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묘지와 같았다. 묘비도 꽃도 없는.
아니, 꽃이라면 있다. 파편의 잔해를 뒤덮은 무성한, 들짐승의 털처럼 길게 자라 아무렇게나 몸을 뻗고 있는 풀 사이사이에 보이는 것은 작고 희미한, 색도 향도 바랜 듯한 작은 꽃이었다. 마치 묘비 앞에서 조용히 시들어 부서지는 꽃잎처럼 얇고 바삭거리는.
꽃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청년을 맞이하듯.
성묘할 곳을 잘못 고른 것일까. 파편 더미 위에 선 청년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이 곳 이외에 우리들에게 어울리는 묘는 없어. 미간에 힘을 주고 청년은 마치 자기 자신을 타이르듯 아무도 들을 사람 없는 허공에 말을 던졌다.
청년이 발을 옮기자 발 밑의 파편이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덜그럭거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기우뚱거리며 흔들리던 파편 무더기가 기어코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조용하던 공간에 파문이 일었다. 가뜩이나 울퉁불퉁 불안한 지반에다 불안정한 걸음 탓에 균형을 잡지 못해 조금 크게 발을 내딛자 쾅, 하고 내려앉은 금속조각이 흙먼지를 일으켰다. 몇 년을 조용히 버티고 있는 동안 그 위에 쌓인 흙먼지가 떨어져 부옇게 작은 폭풍을 일으키며 부풀어 올랐다. 소란통에 그 속에서 살던 쥐가 마치 조용한 생활을 방해받은 것을 항의하듯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다.
6, 7여년간 누구도 접근하지 않던 공간에 비로소 소리가 울렸다. 이걸 노크라고 봐도 좋을까. 무덤을 두드리며 인사를 하는 것과 같다고. 지금의 자신은 너무 감상적이지 않은가 하고 청년은 생각했다.
무덤을 손질할 필요도 없었다. 그 곳은 이미 작은 숲의 일부였으니까. 사실 무덤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시신이 묻힌 곳은 따로 있으니까. 하지만 거기 까지 가서 묘비 앞에서 손을 모을 필요도, 죽은 이들에게 향이니 기도니 하는 것들을 바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무덤도 아닌 그 곳에서 계속 걷고 보았다. 한 때 프톨레마이오스라 불렸던 전함이 반토막난 채 기체 이곳 저곳이 부서져나가 작은 파편더미를 이루고 있는 곳은 넓었다. 기계를 이루던 부품들이 너절하게 떨어져나갔다. GN 드라이브 같은 것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남은 것은 조각뿐. 게다가 톨레미가 떨어져 부서지며 떨어져나간 파편조각이 튀어나가면서 숲도 제법 많이 상처를 입었다. 허리가 꺾인 나무가 그 속을 빈약한 햇빛에 노출시켜 하얗게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어 이렇게 된 것인지는 다 알고 있다. 톨레미 밑에는 케루딤이 짓눌려 있을 것이고 산 하나를 넘으면 세라비가 풍화되듯 낡아가고 있다. 더 멀리엔 아리오스와 GN 아처가. 물론 껍데기 뿐이고, 그나마도 이곳 저곳이 떨어져나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것이 한 때 건담이었다고 생각 못 하겠지만.
북반구 어느 험한 산은 골짜기 골짜기가 거대한 무덤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 격전지에서 목숨을 잃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주에서 죽은 이들도 있었고 살아서 우주에, 지구에서 지금도 자기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이들도 있다. 이곳에서 죽은 이도 있고 다른 전장에서 죽은 이도 있다. 청년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모든 죽음의 순간을 떠올렸다.
7년 전, 셀레스티얼 빙이라는 조직 그 자체가 죽었다고 봐야 옳으리라. 자신들이 낳은 세계의 부조리와 함께 죽었다. 몇 년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로 죽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죽었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셀레스티얼 빙이 죽으면서 그 모든 것들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세상이 조금 더 살 만한 곳이 되기를 바랐다. 죽어서 속죄한다는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저 죽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이었을 뿐. 청년은 성격 좋은 조타수를 떠올렸고 차례차례 죽은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특이한 반쪽을 가졌던 동료와 그의 난폭한 반신과 역시 두 얼굴을 가진, 동료의 반려를, 사실은 아주 약해서 도망치기 바빴던 전술예보관을, 자신과 언젠가 편지를 써서 보냈던 소녀를, 이노베이터였으나 누구보다 사람다웠던 동료를, 좋아하는 소녀 때문에 전장에 뛰어들었던 이웃집 소년을, 카탈론의 테러리스트였지 셀레스티얼 빙은 아니었던, 죽은 이와 꼭 닮았지만 전혀 달랐던 반쪽을.
청년은 왼손으로 파편 새로 빠져나온 빛바랜 녹색 조각을 주웠다. 뒤나메스와 같은 색 조각이 가장 먼저 죽은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록온 스트라토스.
아직 어렸던 시절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어려서 저지른 실수는 되돌릴 수 없으며 세상에 신 같은 건 없다고 좌절했을 때 나타난 신은 자신이 죽어라 부정하던 것이었다. 결국 낳아준 부모와 소년병으로 키워준 아버지와 다시 살게 해 준 아버지를 모두 잃었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동료이고 형제이며 평생 넘을 수 없는 벽 같았으며 어머니보다 어떤 면에서 자애로웠던 남자만큼은 남아있었다. 그가 세츠나에게 너만은 변하라고 말해주었다. 과거는 수정할 수 없지만, 꼭 너만은 변하라고.
피투성이 과거를 헤쳐 나오라고.
그 날부터 7년간 자신은 굉장히 많이 자랐다. 그리고 혼자 살아남았다. 세츠나 F 세이에이도 아닌, 소란 이브라힘도 아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이 되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잔다. 가끔 꿈을 꾸면 그 전장이 나온다. 더블오가 부서지던 장면에서 언제나 깨고 만다. 아무도 구하지 못했고 세계의 왜곡을 찾아내지도 못했다. 자신은 건담도 아니고, 세상은 그렇게 바꾸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아직 그 과거를 헤쳐 나오지도 못했다.
그래도 평범하게 살고 있다. 이웃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고 혼자 밥도 해 먹고. 얼마 전엔 터번을 두르고 외출했다. 옛날에 터번은 군대에 속하지 않은 자라는 뜻에서 쓰는 풍습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싸움을 하지 않는 자신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여전히 왜곡되어 있지만 그래도, 셀레스티얼 빙 같은 것이 없는 조용한 세계에서.
“록온.”
허공에 이름을 불렀다.
“내 생일이다. 스물아홉이 되었지.”
아무도 듣지 않는다. 하지만 듣는다면 먼저 간 록온도 다른 동료들도 모두 축하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걸 원한 건 아니었다. 물론 굳이 생일에 성묘를 온 것은, 그들이 보고싶어서긴 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자들이다.
“사후 세계가 어떻냐거나 다들 잘 있냐는 건 아니니 걱정 마라.”
어쩐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분명 살아있었다면 자신을 많이 걱정했으리라. 생전 사사건건 오지랖 넓게 간섭하고 들던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그 청년들보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 곧 서른이 되고, 아마 별 일 없으면 자연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은 이들이 간절히 바랐던 세상이었으나 자기가 그 세상의 일부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것이 당혹스럽다.
“축하인사를 받을 자격도 걱정을 들을 자격도 없다. 다만 하나 확인해보고 싶어서 여기에 왔다.”
아무도 답하지 않는다. 조용하다. 답해줄 사람은 없다. 그걸 알면서도 말을 꺼냈다.
“록온.”
“나는 그 날 네가 바라던 그 사람이 되었나?”
정적이 흐르는 것 같았다. 물론 착각이다. 알고 있다.
"나는 제대로 변하지 못했어."
오른팔이 아팠다. 없는 팔은 당연히 아플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청년은 있지도 않은 팔을 감싸쥐고 허공을 우러러보았다. 싸움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세계에서.
어쩐지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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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KIA의 HAPPY BIRTHDAY TO ME의 한 구절을 듣다가 마지막 대목이 생각났습니다.
時を重ねる度にこの日を喜んだ母の氣持ちを思う
今の私はあの日願ったママの子ですか…?
새벽에 쓴 거라서 과하게 낭만적입니다. 다시는 새벽에 글 안 써요 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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