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저는 이 시가 스메라기에게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밉대요.
그리고 제가 뭘 끄적거린다는 뜻은 업무폭주중이란 뜻입니다. 예, 현실도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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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 바닥이 보이는 걸 좋아한다. 병이 투명해서 예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하지만 빈 술병을 보려면 마셔야 한다. 마시다 보니 어느 새 투명한 유리병에 든 것이건 우주에서 쓰는 특수용기에 든 것이건 알코올이 들어간 액체는 모두 좋아하게 되었다. 왜 이런 걸 입에 달고 사냐는 알렐루야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가 알렐루야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요약하자면 그런 이야기였다.
-에이 뭐에요 스메라기 씨.
알렐루야가 술병을 잡고 키득키득 웃었다. 술병 하나를 사이에 놓고 앉아서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잔을 비운 결과 병은 반 정도 비어있었다. 겉보기에 물만 마신 것 같은 알렐루야는 술이 들어가자 말이 많아져서 스메라기를 붙잡고 왜 술꾼이 되었냐는 시덥잖은 질문을 하며 늘어지고 있었고 겉보기에 분명 술을 마신 티가 나는 스메라기는 의외로 멀쩡하게 앉아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뭐가 웃기니, 이야기하래서 이야기한 건데.
부루퉁한 어조로 대답을 하자 알렐루야가 손을 내저으며 사과했다.
-에에이 시비 거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뭐가 이해가 안 가?
-이야기 내용이요. 그러면 왜 술병 바닥이 비는 걸 좋아해요?
-글쎄? 마시면 머리가 멍해져서?
알렐루야가 키들키들 웃었다.
-술꾼들은 다 이상해요. 말은 많은데 제대로 이야기를 해 주는 법이 없다니까요.
스메라기는 알렐루야를 흥미있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거 재밌는 가설이네. 전술예보사가 이야기를 제대로 안 해 주면 누가 제대로 해 준다는 거야?
-하지만 스메라기 씨, 이건 전술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아.스메라기는 술이 담긴 용기에 입을 댔다.술잔이 말라가니 입 안도 바삭바삭 마르는 것 같다. 갈색 액체가 입안을 적시자 불이 붙는 것 같다. 마셔도 갈증이 가라앉지 않는 액체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신기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을 더 괴롭히는 기억도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철이 안 드는 자신도 있는데 마셔도 갈증이 나는 액체 정도야 흔하지.
-그럼 나도 술꾼이야?
장난기 섞인 질문에 진지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알렐루야가 대답했다.
-어, 근데 스메라기 씨는 다시 생각해 보니까 술꾼 아닌 거 같은데요.
-왜?
-술꾼들은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아!
알겠다, 하면서 알렐루야가 말을 이었다.
-술을 마셔요.
풉, 스메라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술꾼들이 소다수라도 마신다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요. 술을 마실 거리로 여기는 거예요. 알콜중독이니 뭐니 하는 부작용도 그래서 생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마시고 싶어하니까. 그런데 스메라기 씨는 술을 마시지 않아요.
분위기 파악 못 한다는 소리를 크루들 사이에서 듣고 사는 알렐루야이지만 감각 하나는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다. 그 알렐루야가 스메라기를 정면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술에 취한 눈이나마 표정은 진지했다.
-스메라기 씨는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게 아니에요. 술 말고 더 중독성 강하고 뒤끝 없는 게 없으니까 그렇지.
-......
-더 한 게 있으면 할 거잖아요.
-그만해, 알렐루야.
엄한 말투로 알렐루야의 말을 제지하자 알렐루야가 미안해요, 하고 사과했으나 스메라기의 얼굴을 쳐다보는 눈만은 다른 데로 돌리지 않았다.
-그러게 그냥 안 마시면 될텐데. 그 간단한 걸 왜 모르는 거예요.
스메라기는 알렐루야의 눈을 외면했다. 아니, 너는 알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동족을 학살한 날 왜 굳이 나에게 와서 술을 청했니. 넌 나랑 같은 걸 봤잖아. 말이 스메라기의 혀끝까지 올라왔으나 그녀는 억지로 말을 삼키고 목이 메어 물 대신 술을 마셨다. 두 겹 유리 사이 빈 공간에 이지러진 상이 맺혔다. 스메라기는 그게 누구의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되고 싶어 하던 나는 분명히 아니다, 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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