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07년 한 해 동안 좋은 글감, 원고감이 팍팍 떠오르고 직장일도 잘 풀리고 학교 공부도 잘 되고, 보는 공연마다 멋진 배우와 연출과 훌륭한 가사와(혹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와) 좋은 좌석이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모든 게 잘 될 거예요.
연하장은 만들지 못했고 대신 글을 올리겠습니다.
니이따우리집에좀왔다가라 오늘과외가는데 몇시에끝나는데 여덟시반 막 문자를 보내고 형우는 정류장에 설치된 전광판을 살폈다. 305번은 5분 후에 도착한다. 날이 제법 따뜻하긴 해도 겨울은 겨울이라 손이 조금 시려웠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는 순간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표시를 보니 선명한 까만 글자로 적혀있었다. "짐승" 옛말에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라던 말을 형우가 어디서 들은 이후로 신재의 별명은 짐승이었다. 억울하다고 신재가 몇 번 항의를 했으나 형우는 사람 귀찮게 들들 볶는 놈이 들러붙은 걸 보니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며 신재의 항의를 못 들은 걸로 했다. -여보세요. -내다. 니 오늘 과외 어디서 하는데? -동산병원 쪽. -그럼 마치고 와라. -그 시간에? -오면 밥 해 줄게. 좀 들렀다 가라. -누가 들으면 내가 느거 집에서 맨날 뭐 먹고 가는 줄 알겠다. -맞잖아. 맨날 간식 먹고 가잖아. 하여튼 니 오제? -어, 그럼 마치고 문자할게. -알겠다. 이따 보자. 전화를 끊고 형우는 다시 전광판을 살펴보았다. 3분 후에 버스를 타고 가서, 과외를 하고 신재네 자취방에서 밥을 먹고 집에 가자.
형우가 과외를 마치고 다시 버스를 타고 학교 북문 앞에 내리니 아홉시가 넘었다. 정류장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수는 아까 형우가 과외를 하러 갈 때 보다 조금 늘어 있었다. 열 시 반이 넘으면 모인 사람들도 거의 사라지겠지만. 지하철이 학교 앞에 지나가면 좀 좋을까, 모 대학은 몇 년 뒤면 지하철도 다닌다는데. 혼자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신재의 자취방이 코 앞이었다. 대문간에 거먼 그림자가 보였다. -나와 있었네. -어. 늦게 누구 오는 거 주인 집에서 들으면 별로 안 좋아하잖아. 신재가 손을 비비면서 머쓱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대문을 소리나지 않게 살짝 밀며, -들어가자, 춥다. 신재의 자취방엔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방에 들어가서 깔아놓은 요 안에 들어가니 바닥이 뜨끈했다. 형우가 따끈한 방바닥에 손바닥을 붙이고 행복해하고 있는데, 구석에 평소에 못 보던 가방이 하나 나와 있었다. 그러고보니 설이면 이 녀석도 집에 가는구나. 부엌에 가서 뭘 달그락거리고 있는 신재에게 형우가 물었다. -모레 설이잖아. 집에 가나? -어. 살짝 열린 문틈으로 말소리가 들렸다. 뭔가 끓는 소리와 함께. -표는? -예매했지. 가면 3월 되어야 오지 싶다. -왜. -엄마가 동생 공부 좀 봐 주고 가라네. 집에서 집 밥 먹으면서 좀 편하게 있다 가라고. -명재는 몇 학년 올라가는데. -가 이제 고3이잖아. 방문이 열리고 신재가 밥상을 들고 문 안으로 들어왔다. -일단 밥 먹자. 의외로 밥상은 꽤나 충실했다. 직접 끓인 게 분명한 감자국에 조림 같은 밑반찬이 두어 개, 김치며 두부 같은 것도 있었다. 형우는 좀 놀란 눈으로 신재를 쳐다보았다. -이거 니가 다 했나? -국만 끓이고 밑반찬은 사왔다. 두부는 그냥 데우면 되고. -최신재 장하다. 늘 이렇게 좀 먹어 보자. 맨날 카레 아니면 3분 짜장이고 볶음밥이고. 어느 새 숟가락을 들고 국물 맛을 보며 즐거워하면서도 평소 귀찮다는 이유로 부실하게 챙겨 먹던 신재를 타박하는 형우를 슬쩍 노려보며 신재가 짧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니가 돈 주나? -윽. -자자, 밥 먹자, 밥. 밥을 먹는 동안은 둘 다 조용했다. 국물 삼키는 소리, 그릇에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를 빼고는.
-그런데 왜 불렀냐. 밥그릇이 바닥을 보일 즈음 형우가 물었다. -어? 입에 한가득 물고 있는 밥을 억지로 삼키고 신재가 형우를 쳐다봤다. -왜 부르긴. -니 또 쓸 데 없이 내 오라캤나? 형우가 신재를 노려봤다. 심심하다, 외롭다 어쩌구 하는 단어를 직접 쓴 건 아니지만 은근히 말꼬리에 그런 냄새를 피워가며 자기를 불러서 잠시 놀아주고 가자고 마음 먹고 놀러 왔다가 자고 간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외박에 휴가 나온 친구 핑계 대는 것도 하루 이틀 일이고, 친구들은 애인이라도 있어서 밤마다 어딜 가냐고 물어보는데 애인이 있다고 말을 할 수도 없는 게 두 사람의 관계이고, 이래저래 참 사람 손이 많이 가는 놈이 최신재란 놈이었다. -1년만 있으면 우리도 졸업이다. 장난기 없는 목소리에 다시 보니 신재가 숟가락을 놓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졸업하면 사회인이고, 취직이다 뭐다 하다 보면 우리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 나는 내가 니랑 서른 넘어서도 이렇게 지낼 수 있을지 장담을 못 하겠다. 우리한테 확실한게 뭐가 있겠노. 뭐 이번 설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거고, 그러니까 우리끼리라도 명절을 축하해 보자 이거지. 저 놈은 항상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끝을 이야기한다, 천하에 다시 없을 나쁜 놈. 형우는 왜 그런지 심장 근처 어딘가에 뾰족한 뭔가가 닿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 썩을 놈의 새끼는 항상 저 모양이란 말이다. -새끼야, 축하하려거든 좀 그럴싸한 걸로 해라. 형우는 말을 하기에 앞서 표 나지 않게 목을 가다듬었다. 끝이건 뭐건 아직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사이인데 어째서 저런 식으로밖에 이야기를 못 할까. -뭔 말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설이라서 축하하자 이거 아이가. 있어봐라, 내가 가서 맥주라도 좀 사 올게. 우리끼리 한 잔 하자. 신재가 희미하게 웃었다. -자고 가제? -뭘 묻노. 섣달 그믐 하루 전, 시계는 열 시 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야오이의 정도를 걷는 글이 아닙니까, 씬이 없어 그렇지. 설을 맞이해서 쓰던 야오이의 외전을 먼저 써 보았습니다. 정초부터 끈적한 커플처럼 우리도 즐겁게 살자는 의미......갖다 붙이지 말라고요, 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