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이 님 리퀘입니다. 술자리에서 삼자대면- 스메라기, 알렐루야, 록온
이렇게 말씀해주셨는데 셋이 붙여놓으니까 자기 방어들이 쩔어서 입을 안 떼는 통에 뭘 시키질 못해서 편법을 좀 썼습니다.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일단은 질 낮으나마 개그를 하고 싶어서 시도해 봤습니다. 수위는...........전혀 안 높아서 죄송합니다.
좋은 걸 들고 왔다며 록온이 꺼낸 것은 초록색 투명한 액체였다.
-어머, 압생트네?
물감을 푼 듯 둔탁한 빛이 나는 액체를 보고 알렐루야가 이게 뭔지 고민하고 있는 동안 스메라기가 반색했다.
-압생트?
-그래, 이 술 이름이야. 좋은 걸 가져왔네, 록온. 요즘 이런 걸 만드는 데가 다 있어?
처음 듣는 이름을 한 번 더 발음해 보는 청년을 향해 술병을 든 청년이 밝게 웃었다.
-내가 좀 유능하죠. 이거 전통대로 빚은 술이라서 더 각별하다더라고요. 그럼 셋이서 마셔 볼까요? 좋은 건 나눠야 한다는데.
알렐루야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 셋이 마실 거구나. 록온, 스메라기 씨. 또 누구지? 랏세 씨는 물자 보급 때문에 톨레미를 비웠고 이안 씨는 새 기기 시착 때문에 지상에서 할 일이 있다고 했는데. 그럼 한 명은......아. 생각을 멈추고 눈 앞의 얼굴들을 쳐다보니 록온과 스메라기가 알렐루야를 보고 씩 웃고 있었다.
-압생트 매직-
녹색 액체는 색깔처럼 풀과 박하향이 났다. 입안에 넣자 목이 아릴 만큼 독하고 썼다. 한 입 물고 인상을 쓰자 각설탕을 한 손에 들고 물을 찾느라 냉장고를 뒤지던 록온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같다.
-어, 알렐루야, 그거 그렇게 마시는 거 아닌데?
-어, 아니에요?
-설탕이랑 물 넣고 희석시켜야 되는데......야, 괜찮냐?
-.......이거 물보다 알코올이 더 많은 거 아녜요?
-응? 아마 그럴 걸.
머리가 핑 도는 게 보통 술이 아닌 모양이다. 모든 술을 물 마시듯 마시는 스메라기마저 얌전하다. 록온은 웃으며 잔을 채우고 있다. 스푼에 각설탕을 넣네 마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우주에서 그렇게 술 마실 수 있는 건가요. 애초에 특수용기에 넣고 빨대로 빨아마시는 거잖아요 그런데 술 빨대로 마시면 더 취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록온도 스메라기도 어쩐지 이상하다. 왜 저 쪽은 별로 마시는 것 같지 않는데 내 잔은 자꾸자꾸 비는 걸까. 록온이 한 잔 따르고 스메라기 씨가 한 잔 따르고. 이상하게 내가 여러분들 두 배를 마시는 거 같은데 이거 내 착각 아니죠? 지금 내가 잔 막 비우는 거 아니죠?
자꾸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자 록온과 스메라기가 줄어들었다 커졌다 하고 있었다. 취했구나.
눈을 뜨자 먼 우주였고 동방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응? 왜 타오르지?
-깼나. 알렐루야 합티즘.
차가운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티에리아의 목소리다. 분명히 술 먹고 취하는 추태를 보이고 숙취로 다음 날 임무에 지장을 주며 혈중알콜농도를 높였으니 건담마이스터의 자세가 아니라고 야단을 칠 텐데 이를 어쩌면 좋아.
야단 맞을 각오를 하고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앉아라. 내가 건담 마이스터를 위한 올바른 기호품을 준비했다. 이거라면 술 따위 마시지 않아도 좋을 거야.
앉으라니 어디에,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마치 갓 만든 양 하얗고 눈부신 의자와 탁자가 눈 앞에 떠 있었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의자가 몸에 맞춘 듯 편안해졌다. 신기하네, 하고 뒤를 돌아보니 티에리아가 손에 쟁반을 받쳐 들고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가르송 복장을 각을 세워 입고.
-티, 티에리아, 그건?
-바른 가르송이라면 앞치마 매듭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할 터.
먼지는 커녕 얼굴 비추는 거울 대신으로 써도 될 정도로 윤이 나게 닦은 구두에 까만 바지에 조끼에, 이야말로 웨이터의 표본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전시해도 좋을 정도로 칼 같이 차려입은 티에리아가 손 데면 베일 듯 각을 잡아 다린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내가 직접 구웠다. 먹어보도록.
근엄한 얼굴로 말하며 쟁반을 내려놓자 하얀 접시 위에 쿠키가 반듯하게 두 줄로 놓여있었다.
-와, 티에리아 별 걸 다 할 줄 아는구나.
-닥쳐라.
말하는 건 여전하구나. 알렐루야는 웃으며 쿠키를 집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건 쿠키라고 부를 수 없는 물건이다. 왜 쿠키가 푸르뎅뎅한 빛을 내고 있나요. 자체발광 쿠키?
-티에리아, 쿠키가 파란데다 빛까지 나. 이거 형광등이야?
티에리아는 근엄하게 답했다.
-그야 GN 입자를 반죽해서 구웠으니 당연하지 않은......어딜 가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렐루야는 번개 같은 속도로 일어나서 붉게 타오르는 동방을 향해 질주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 전에 GN 입자가 반죽이 되는 거였나 하는 생각 같은 건 그 때는 들지도 않았다. 오로지 저것을 먹었다간 인간으로서의 생활이 끝장날 것이라는 생각 밖에는.
등 뒤에선 티에리아가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먹어라! 건담 마이스터가 이 정도도 못 먹어서야 자격이 없다!
죽어도 먹고 싶지 않다. 알렐루야는 기를 쓰고 외쳤다.
-티에리아! 사람으로서 할 일이 있고 안 할 일이 있어!
아차. 등 뒤의 고함이 살기로 바뀐 듯 하다. 티에리아 쪽에서 어째 고오오오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괜히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말 잘못 했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알렐루야 합티즘, 죽어! 건담 마이스터 주제에 뭐가 어째? 죽어 마땅하다!!
.......티에리아, 너 버체도 아닌데 어디서 지금 캐넌포를 쏘고 있는 거야? 캐넌포를 피해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는 동안 등 뒤에서 그 쿠키가 날아오는 것 같았다. 캐넌포보다 어떤 의미로는 그게 더 무섭다.
-세츠나!
어느새 붉게 타오르던 뭔가가 없어지고 먼 별을 배경으로 아령운동을 하고 있는 세츠나가 보였다. 점점 커지는 것을 보니 자신이 그 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알렐루야.
무표정하던 세츠나가 자신을 보고 미미하나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 왔다.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세츠나 군 지금 뭐라셨나요? 제가 뭘 잘못 들은 건가요, 아니면 실언이라도 하셨나요?
-네게 할 말이 있다.
세츠나는 아령을 놓고 주머니를 뒤졌다. 할 말이 있다면 들어야지. 가만히 세츠나를 보고 있자니 한참 뭘 뒤지던 세츠나가 알렐루야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 보라고?
-손 내라.
거역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순순히 손을 내밀자 손에 뭔가 희고 붉고 푸르고 둥근 것을 떨어뜨려주었다.
-뭐야, 이거?
-조심해라, 깨지면 안 된다!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는 알렐루야를 세츠나가 급히 제지했다.
-부화할 때 까지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귀한 건담의 알이야.
-아 그렇구나, 조심해야겠네......뭐?
병아리 부화한다는 소리 하듯 건담이 알을 깨고 나온다는 소리를 하다니 세츠나 너 드디어 어디가 잘못 되었구나, 그러게 내가 건담이니 그런 소리 하지 말지.
-건담 알 처음 보나.
세츠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건담이 알에서 나오는 거였어?
멍청하기 그지 없는 질문이었는데도 세츠나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당연하다. 뒤나메스도 버체도 너의 퀴리오스도 모두 알에서 나왔지.
세츠나의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을 보고 있자면 저 말도 모두 믿어줘야 할 것 같다.
-그럼 이 알은 뭐야?
-엑시아의 뒤를 이을 건담이다.
그러고보니 색깔이 꼭 엑시아 같기는 하다. 알렐루야는 알을 살그머니 만져보았다. 정말 건담 같기도 하고......그러나 차마 못 물어보겠다. 대체 건담 알이란 건 어디서 떨어지는 거냐! 세츠나는 알렐루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즉각 대답했다.
-나와 오건담과 엑시아가 있다. 나머지는 기합으로 어떻게든 하면 돼.
기하압? 그게 기합 넣으면 되는 일인가요?
-그런데 왜 이 알을 나한테 줘? 네 건담이잖아.
-그야 건담이 부화하려면 근성과 체력과 근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뭐하고 뭐하고 뭐라고?
-근성! 체력! 근육! 이 삼위일체가 없으면 안 되는 거다.
알렐루야는 알을 세츠나에게 던져주고 알을 받으려고 세츠나가 움직이는 동안 빙글 반 바퀴 돌아 또 다시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안녕, 세츠나. 앞으로 너랑 길게 이야기 안 할 거야!
눈치 없다고 해도 좋고 나쁜 형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여기선 도망가야 한다.
-어딜 가나, 알렐루야 합티즘. 어서 내 건담을 부화시켜라.
목이 졸렸다. 안 돌아봐도 세츠나가 자기 목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을 알겠다.
-네 근육이 아니면 안 돼! 근육 없이 부화할 수 없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는데 세츠나의 눈이 형형히 빛나는 것이 보였다. 역시 세츠나.....가 아니고 어서 도망가지 않으면!
-세츠나! 저기 건담이!
뭣이? 옆을 보는 동안 얼른 세츠나의 손을 풀고 미친 듯 달렸다. 저런 고전적인 방법에 속는구나 하고 안도한 것도 잠시, 세츠나는 정말 GN 입자라도 뿜어낼 것 같은 얼굴로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어서 도망가지 않으면 정말 큰일을 당하고 말 거야. 정신없이 달리던 중 발 아래가 푹 꺼지고, 어딘가로 떨어졌다. 정말 추락감이 느껴지는 걸 보니 꿈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등이 욱신거리는 걸 보니 등부터 떨어졌나본데 이상하게 축축했다.
-어머 알렐루야, 어디 갔다 와?
눈을 뜨자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소매를 둥둥 걷고 머리에 어디서 났는지 남성용 넥타이를 척 메고 한 손엔 술잔을 들고 기분 좋게 한 잔 하고 있었다. 스메라기 씨, 많이 마셨어요, 하는 순간 등 아래에서 물컹물컹한 뭔가가 터지는 느낌이 나서 손으로 쓸어 보니 보라색 즙이 묻어 있었다.
-포도 아니에요?
-그럼 포도 없이 포도주 담가?
스메라기는 알렐루야가 등으로 뭉갠 포도를 한 번 쳐다보고 알렐루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결에 손을 잡고 일어나 등 뒤를 보니 큰 나무통안에 포도가 잔뜩 담겨 있었다.
-포도주는 발로 밟아야 되는 거야. 그건 저기 예쁜 아가씨들이 하고 있으니까 됐고~
에? 크리스와 펠트가 맨발로, 손을 맞잡고 포도를 밟으면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펠트와 뭐가 좋은지 아하하, 펠트 이거 정말 재밌다~ 하며 빙글빙글 돌고 있는 크리스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 몇은 들어갈 큰 나무통에서 포도를 밟고 있는 걸 보자니 안 마셔도 취하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 공간이었다. 톨레미 안에 왜 이런 게 있을까.
-스메라기 씨, 이거 다 뭐예요?
어이 없는 풍경을 보고 알렐루야가 전술예보관에게 질문하자 무려 전술예보관 되시는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 여사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몰랐니? 우리 양조장 차렸어.
-네? 왜 우주 한복판에 양조장이 있어요?
-사실 요새 좀 적자라서. 건담 한 기에 돈이 얼마니. 그래서 자체 양조장 차려서 술값은 벌려고.
이건 술 값 버는 정도가 아니고 팔아도 되겠는데요? 옆을 보니 리히티가 울면서 큰 나무통에 달린 밸브를 열고 유리병에 술을 붓고 있었다. 혼자 중얼거리는데 나는 어차피 마시지도 못 할 거......라고 하는 듯 했다. 무슨 소린지. 그 옆을 보니 랏세가 장작을 패고 있었다.
-어, 랏세 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보면 모르냐. 장작 패잖아. 토탄이 제일 좋다고 그러는데 그런 걸 어디서 구해. 지구도 아닌데.
-뭔 토탄요?
-록온이 그러는데 위스키 증류에 필수래.
.......록온요? 위스키? 그러고 보니 저기 저건 포도주가 아니잖아. 곡식으로 빚은 술 특유의쌉쌀한 냄새가 나는 노르스름한 술이 술통 안에 하나가득이었다. 록온이 증류기를 붙잡고 뭔가 하는 것이 보였다.
-로, 록온. 뭐 해요?
가뜩이나 막일꾼 같아 보이는 복장이라며 톨레미 여승무원들이 뭐라고 하는 걸 듣기는 했지만 그 말이 이렇게 어울릴 줄이야. 완전히 머슴에 가까운 몰골을 한 록온이 껄껄 웃었다.
-아. 이거? 위스키 빚을 거다. 사실 뭐니뭐니해도 몰트 위스키가 최고지! 스카치니 뭐니 해 봐야 아일랜드 위스키를 따라갈 술은 없거든. 이름부터 생명의 물이잖아.
록온이 유쾌하게 웃었다.
-잘 숙성되면 우리 한 잔 하자. 어떠냐!
-위스키는 진리! 위스키는 진리!
하로가 폴짝폴짝 뛰면서 묘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너 알코올 섭취 못하잖아. 그런 거 어디서 배웠니. 한숨을 쉬며 하로를 쳐다보고 있자니 록온이 알렐루야의 어깨를 툭 쳤다.
-야, 힘내서 술통 좀 날라 봐. 위스키랑 브랜디는 잘 저장해야 해.
어느새 눈앞에 술통이 수십 개씩 쌓이기 시작했다. 가로로 누워있는 술통이 알렐루야를 향해 굴러왔다. 이건 꿈일 거야. 다 꿈이어야 해. GN입자 쿠키도 건담알도 양조장도 다 꿈일 거야. 당연히 꿈이겠지. 설마 알에서 부화하는 건담이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떠 보았지만 오히려 술통이 더 가까워졌다. 꿈인 줄 알면서도 뒤로 돌아서 뛰어야 했지만 통이 구르는 드르륵 드르륵 하는 소리가 더 커져갔다. 진정하자, 알렐루야 합티즘. 기다리다 보면 할렐루야가 나와서 날 야단칠 거야. ......어, 할렐루야?
알렐루야는 그제서야 지금까지 계속되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할렐루야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 숨어버린 것도 아닌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할렐루야, 대체 어디에 있어? 아무리 불러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 보니 어두운 공간에 혼자 떠 있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느낌이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옆에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할렐루야의 느낌이 완전히 사라져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시커멓게 죽어버린 듯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입 밖으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할렐루야, 대답해. 할렐루야!
네 폭력성도 난폭성도 모두 인정할게. 앞으로 네가 하는 일에서 눈을 돌리지 않을게. 네가 하는 말을 인정할게. 내가 잘못했어. 너 없으면 안 돼.
-할렐루야......
빌어도 빌어도 자신의 반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없기를 바랐지만 없어지기를 바란 건 아니었는데.
그제야 자신이 할렐루야가 없기를 은밀히 바랐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없었으면’과 ‘없어지기를’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건 할렐루야 너도 잘 알잖아.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잖아? 할렐루야. 너도 내가 무슨 마음이었는지 알잖아.
-대답좀 해 봐!
사실은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미안해. 알렐루야는 어린애처럼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눈물을 닦는, 소용 없는 짓을 했다. 이미 눈물이 볼을 타고 턱으로 내려와 발치에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으니까. 떨어진 눈물이 고이더니 웅덩이가 되고 웅덩이가 커져서 발치를 덮고 몸을 삼켜 발부터 눈물 늪으로 쑤욱 빨려들어갔으나 저항할 힘도 나지 않았다.
-알렐루야?
웅덩이에 코끝이 잠긴 순간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 록온?
벌떡 일어나며 짚은 손 아래에 익숙한 침대 스프링의 감촉이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공간이었다. 톨레미 내 개인실은 다 비슷한 구조니까. 다른 사람의 방인 듯 했고 방 주인은 침대 머리맡에서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악몽을 꿨길래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러면서 소리를 질러?
-......아니에요.
꿈에서 깼구나,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누가 그 독주를 그렇게 퍼마시래. 향을 즐기라고 가져온 걸 맥주 들이붓듯 하면 어떡하냐.
-아, 죄송합니다.
-됐네, 다음부턴 그러지 마라.
록온은 어이없다는 듯, 한편으로는 조금 안도했다는 듯 피식피식 웃었다.
-그럼 이까지 날 데려온 거예요?
-데려오긴. 네 발로 이까지 걸어왔어.
-제가요?
무슨 어이없는 짓을 한 건가 싶었다. 암만 취했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솔직해지냐, 나는. 록온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얌전하게 따라와서 아, 그래도 아직 덜 취했나 했는데 들어오자마자 내 이름 부르면서 훌쩍훌쩍 울더라? 그러더니 쓰러져서 잠들었어.
-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시는 그렇게 마시지 않을 테다, 절대로 이성이 끊어질 때 까지 안 마신다, 하고 다짐하고 있는데 록온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게다가 너 아까 이상한 말도 했는데.
-예?
록온이 쿡쿡 소리내어 웃었다. 눈꼬리가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사람도 아까 나랑 같이 마셨잖아. 어느 새 장갑 안 낀 맨손이 목에 휘감겼다. 아찔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뭔가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로, 록온?
고개를 기울이자 목에 감긴 손이 뺨으로 올라왔다. 손가락이 뺨을 살짝 쓸자 한기 같은 것이 밀려왔다. 그러나 오히려 더웠다. 왜 이럴까.
-왜. 불렀어?
손가락이 뺨을 느릿하게 쓰다듬자 손가락이 지나간 부분이 간지러웠다 .엄지손가락 끝이 알렐루야의 입술을 훑고 입술 안쪽의 축축하고 말랑한 살을 도톰한 살이 쓸어가자 전기가 오른 듯, 묘한 느낌이 몸 한구석에서 퍼져갔다.
-불렀으면 말을 해.
입술에 얹힌 손가락이 간지러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러면 안 돼요. 누가 봐도 문제고......
기껏 입을 떼고 말을 하자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그게 무서워?
-네?
-아니아니, 알렐루야. 솔직히 이야기하자. 이건 네가 원하는 거잖아. 난 네가 바라는 걸 줄 수 있고.
-록온.
-그럼 뭐, 아깐 거짓말이었냐?
록온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제가 뭐라고 했나요.
-기억 안 나? 안 나는 척 하는 거야?
록온은 웃으며 알렐루야의 이마에 이마를 대고 눈으로 웃었다. 록온의 눈을 쳐다보고 있자니 기억이 밀려왔다.
-저.....당신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말랑한 혀가 잇몸 안쪽을 쓸었다.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각에 머리가 멍해졌다. 싫으냐고 하면 절대 그런 건 아니었고, 좋다고 말하기엔 어색하고, 눈을 감고 있자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눈으로 보고 싶었고, 그러자고 눈을 뜨려니 민망하고. 그리고 대체 입술이랑 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뭐가 뭔지 모를 지경이 되어 멍하게 서 있자니 입술이 떨어졌다.
-야, 너 정말 매너없다.
입이 떨어지자 눈 앞엔 누구의 타액인지 모를 것으로 젖은 입술이 있었고 멍하니 그 붉은 입술을 도톰한 혀가 훑고 지나가는 걸 보고 있자니 록온이 피식 웃었다.
-예? 예?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알렐루야의 어깨를 앞에 선 록온이 가볍게 밀자 알렐루야는 그대로 침대에 밀려 넘어졌다.
-됐어. 일단 가만 있어 봐.
-예? 어? 어? 록온, 어, 어?
-에이, 기분이다. 오늘 이 형님이 A부터 Z까지 가르쳐 주마.
록온의 손이 허리 아래로 내려왔다. 어, 이러면 안 되지는 않지만.......허리에서 발끝까지 아까 그 전기가 오르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고 그냥 감각에 충실한 게 좋다는 결론이 나오려는 순간.
-압생트는 예술가들이 마시던 술이라죠?
-그렇죠? 이걸 마시면 헛것도 보여서 예술가들이 영감을 떠올리려고 마셨다나 어쩐다나. 잠깐, 그래서 금지된 술 아니었나...... 록온, 이거 어떻게 구한 거예요?
-우리가 그런 이야기 하면 되게 웃긴 거 알죠?
희미하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스메라기와 록온이라는 걸 깨닫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어? 알렐루야. 깼네?
눈을 뜨자 아까 압생트 병을 본 그곳이었다.
-로, 록온. 어떻게 된 거예요?
-응? 너 졸길래 일어나면 방에 보내기로 하고 정리하고 있었는데 일찍 깼네?
-제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나요?
-10분 안 됐지 아마?
전부 꿈이라서 다행이다 하며 한숨을 쉬었다. 딱 하나 아쉽긴 했지만 설마 그럴 리도 없고. 그런데 무슨 꿈이었지? 뭐가 아쉬웠던 것 같고 굉장히 어이가 없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쩐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참 다행이다 싶었다. 기억하면 굉장히 부끄럽고 어이없는 꿈이라도 꾼 걸까.
그러나저러나 술이 무의식을 갖고 놀 줄이야. 분명 할렐루야가 머릿속에서 한숨을 쉬고 있겠지. 한 손으로 머리를 짚고 한 손으로 술병을 얼굴높이까지 들고 아직 제법 많은 양이 남아있는 작은 술병을 노려보자 병에 할렐루야의 얼굴이 비쳤다. 어쩐지 굉장히 반가워 할렐루야, 하고 부르자 이 등신새끼, 하는 상냥하기 그지 없는 답이 돌아왔다.
압생트는 환각 작용이 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여러모로 안 좋아서 금지된 술이었다던가요.
한국에선 못 먹는답니다. 요즘은 현지에서도 40도 정도로 만든단 이야기를 들었어요. 70도 짜리를 40도로 만들다니 이건 소주 도수가 20도 이하인 거랑 똑같은 거 아냐 하고 분개했습니다...... 네, 그저 제가 저걸 마시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쓰다 보니까 제가 술 되게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잘 마시지도 못하고. 그저 꼭 아일랜드 위스키를 먹어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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