녀에게 놀라며 청년이 퉁명스레 대꾸하자 소녀가 웃었다.
-얼굴을 보고 아는 게 아니에요. 연륜을 보고 아는 거지.
-연륜?
청년이 가구를 다 옮기고 도배지를 가져오자 소녀가 종이에 풀을 발랐고, 둘이 종이 양귀퉁이를 잡고 벽지를 벽에 붙이는 동안은 잠깐 말이 없었다. 소녀가 다른 종이에 풀을 바르며 말을 꺼냈다.
-사람이 오래 살면 흔적이 묻어나게 되어 있는데 오빠는 그런 게 없거든요?
-어?
-없다고요. 오빠 나름 이것 저것 고민한 흔적은 있는데 별로 깊이는 없어 보여요.
소녀가 솔을 풀통에 담갔다.
-어린애가 지금 뭐라는 거야?
-일단 벽지부터 잡아요, 풀 말라요.
청년이 반사적으로 종이 귀퉁이를 잡았고 둘은 종이를 아까 붙인 종이 옆에 맞추어 살짝 갖다대었다. 깔끔하게 붙이려고 이리저리 종이를 움직이는데 소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결정타를 날렸다.
-난 조금 나이 먹었다고 세상을 아는 척 하는 사람들이 제일 웃겨요.
벽지를 바르던 청년의 손이 삐끗했고 결국 벽지에 주름이 지고 말았다.
-것봐요. 표정 관리 하나 못하면서 아저씨는 무슨. 오빠로 만족하세요오~.
소녀가 깔깔 웃으면서 벽에 바른 벽지를 살짝 뗐고 청년은 구겨진 벽지를 다시 붙이는 데 안간힘을 쏟느라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날 부실한 잡일꾼 청년은 도배가 끝나고 집기를 정리하며 어떡하면 저 입만 산 꼬맹이를 괴롭혀 줄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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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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