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잘 쓰고 싶었어요/1차창작'에 해당되는 글 25건

  1. 2007.06.18 푸른 꽃 5
  2. 2007.05.31 그녀의 논리 2
  3. 2007.05.02 국경여관 0.52 7
  4. 2007.04.30 국경여관 2
  5. 2007.02.16 설을 맞아 인사드립니다. 7
  6. 2006.10.31 모든 유령들의 밤 2
  7. 2006.08.15 나는 알고 싶다 8
  8. 2006.04.21 될성부를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1
  9. 2006.04.21 열 손가락
  10. 2006.04.21 거타지 이야기
-그림이 마음에 들면 가지지 그래?
자다가 일어나 앉아서 멍하니 그림을 보고 있었다. 자는 줄만 알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자는 줄 알았어요.
대답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베개에 머리를 묻고 누워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몇 가닥 붙어있기에 떼려고 등을 돌려 손을 뻗었으나 손을 들어 젓더니 자기 손으로 목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미끄러지며 상반신이 훤히 보였으나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언제 그리신 겁니까?
-사흘 전에 다 그렸지. 담배 있어?
침대머리에 둔 궐련을 한 대 빼어 끝을 자르고 불을 붙여 주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기를 빨아들이고 씨익 웃고는 벌떡 일어나 침대 밖으로 걸어가 구석에서 재떨이를 찾아 손에 들고 그림 옆에 섰다.
-맛있네. 그런데 그림 어때?
-굉장히 인상적인 얼굴이네요.
그림은 어린 여자의 얼굴을 그린 것이었다. 초상화를 가장 잘 그린다는 평가다웠다. 아주 인상적이어서 한 번 보면 절대로 못 잊을 얼굴이었다. 다양한 명도의 회색으로 칠해진 얼굴에 한 눈은 감겨져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었고, 감긴 눈 위를 절반쯤 가리고 있었다. 한 쪽 눈은 뜨고 있었고, 미간엔 주름이 잡혀있었다. 뜬 눈동자는 크게 벌어져 있었고 붉은 색인지 보라색인지 모를 기묘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입술은 검은 색이었고 꼭 웃는 것처럼 입을 살짝 벌려 이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벌어진 틈으로 붉은 입 속과 꽉 다문 이가 드러나 있었다. 기분나쁜 표정을 한 아주 인상적이고 섬뜩한 얼굴이었다. 어지간한 창문만 한 캔버스에 두텁게 바른 유화물감 특유의 질감이 어우러져 기묘한 느낌이 더해졌다. 나는 물었다.
-모델은 누구예요?
-응? 모르겠어? 맞혀 봐.
재를 털며 건성으로 대답하는 게 또 뭔가 재미있는 걸 찾은 모양인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 나 아냐.
그림에서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턱을 들고 씨익 웃었다. 닮았지?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세상에 자기를 그렇게 그리는 여자도 있습니까?
어두운 방 안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이 얼굴에 비치자 회색이 된 얼굴은, 미간에 잡힌 주름만큼은 그녀와 굉장히 닮았다.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그래서 그림 마음에 든다는 거야 안 든다는 거야?
-그야, 마음에 들어요.
그녀는 씨익 웃었다.

-나 어릴 때 사진 보여줄게.
-사진이 다 있습니까?
말을 하곤, 술자리에서 전해 들은 그녀의 집안 이야기를 기억하고 아차 싶었다. 본래 어느 남작가 막내딸이라더라, 남작은 남작인데 돈으로 산 남작이라더라, 어린 혈기에 싸우고 집을 나왔다더라, 지금도 본가에서 그녀의 이름을 들으면 경기 일으킬 사람이 몇 명이더라, 하는 술기운 섞인 소문들.
-응, 한 액자 열 개 정도? 있어봐.
방 구석을 뒤지더니 작은 상자를 가져와서는 침대에 앉은 내 옆에 앉았다. 침대머리에 등을 기대고 이불로 몸을 반쯤 덮은 채 나란히 앉아 있자니 웃기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에게 말했다.
-이러고 있으니 꼭 부부 같잖습니까.
상자에서 액자를 꺼내다 말고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집에서 아내가 기다리잖아. 유부남이면서.
도대체 그걸 아는 사람이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으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는 다시 사진 찾기에 열중하더니 제일 아래에 있던 액자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지금하곤 달라서 통통하지?
조금 큰 액자 안에 작은 사진 몇 개를 넣어놓았다. 레이스 장식에 얼굴을 묻은 작은 아기가 있었고,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여자애가 있었다. 아이는 웃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여섯 살쯤 되었을까,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었다. 사진 속의 소년과 소녀들,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은 서로 닮았다. 맨 앞에 앉아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그녀와 유사해서 자세히 쳐다보니 그녀가 웃었다.
-응, 그거 나 맞아. 잘 찾네?
-왜 이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요?
-사진 찍기 싫었거든. 그런데 안 찍었다간 큰오빠한테 혼나겠더라고.
어릴 때 부터 눈치 보는 기술만 늘어가지고, 하고 중얼거리더니 다음 액자를 내밀었다.
-이건 여학교 때.
그 다음 액자에 찍힌 건 친구들과 함께인 듯, 사진에는 몇 개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세일러 칼라 원피스에 긴 머리카락이 지금과는 전혀 달라보였다. 환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었고, 다른 손은 친구들의 어깨를 짚고 있었다.
-예쁘네요.
-그렇지? 문학 쪽 동인활동 하던 애들이야. 내가 책표지 만들어 줬고. 같이 책 낸 기념으로 하나 찍었지.
-아니 당신요.
그녀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게 예쁘다고 생각하다니 보는 눈 되게 없다? 그러니까 쓰는 소설마다 그 모양이지.
-표정이 생생하잖아요.
지금보다, 라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바보구나? 꾸민 표정과 아닌 것도 구분 못 해?
저 표정이 꾸민 거라니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잘 봐. 손에 힘이 들어가있잖아. 사람은 주먹 쥐고 못 웃는 법이다?
다시 사진을 보았다. 정말로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전에 어디선가 읽은 글귀가 떠올랐다. 억지로 웃는 건 인간 뿐이다, 라고.

그 다음 액자는 신문 스크랩이었다. 바닷가였고 기사에는 동반자살한 남녀중 여자만 살아서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고 여자는 지역 내 무정부주의 운동 서클의 일원이었다는 표제문이 붙어있었다. 그 액자는 자세히 볼 수 없었고 다음 액자는 결혼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부부는 무표정하게 서로 팔을 붙잡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남편이었어.
-지금은 소식 들으세요?
-재혼해서 아들이 하나 있다더라. 뭐 잘 지내겠지.
무심히 중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은 사진 속의 얼굴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을 뿐이었다. 남편은 그야말로 평범한 인상이었다.
-그래도 이 사람 자기 나름대로는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
사진관이었고 그녀는 남편에게 손목을 잡혀 있었다. 몸은 지금처럼 바싹 말라 있었고 풍성하게 틀어올린 머리카락과 표정이라곤 없는 얼굴이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반대쪽 손목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이 상처, 아까 그 흉터 기억 나?
자잘한 상처가 많았지만 손목이며 어깨며 배며 허벅지에 난 상처는 너무 두드러지게 커서 무시하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흉터는 핥으면 꼭 금속과 고기를 같이 맛보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는 걸 아까 처음 알았다. 손목 같이 보이는 부분에 있는 흉터는 알았지만 허벅지 안쪽에도 흉터가 있을 줄은 몰랐다. 흉터를 보고 몸이 굳어서 슬쩍 손을 치웠더니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마지못해 손목에 난 흉터를 핥자 그녀가 피식 웃었던 게 기억난다. 하지만 허벅지의 흉터는 너무나 생생해서 차마 건드리지를 못했다. 마치 무엇에 찢어진 듯 했다. 내가 굳어있는 걸 알고 그녀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 찍은 거. 남편은 이렇게 하면 내가 다시는 그런 짓을 못 할 줄 알았겠지.
-그런데요?
-이 사진 찍고 가택수사 들어와서 질려서 이혼하재더라. 근성이 없었어, 나나 그 사람이나.
그렇게 말하며 슬쩍 손목의 상처를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손목에는 한 줄짜리 흉터가 박혀 있었다. 칼을 댄 흔적이리라. 상처를 핥는 건 좌우간 내 역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사진은 경찰서가 배경이었다. 경찰봉을 찬 경찰이 그녀의 어깨를 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표정 없이 먼 데를 쳐다보고 있었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건 뭐에요?
-전향 기념.
지금은 술꾼이네 쉬운 여자네 유부남이랑 바람 피우다 걸려서 한 길에서 머리 끄댕이 잡혀서 난리를 피웠네 별별 악담과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사는 그녀가 과거 꽤 격렬하게 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전향을 하고 나자 그나마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던 사람들도 돌아섰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이런 걸 왜 보관해 놓았어요.
-응. 글쎄. 운동을 안 해도 살 수 있겠더라고. 무엇보다 이제 난 귀족도 뭣도 아니잖아.
점점 표정이 닳아 없어지는 사진을 보는 건 재미없는 일이었다. 나는 액자틀을 잡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만 보고 싶어요.
-왜? 난 재밌는데.
길게 말을 했는데도 목도 타지 않는지 물컵에 담긴 물은 어느새 내가 다 마셔 버렸고 그녀는 계속 앨범을 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는 건 참 무서운 일이야.
그녀가 웃었다.
-웃다 보면 그럭저럭 한 세상 살게 된다던데요.
-그러니?
그녀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웃었다.
-나는 웃는 게 어떤 건지도 사실은 잘 모르는걸.
평소 그녀는 늘 다양한,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누님 이러려고 저 데려오신 거죠?
-응, 뭘?
진짜는 하나도 말하지 않으면서 거짓말만 능숙하다. 인상을 쓰려는데 어느새 그녀가 내 등뒤로 다가가 목에 팔을 감았다. 등에 긴 머리카락이 닿아 간지러웠다. 그 느낌에 몸을 움찔하는데 머리카락의 감촉 사이로 다른 것이 느껴졌다.
-좀 자고 싶은데요.
-싫다니까.
머리카락의 간지러운 촉감과 혀와 입김이 더해져 머릿속까지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아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도망가잖아요.
-뭘?
-자꾸 약한 척 좀 하지 말아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등을 훑던 혀가 옆으로 이동했다.
-너 좋아하는 거 알지?
-거짓말 하지 마세요, 누님.
입술이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웃었다.
-결국 신세한탄이 하고 싶었던 거잖아요.
등에서 손이 떨어지고 그녀가 내 어깨를 당겨 고개를 젖혔다.
-그럴 때만 예리하지?
-아니라곤 말 못하시네요.
그녀는 손을 놓고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잘 자라. 일찍 나가고. 집에서 걱정해.

그 후로 그녀를 만난 적은 없다. 그녀는 너무 일찍 죽었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세월은 변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와서 누가 뭐라 해도 그녀는 허약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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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설정을 짜는 데는 이유가 있다니까요. 기왕 설정이 생각난 김에 요 몇 년 간 줄기차게 사랑해 온 다자이 오사무를 위해 뭔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가 다자이 오사무를 위해서냐면, 인간 실격에서 빌려온 설정이 몇 개 있어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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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안.
,
윈디언니 리퀘, 더워하는 사제씨입니다.

그녀는 카페의 출입문 앞 계단에 앉아 있었다. 여름의 돌계단은 뜨끈뜨끈해서 앉으면 몸 속으로 뜨끈한 기운이 바로 전달되는 것이 당연지사. 쇠로 된 계단 난간에 머리를 기댈 생각은 애초에 없었던 듯 난간 반대쪽, 즉 벽 쪽에 앉아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있다 벽도 따끈해졌는지 금방 머리를 뗐다. 입고 있던 남방 소매를 걷어올리자 천으로 덮여 있던 팔에 살짝 시원한 기운이 감도는 기분이 들었는지 머리를 슬쩍 뒤로 젖혔지만 그 기분은 몇 초가 지나자 사라진 모양이다. 목 뒤가 답답하게 느껴져 풀고 있던 머리를 묶어올리려고 목덜미를 쓰니 손바닥이 조금 축축해졌다. 조금 젖은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세 번 감아 묶고, 조금 뒤에는 묶은 머리를 접어서 올렸다. 그래도 한 개 풀려있는 남방 단추에 더 손을 댈 생각은 없어 보였다. 미간에 조금 힘이 들어갔을 뿐, 눈매나 입매는 전혀 변한 바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들어 목 근처에서 부채질을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문이 열렸다.
"아, 여기 계셨네. 사제님, 뭐 하세요?"
"아, 월영이네."
"월광이 언니가 사제님 찾아요. 과장님한테 연락이 왔다고. 그런데 저기, 더우세요?"
평소 걷어올린 적이 없는 소매가 접혀 올라가고 머리는 어쩐 일인지 접어 올려묶고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는 심현을 보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는지라 월영의 표정은 흥미진진해 보였다.
"응, 여기 더워."
심현의 답에 월영이의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안에 에어콘 틀어놨잖아요?"
"나 그 바람 싫어, 만든 거잖니."
아, 그렇구나. 월영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여름이죠?"
"응, 이제 여름이구나."
창 밖을 보니 공기가 신기루인 양 일렁이고 있었다. 깊은 초록색 나뭇잎과 짙은 그늘과 쏘는 듯한 태양빛과 열기가 잔뜩 섞인 노르께한 공기가 선명했다. 창 밖을 보고 그녀는 살짝, 흔적도 남지 않을 미소를 짓고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일이 있는 모양이니 들어가봐야지."
피하기는 하지만 거부는 안 하지, 라고 무심결에 자신의 모국어로 중얼거리고 심현은 가게의 문을 열었다. 월영이 문 옆에 서 있다 살짝 몸을 비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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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맞아 인사드립니다.  (7) 2007.02.16
Posted by 유안.
,
500번째 덧글 달아주신 분께 리퀘를 받는 건 어떨까 싶네요. 지금까지 423개의 덧글이 달렸습니다. 그 중 백여개는 제가 달았습니다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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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오빠.
벽지를 바르느라 여관방에 놓인 몇 가지 안 되는 집기-옷걸이니 이불장이니 하는 것들을 옮기고 있는 청년을 지나, 도배풀을 쑤어 온 소녀가 뭘 물어볼 생각이었는지 청년을 불렀다.
-오빠 아니다, 아저씨야.
청년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청년의 등 뒤에 있던 소녀가 몸을 돌려 청년의 앞쪽으로 걸어가더니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제법 질기기까지 한 시선에 놀라 청년이 몸을 슬쩍 뒤로 빼자 소녀가 다시 물었다.
-암만 봐도 스물 너댓으로밖에 안 보이는데 왜 아저씨예요?
-나이를 봐서 어떻게 아냐.
내심 제 나이를 정확히 알아맞힌 소녀에게 놀라며 청년이 퉁명스레 대꾸하자 소녀가 웃었다.
-얼굴을 보고 아는 게 아니에요. 연륜을 보고 아는 거지.
-연륜?
청년이 가구를 다 옮기고 도배지를 가져오자 소녀가 종이에 풀을 발랐고, 둘이 종이 양귀퉁이를 잡고 벽지를 벽에 붙이는 동안은 잠깐 말이 없었다. 소녀가 다른 종이에 풀을 바르며 말을 꺼냈다.
-사람이 오래 살면 흔적이 묻어나게 되어 있는데 오빠는 그런 게 없거든요?
-어?
-없다고요. 오빠 나름 이것 저것 고민한 흔적은 있는데 별로 깊이는 없어 보여요.
소녀가 솔을 풀통에 담갔다.
-어린애가 지금 뭐라는 거야?
-일단 벽지부터 잡아요, 풀 말라요.
청년이 반사적으로 종이 귀퉁이를 잡았고 둘은 종이를 아까 붙인 종이 옆에 맞추어 살짝 갖다대었다. 깔끔하게 붙이려고 이리저리 종이를 움직이는데 소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결정타를 날렸다.
-난 조금 나이 먹었다고 세상을 아는 척 하는 사람들이 제일 웃겨요.
벽지를 바르던 청년의 손이 삐끗했고 결국 벽지에 주름이 지고 말았다.
-것봐요. 표정 관리 하나 못하면서 아저씨는 무슨. 오빠로 만족하세요오~.
소녀가 깔깔 웃으면서 벽에 바른 벽지를 살짝 뗐고 청년은 구겨진 벽지를 다시 붙이는 데 안간힘을 쏟느라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날 부실한 잡일꾼 청년은 도배가 끝나고 집기를 정리하며 어떡하면 저 입만 산 꼬맹이를 괴롭혀 줄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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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맞아 인사드립니다.  (7) 2007.02.16
모든 유령들의 밤  (2) 2006.10.31
Posted by 유안.
,

-돈도 없고 먹을 것도 별로 없고 재미 있는 것도 별로 없어요. 있는 거라곤 온갖 소원과 욕망과 사람뿐인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숙박비는 선불이고 한 달 이상 체류하시면 할인가격이 적용됩니다.

마을의 유일한 여관인 국경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키가 남들보다 머리 반 개 정도 크고 호리호리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마른 청년이었다. 얼굴을 감추기 위해 기른 듯한 수염이 꾀죄죄한 얼굴과 어우러져 거지 같은 꼴이었다. 큰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짚은 꼴도.
-빈 방 있습니까?
카운터에 앉아 빈둥대고 있던 여자아이가 인사를 꺼내기도 전에 큰 걸음으로 현관에서 카운터까지 한 걸음에 들어와-라고 해 봐야 여자 걸음으로도 두 걸음이면 충분했다-다짜고짜 묻는 억양이 북쪽 섬마을 사람 특유의 억센 억양이었다. 여자아이가 흘끔 쳐다보고 졸린 목소리로 달달 외운 듯한 멘트를 건넸다.
-예, 혼자 묵으시게요? 한 달 이상 계실 거면 지금 계산하시면 할인해 드려요.
-2주.
-예?
-2주만 있을 겁니다. 그렇게 아세요. 열쇠 주시면 알아서 들어가죠.
단호하게 2주라고 시간을 말하고, 요금을 계산해서 카운터에 던지다시피 두고, 청년은 배낭을 추스르고는 열쇠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카운터에 있던 소녀는 1층 구석으로 달려갔다. 1층 구석에는 여관 주인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이 있었고 그곳을 지나자 뒤뜰에서 여관 주인이 마늘을 다듬고 있었다.

국경여관의 주인은 한 때 모종의 일로 국경을 넘어 이 나라를 떠나려고 했으나 결국 국경을 넘지 못하고 마을에 눌러앉으면서 여관집 아들이었던 조용하고, 성실해서 눈 앞의 일은 어떻게든 해치우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던, 혹은 못 하는 남자와 결혼한 여자였다. 덩치는 작았으나 목소리는 깡통에 돌을 넣고 흔드는 소리보다 더 요란하게 컸고, 한 번씩 남편을 윽박지르는 모습이 볼 만하다고 동네에 정평이 나 있었다. 그리고 술버릇이 굉장히 재밌어서 가끔 술을 마시고 이 놈의 동네 후딱 망해버리라고 술주정을 하면 동네 사람들이 구경을 온다는 소문도 있었다. 국경여관의 남편은 항상 손에 책이 들려 있었는데 그나마도 몇 번을 읽어 손때가 타고 탄 책이어서 표지만 봐서는 무슨 책인줄도 알 수 없었다. 마을에서 25리 떨어진 곳에 있는 초급학교도 가 보지 못했던 그가 학교 선생이 되고 싶다고 했다가 그의 아버지에게 코뼈가 부러질 만큼 맞고, 그 때 어쩌다 그 마을에 머물던 여자와, 둘 다 자포자기에 빠져 결혼한 끝에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를 닮아 묘한 성격에 어머니를 닮아 체구가 작은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가 카운터에 있던 소녀이다.

소녀는 어머니 옆에 주저앉아 남는 칼을 들고 마늘을 다듬으며 말했다.
-엄마, 손님. 그런데 2주만 있을 거래.
-행색이 어떻디?
깐 마늘을 칼로 얇게 저미며 주인여자가 물었다.
-뭐 다 똑같지. 큰 배낭 메고 꾀죄죄-한 꼬락서니 하고.
-2주? 글쎄 딸아, 네가 볼 땐 어떨 것 같으냐?
-2주는 무슨. 엄마,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 잡일꾼 필요하지 않나?
-호오, 그것도 그렇다?
딸의 심드렁한 말투에 주인여자는 피식 웃었다.

남쪽 국경지역에는 별별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다. 이웃나라와 전쟁으로 이 땅이 왕국의 땅이 된 지가 100여년, 내란이 일어난 지가 40여년. 치안은 불안정했고 국가의 눈과 귀가 국가의 모든 곳을 보고 들을 수는 없는 일이었고 남쪽 국경 앞에는 사막이 있었다. 사막을 넘어선 국경지대에 광산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도 국가가 그곳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반골 기풍이 강한 남쪽 사람들에다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들자 남쪽 국경지역은 거칠디 거친 사람들이 사는 곳의 대명사가 되었다. 광산을 노리고 모여든 광주, 노동자, 사기꾼, 장사꾼들. 거기다 모든 죄인들이 얌전히 형을 받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보안법에 관련된 죄수들은 잘도 도망을 다녔다. 특히 국경여관에 머무는 손님 중에는 그런 사람이 많아서 지난 몇 십년 간 국경여관을 거쳐간 보안법사범들을 모으면 당을 하나 만들 수도 있을 거라는 농담이 지하세계에서 빈번하게 돌았다. 당을 만들면 되는데 못 만드는 이유는 그들 중 사분지삼 정도는 왕국의 감옥에서 썩어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치안이 불안정하긴 해도 보안사범들은 철저하게 잡아가는 것이 왕국의 특징이었다.
아무튼 그 여관 주인의 딸인 소녀는 어려서부터 온갖 잡배들과 어울려 자라서 문을 들어서는 사람의 행색만 봐도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마을 전체에 심심찮게 돌았다. 그리고 또 소녀에 관련된 소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는 여관에 묵는 사람이 그 곳에서 살게 될 지 아니면 마을을 빠져나가게 될지, 빈 손으로 돌아갈지 뭐라도 건져 돌아갈지까지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간혹 그녀가 무당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으나 그녀가 맞힐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여관에 관련된 것들 뿐이었으므로, 그녀의 능력-능력이라면 능력을 본 사람들은 알았다. 그것은 통찰력일 뿐이라고.

그 청년이 국경여관의 잡일꾼이 된 것은 그로부터 약 한 달 반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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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 이야기도 안 썼는데 이건 또 웬 새 거냐고요. 저도 모릅니다. (어슐러 르 귄 때문에 속이 상해 쓸 수가 없어요. 젠장 조금만 틀면 오도나 디엔이나;) 생각나는 대로 일단 써 놓은 거라서-낮에 운동삼아 동네 산책하다가 떠오른 겁니다- 이야기가 더 이어질지 저걸로 끝날지는 아무도 몰라요.
여관 남편 모델은 주드 맞습니다; 다른 이야기인데 닥터후 3시즌 보긴 봐야겠어요. 보신 분들 반응이 왜들 이리 환상적인지. 새 파트너 언니랑이야 당연히 잘 지내시겠죠, 닥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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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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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07년 한 해 동안 좋은 글감, 원고감이 팍팍 떠오르고 직장일도 잘 풀리고 학교 공부도 잘 되고, 보는 공연마다 멋진 배우와 연출과 훌륭한 가사와(혹은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있는 가사와) 좋은 좌석이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모든 게 잘 될 거예요.

연하장은 만들지 못했고 대신 글을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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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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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 글이고, 할로윈 기념입니다.
윈디 언니가 할로윈 글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언니께 드리는 거여요. 이거 받고 힘을 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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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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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윈디 언니한테는 설정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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