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시작인데, 앞으로는 크리스틴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될 일은 없습니다. (끝을 낸다면 에필로그만은 미겔의 시점에서 한 번 진행하고 싶지만.)이 네 사람이 작은 능력으로 악몽을 대신 꿔 준다던가 (미겔의 능력에 대해선 수정을 좀 할 참입니다.) 없어진 물건을 찾아준다던가 하는 소소한 일상을 그린 이야기가 될 예정입니다만.
내 이야기는 작년 9월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막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이었고 영문학 강의를 하나 신청해 두었다. 사실 강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요한 건 강의 이름이 아니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미리 읽어 본 강의자료에 적힌 이름은 MIguel J. M. Valelin이라는, 어째 스페인 사람 냄새가 나는 이름이었다. 스페인계 내지는 히스패닉이겠거니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스페인 사람은 어릴 때 보고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처음 영국에 왔을 때, 옆집에 스페인 사람이 살았는데 처음 본 스페인 아이들은 키도 작은 편이고 얼굴도 머리색도 검어 어렸던 나는 저 아이들은 ‘영국 사람’이 아닌가보다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영어로 자기 의견 표시하는 것도 힘들던 나보다 훨씬 유창한 영어를 사용했고 그렇게 나의 편견은 하나씩 하나씩 박살이 났다. 다 똑같아 보이던 그들의 얼굴을 구분하고, 악센트에서 그들의 출신을 구분하게 되며 나는 어느새 나이를 먹고 영국인이 되어갔다. 나는 그들을 관찰하며 나의 정체성을 쌓아온 셈이다. 나이들어 처음 만나는 만나는 스페인 사람은 어떤 느낌일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학기가 시작되었고, 영문학 강의 첫 시간이었다. 강의실에 도착하니 아직 수업은 시작하지 않았지만 나와 같은 신입생인 듯한 어설픈 아이들이 의자에 앉아 소곤거리고 있었다. 한 명은 어찌나 어설프던지, 세상에 단정하게 검은 수트를 입고는 교수용 의자에 앉아서 창 밖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그 녀석을 보고 피식 웃었는데, 갑자기 그 녀석이 고개를 돌리고 나를 보더니 씨익 웃었다. 씨익이라고 해 봐야 입매만 살짝 위로 들리는 정도였지만. 아무튼 그 녀석 참, 부끄러운 줄 알긴 아나보다 하고 피식 웃었는데 그 녀석이 벌떡 일어나더니 교단으로 걸어가는 거다. “그만 출입문을 닫아 주십시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조교였나? 어째 신입생 치곤 나이가 들어 보이더라니, 하고 있는데 그 녀석은 또박또박, 사투리 하나 섞이지 않은 정확한 발음으로 이어 말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과 한 학기 동안 수업을 하게 된 미겔 하비에르 마르케스 발레린입니다.” 교수의자에 앉아 있다고 그가 교수일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영국사람은 모두 금발벽안이라 믿은 것도 편견이듯이. 하지만 이름이 스페인식인데 스페인 사람다운 외모를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편견일까? 척 봐도 저 얼굴이 슬라브계면 슬라브계지 어디가 스페인계란 말인가. 금발에 팔다리는 길지, 눈은 파랗지, 상식과 편견은 잘못 썰어놓은 당근 같은 것이다. 어디가 이 쪽이고 어디가 저 쪽인지 모르게 딱 붙어 있어서 나누기 애매한. 교실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난감한 듯 눈썹을 살짝 위로 치켜올렸다. “미겔 마르케스라고 부르면 됩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스페인계이고, 세상엔 상식으로 밀어붙이기 애매한 일도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고 수업을 시작합시다. 물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영문학에 대한 상식이 이번 수업에선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만…….” 그러고보니 러시아 사람 성 같기도 하네, 도대체 뭐 저렇게 이름이랑 안 어울리는 얼굴이 다 있담. 뒷자리에서 그런 대화가 들렸다. 스페인식 이름을 가진 금발벽안의 남자. 나는 이 젊은 강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학기 중간의 일이다. 과제를 받고, 상담을 하기 위해 미겔 마르케스를 만나 상담을 했다. “<영문학에 대한 편견과 진실>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쓰겠다고……. 어디 초안을 좀 보죠.” 그는 내 초안을 읽고 평을 하기 시작했다. 반 학기 동안 느낀 것이지만 이 사람은 스페인계 주제에 표정도 매우 부족했다. “제목에 비해 접근법이 지나치게 제한적이고 참고한 자료도 마찬가지 아닌가. 특정 분야의 책을 인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 분야는 이럴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어서야 제목이 울겠죠.” 많이 분했다. 나 나름대로 열심히 생각했는데 하필 가장 싫어하는 강사가 나의 과제에 대해 길게 지적을 늘어놓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아무리 대화주의적인 접근법이라고 하나 다른 분석방식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요. 한 쪽을 비판할 땐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하는 게 좋아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지적에 어쩌다가 내가 폭발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꼭 선생님 같은데요.” “나?” “네. 성함만 듣고 스페인계라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스페인 계가 맞아요.” “하지만 얼굴은 슬라브계에 가까워 보이는걸요. 정말 스페인 사람 맞으신가요?” 나와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그는 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머니를 닮았지요.” “그래서, 항상 뭐든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보라는 건가요? 어떤 식으로 뒤통수를 칠지 모르니까? 당신이 이상한 경우잖아요, 이건? 모든 사물을 선입견을 가지고 보지 말라, 말은 좋죠. 사실은 당신의 콤플렉스 아닌가요?” “크리스틴 맥클레인 양.” 이것도 인종차별이라면 차별인데, 너무했다 싶은 찰나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얼굴만 보고 누가 당신의 이름이 크리스틴 맥클레인이라고 생각할까요. 완벽한 동양계인데.”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 때 그도 분명 기분이 나빴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 때 다른 생각을 했다. 아, 이래서 나는 이 사람을 싫어하는구나, 하고. 문을 닫고 나온 다음부터는 잘 모르겠다. 어떻게 어떻게 한 학기를 버틴 것 같은데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그와 다시는 만날 일이 없었다. ……였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아름답지가 못하다. 1학년 과정을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구하러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는데 일이 괜찮으면 주급이 짜고 액수가 괜찮으면 시간이 맞지 않고, 다 괜찮으면 벌써 누가 일자리를 꿰찬 다음이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벽보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회사 이름도 없고 연락처로 쓸 전화번호 하나 없는 수상한 벽보 따위, 봤어도 못 본 척 해야 옳았지만, 주급이 다른 곳의 두 배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결연하게, 벽보에 적힌 사무실로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벽보 보고 왔는데요.” “어머, 벽보?” 사무실 안은 좀 어두웠다. 책상에 두 개, 구석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고 그 근처엔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 조금 수상하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하지만 도로 나가기엔 이미 늦었다. 문 바로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은 키가 큰 흑인 여자였고 그녀는 벽보 이야기를 듣자 반색하며 벌떡 일어나 내 손을 덥석 잡은 것이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앤서니, 드디어 한 명 왔어!” “앤서니가 아니고 애니라고 부르랬잖아!” 건너편 책상에서 벌떡 일어선 건 긴 금발이 인상적인 미인이었는데, 말을 하자 마자 더 인상적인 점이 추가되었다. 굵은데다 톤도 상당히 낮은, 아주 멋진 남성의 목소리였다. 여기 도대체 뭐 하는 곳이람. 드랙퀸? “아, 그랬지. 아가씨, 벽보를 읽고 온 게 확실해? 누가 소개시켜 준 게 아니고?” 아무튼 키 큰 흑인 여자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무언가 판단하듯- 물었다. “요 앞에 붙어있던 벽보 아닌가요?” “드디어 찾았다, 미하엘, 미하엘!” 흑인 여자가 고개를 돌리고 누군가를 불렀다. 커튼 뒤에서 뭐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커튼 뒤에 빈 공간이 더 있었나, 특이한 사람이 하나 더 있나 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미하엘이 아니고 미겔.” 그 특이한 사람 하나 더, 는 나를 보자 마자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벽보는 아무한테나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진부한 동화 같은 이야기는 이쯤 하고, 아무튼 나에게는 직장이 생겼다. 월급에 비해서는 일은 쉽다. 거창한 일도 아니다. 분위기는 한가하고, 네 명 모두가 여기 모여서 하는 일이라곤 가끔 경과를 보고하거나 회의를 하기 위해서 정도. 그저 가끔, 작은 도움을 주면 된다. 나를 가르친 아요툰데-그 흑인여자다. 나이지리아에서 왔다던가.-가 일을 받아오고, 우리에게 할 일을 가르쳐주면 미겔이나 애니, 내가 일을 한다. 그러나 함께 일을 하는 지금이라고 미겔 마르케스가 좋은 건 절대로 아니다. 이젠 그의 존재자체가 기분나쁜 건 아니다. 그는 슬라브계처럼 생긴 스페인인, 나는 동양인처럼 생긴 영국인. 하지만 아직도 그는 싫다. 오히려 전보다 더 기분나쁜 점이 추가되었다. 학교에서는 몰랐던 것을 여기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 인간이 신사라고 주장하는 여자애들을 이리 끌고 와서 진실을 보여주고 싶지만 어쩌랴, 봐도 믿지 않을 것을.
참고로 크리스틴은 끝까지 미겔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합니다. 미겔도 직장 안에 있는 여자들에겐 손 안 뻗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