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은 건담마이스터들과 크루들이 모여있던 중 일어났습니다.
-와 세츠나, 많이 컸다.
-그렇지 않다. 키나 몸무게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어.
어려서 잘 먹지 못해 키도 몸무게도 남성의 평균치에 미치지 못하는 건담 마이스터는 4년만에 만나는 동료의 인사를 무심히 넘겼습니다.
-그래? 달라진 것 같아서 키가 많이 컸나 하고.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은가?
드디어 뭔가 알아챈 모양입니다. 은근한 기대가 담긴 물음에 알렐루야는 세츠나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습니다.
-응, 많이 변한 것 같은데, 분위기가. 음, 뭐지.....아!
동료의 손가락이 세츠나의 턱주변을 가리켰습니다. 세츠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 이거 말인가. 성인남자라면 기르는 거라서 나도 이제 기르려고 한다.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지 1주일, 요 며칠 적응훈련이네 작전계획이네 바빠서 아무도 자신의 수염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아 솔직히 섭섭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알아봐주니 얼마나 좋은가요. 세츠나는 이제 수염이 간신히 자리잡은 턱밑을 흡족한 마음으로 쓰다듬었습니다. 멋지게 다듬은 콧수염, 까맣고 풍성한 턱수염이야말로 남자의 미덕. 세츠나는 흐뭇하게 수염이 멋지게 자란 자신의 얼굴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어? 그러고 보니 잠깐만, 세츠나.
갑자기 알렐루야의 목소리가 날아와서는 상상속의 자신의 얼굴위에다 무한대의 파문을 그려놓았습니다.
-어, 다 좋은데 콧수염은 안 기르는 게 좋겠다. 많이 듬성듬성하네.
콧수염을 기르지 말라니 이 무슨 망발입니까. 그러고보니 거울을 봐도 코 밑엔 수염자국이 거의 안 보여 참 기분이 나쁘던 참에 아픈 곳을 찌르다니! 세츠나는 코 밑을 슬쩍 만져보았습니다. 듬성듬성 자란 콧수염이 손가락에 까끌까끌했습니다. 수염이 많아지는 중이니까 언젠가는 풍성하게 자랄 거라고 믿고 있는데 저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고보니 참 수염이 듬성듬성 자란다. 음, 원래 콧수염이 별로 없는 체질인가봐?
언젠가는 분명 풍성하게 콧수염이 자랄 거라고 되뇌는 그에게 2연타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어 시간차공격이 진행되었습니다.
-안 기르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수염 듬성듬성 나면 되게 웃기거든.
-.......웃긴다고?
-아니 그, 왜 콩나물 시루.......라고 너는 잘 모르겠지만 동양에선 콩을 구멍이 뚫린 시루에 넣어 물을 주고 키우는데 그게 시루 밑으로 가는 뿌리가 빠져나오면 꼭 그런 모양이거든.
세츠나는 침묵했습니다.
-넌 수염이 많이 자라지도 않아서 안 기르면 면도할 땐 참 좋겠다.
남의 속도 모르고 해맑은 얼굴로 떠드는 동료의 얼굴이 그날따라 참 얄미워 보였습니다.
-수염이 많이 나면 면도하기 힘들거든? 랏세가 그래서 되게 귀찮아했는데. 그렇죠?
알렐루야는 환히 웃으며 자기 말을 거들어줄 사람을 모집했습니다. 안 돼, 오지 마. 세츠나의 간절한 바람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세상에 신 같은 건 없어요. 건너편에 앉아있던 동료들이 하나둘 가까이 와서 세츠나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매일 면도하는 거 그거 보통 일이 아니라니까! 수염은 또 기르기 얼마나 귀찮은데. 넌 좋겠다, 세츠나. 면도하기 편하고 관리하기 편해서. 그거 좋은 거야.
-것 봐, 세츠나. 랏세도 그러잖아. 티에리아 봐라. 얼마나 편하게 보여.
수염과 한 조각 인연도 없게 생긴 동료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깔끔한 얼굴도 건담 마이스터의 품위 문제와 관련이 있다. 잘 관리하는 건 중요하지. 그런데 세츠나 F. 세이에이.
-왜 그러나?
세상에 신이 없는 건 그렇다치고 내 편도 아무도 없나, 아니 이 자들은 어떤 환경에서 자랐기에 수염의 미덕도 모르나, 어이없어 하는 세츠나에게 티에리아마저 강펀치를 날렸습니다.
-역시 기르지 않는 편이 좋겠어. 그 콧수염은 길렀을 때 좋은 모양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관리를 전혀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우려가 있어. 게다가 턱수염도 굉장히 범위가 좁다. 알렐루야 합티즘 말이 맞아. 길렀다간 오히려 웃기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저런 걸 뭐라고 부르나, 록온 스트라토스.
형제와 꼭 닮았지만 성격은 딴판인 새 동료는 피식 웃으며 세츠나의 턱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파안대소하며 말했습니다.
-음, 저거? 염소수염이라고. 왜 닮았잖아.
형제와 같은 얼굴로 전혀 딴판으로 반응을 하니 위화감이 두 배에 충격이 두 배입니다. 티에리아가 그의 말을 받아 세츠나의 소중한 수염을 한 마디로 분석해주었습니다.
-그렇군, 정말 염소 턱수염과 비슷하다.

세츠나 F. 세이에이, 21세. 어느 화창한 아침에 우울한 얼굴로 수염에 면도기를 대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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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했습니다.
메신저 대화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얼굴이 가늘고 긴 남자들이 수염도 가늘더라고요. 게다가 저 듬성듬성한 염소수염은 주위에 모델이 하나 있어서 평소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써 봤습니다. 수정 전에 덧글 써 주신 이레 양 백야 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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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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