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라파엘의 고서점에 손님 따위는 안 든다. 뭐 가끔 양복에 선글라스 차림의 수상쩍은 남자가 왔다 가긴 하는데 책은 절대 안 사간다. 주위에선 저 사람 저래서 밥이나 먹고 사냐고들 수군대지만 기실 말이 고서점이지 자기가 좋아서 책 모으다 생긴 가게이니 아지라파엘은 이러나 저러나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다. 게다가 크롤리가 오는 건 언제든 대환영이고.
이웃집에서 고서점 주인 총각인지 아저씬지 알고보니 호모였다더라고 수군거리고 있는 것 따위 아지라파엘의 오래 되어 어두운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가게도 아니고 아지라파엘의 사적 공간 안에 웬 남자 하나가 서성이고 있었다.
-크롤리, 처음 뵙는 분인데 저 분은 어떤 악마이신가?
-여기 나 말고 악마가 누가 있단 건가, 엔젤.
-어라 그럼 저 분은 뉘신가?
-손님이겠지.
-가게 문 닫은지 좀 됐는데.
-.......
천사와 악마가 동시에 그 쪽을 노려보는 진귀한 장면임에도 박력도 기백도 요만큼도 없었다. 어디서 왔는지 캔버스에 수트라는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차림을 한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고,
-아 이런, 내가 방해했나요? 그럴 마음 없었는데? 하던 거 마저 하시고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럼 전 이만.
하고 몸을 돌려 사라지려는 순간,
-이봐 이봐 이봐, 어딜 가?
크롤리가 잽싸게 헤드락을 걸고 아지라파엘이 뒤이어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다.
-잡게 크롤리, 어쨌건 몇 년 만의 손님이야!
-책 사러 온 거 아닌데요!!!
-알 게 뭔가. 손님은 잡아야지!
타디스가 잠시 돌아버리는 바람에 평행우주에 잘못 떨어진 닥터는 대충 통성명을 마친 다음, 천사와 악마의 티타임에 초대되어 종교적이며 길고 꽤나 소모적이기까지 한 종교논쟁을 몇 시간 들어주는 가엾은 신세가 되었다.

-그러니까, 사운드 오브 뮤직이 뭐가 어떻느냔 말일세.
-자네도 싫어하잖나, 엔젤.
-그거야 너무 많이 들어서 그렇고, 처음 들어보면 그렇게 나쁘지도 않단 말이지.
-결국 많이 들으면 질린단 이야기잖나.
-하지만 크롤리, 신학적 견지에서 생각해 보세나. 따분한 곳이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기를 쓰고 천국에 가려는 이유가 뭐겠나. 따분한 걸 상회하는 좋은 게 있기 때문 아니겠나.
-하긴 뭐.
-다음엔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도 같이 보러 가세. 천국에 온 기분일 거야.
-그거 졸립단 말을 바꾼 거 아닌가. 뭐 좋아. 표는 자네가 내나?
-대신 저녁은 자네가 내는 걸세, 늘 그렇듯.
-그러지 엔젤.
-저기요 죄송합니다만, 거기 두 분.
 -뭔가.
둘 중 좀 더 부르주아 티가 나게 생긴 검은 머리 쪽이 불퉁하게 답했다.
-저 슬슬 일어나고 싶은데요.
-티타임일세. 그 정도 예의는 갖춰야지.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은.
-900살이면 젊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인상을 팍 쓴 악마-라고 하던 사람 쪽이 닥터를 노려보았다.
-900 가지고 어디서 폼을 잡나, 요즘 것들은 이래서 안 된단 말이지. 나와 엔젤이 자네 또래일 땐 좀 더 겸허했다네.
-이봐, 겸허함은 우리 쪽 덕목이라고.
-상관없잖은가.
천사라고 말했던 사람이 쓴웃음을 지으며 중재인지 먼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자 악마는 심플하게 말을 씹었다.
-새벽 두 신데요?
-차를 사랑하는 마음엔 시간 같은 거 없네. 그래서 말인데 엔젤.......

아, 네. 세상에 신이니 악마니 하는 게 정말 있다면 어떨까 생각은 해 봤지만 그 어떤 상상 속에도 이런 웃기는 존재는 등장한 적이 없었는데요. 그런데 두 분 무슨 사이십니까. 닥터는 너무 오래 잔에 남아 쓰고 차가워진 홍차를 후룩 들이켰다.

-그런데 자네 여긴 왜 왔나?
-그러게 말일세. 그러고보니 자네 대체 어디서 왔나?
-그러게요......

전에 오며 가며 신학 이야길 좀 들었는데, 백문이 불여일견이었다. 신적 존재 앞에서 인간은 그저 겸허할 뿐. 어찌나 말들이 많은지, 천하의 이 닥터가 끼어들 틈이 없다니, 이건 일종의 기적이라고 봐도 좋을 터. 나중에 심심하면 14세기 파리 대학에라도 가서 신학에 대해 한 마디 하겠노라고 닥터는 결심했다. 에, 여러 학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닥터입니다. 말하건대 신이란, 놀랍고도 신비한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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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님 리퀘입니다. 마음에 드시나요.
......저기 던져놨더니 닥터가 말을 못 해요 이를 어째;;
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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