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가 일어나 앉아서 멍하니 그림을 보고 있었다. 자는 줄만 알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자는 줄 알았어요.
대답을 하고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베개에 머리를 묻고 누워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몇 가닥 붙어있기에 떼려고 등을 돌려 손을 뻗었으나 손을 들어 젓더니 자기 손으로 목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미끄러지며 상반신이 훤히 보였으나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언제 그리신 겁니까?
-사흘 전에 다 그렸지. 담배 있어?
침대머리에 둔 궐련을 한 대 빼어 끝을 자르고 불을 붙여 주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기를 빨아들이고 씨익 웃고는 벌떡 일어나 침대 밖으로 걸어가 구석에서 재떨이를 찾아 손에 들고 그림 옆에 섰다.
-맛있네. 그런데 그림 어때?
-굉장히 인상적인 얼굴이네요.
그림은 어린 여자의 얼굴을 그린 것이었다. 초상화를 가장 잘 그린다는 평가다웠다. 아주 인상적이어서 한 번 보면 절대로 못 잊을 얼굴이었다. 다양한 명도의 회색으로 칠해진 얼굴에 한 눈은 감겨져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있었고, 감긴 눈 위를 절반쯤 가리고 있었다. 한 쪽 눈은 뜨고 있었고, 미간엔 주름이 잡혀있었다. 뜬 눈동자는 크게 벌어져 있었고 붉은 색인지 보라색인지 모를 기묘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입술은 검은 색이었고 꼭 웃는 것처럼 입을 살짝 벌려 이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벌어진 틈으로 붉은 입 속과 꽉 다문 이가 드러나 있었다. 기분나쁜 표정을 한 아주 인상적이고 섬뜩한 얼굴이었다. 어지간한 창문만 한 캔버스에 두텁게 바른 유화물감 특유의 질감이 어우러져 기묘한 느낌이 더해졌다. 나는 물었다.
-모델은 누구예요?
-응? 모르겠어? 맞혀 봐.
재를 털며 건성으로 대답하는 게 또 뭔가 재미있는 걸 찾은 모양인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거 나 아냐.
그림에서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가 턱을 들고 씨익 웃었다. 닮았지?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세상에 자기를 그렇게 그리는 여자도 있습니까?
어두운 방 안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이 얼굴에 비치자 회색이 된 얼굴은, 미간에 잡힌 주름만큼은 그녀와 굉장히 닮았다.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다.
-그래서 그림 마음에 든다는 거야 안 든다는 거야?
-그야, 마음에 들어요.
그녀는 씨익 웃었다.
-나 어릴 때 사진 보여줄게.
-사진이 다 있습니까?
말을 하곤, 술자리에서 전해 들은 그녀의 집안 이야기를 기억하고 아차 싶었다. 본래 어느 남작가 막내딸이라더라, 남작은 남작인데 돈으로 산 남작이라더라, 어린 혈기에 싸우고 집을 나왔다더라, 지금도 본가에서 그녀의 이름을 들으면 경기 일으킬 사람이 몇 명이더라, 하는 술기운 섞인 소문들.
-응, 한 액자 열 개 정도? 있어봐.
방 구석을 뒤지더니 작은 상자를 가져와서는 침대에 앉은 내 옆에 앉았다. 침대머리에 등을 기대고 이불로 몸을 반쯤 덮은 채 나란히 앉아 있자니 웃기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에게 말했다.
-이러고 있으니 꼭 부부 같잖습니까.
상자에서 액자를 꺼내다 말고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집에서 아내가 기다리잖아. 유부남이면서.
도대체 그걸 아는 사람이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으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는 다시 사진 찾기에 열중하더니 제일 아래에 있던 액자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지금하곤 달라서 통통하지?
조금 큰 액자 안에 작은 사진 몇 개를 넣어놓았다. 레이스 장식에 얼굴을 묻은 작은 아기가 있었고,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여자애가 있었다. 아이는 웃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여섯 살쯤 되었을까,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었다. 사진 속의 소년과 소녀들,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은 서로 닮았다. 맨 앞에 앉아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그녀와 유사해서 자세히 쳐다보니 그녀가 웃었다.
-응, 그거 나 맞아. 잘 찾네?
-왜 이렇게 인상을 쓰고 있어요?
-사진 찍기 싫었거든. 그런데 안 찍었다간 큰오빠한테 혼나겠더라고.
어릴 때 부터 눈치 보는 기술만 늘어가지고, 하고 중얼거리더니 다음 액자를 내밀었다.
-이건 여학교 때.
그 다음 액자에 찍힌 건 친구들과 함께인 듯, 사진에는 몇 개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세일러 칼라 원피스에 긴 머리카락이 지금과는 전혀 달라보였다. 환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었고, 다른 손은 친구들의 어깨를 짚고 있었다.
-예쁘네요.
-그렇지? 문학 쪽 동인활동 하던 애들이야. 내가 책표지 만들어 줬고. 같이 책 낸 기념으로 하나 찍었지.
-아니 당신요.
그녀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게 예쁘다고 생각하다니 보는 눈 되게 없다? 그러니까 쓰는 소설마다 그 모양이지.
-표정이 생생하잖아요.
지금보다, 라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바보구나? 꾸민 표정과 아닌 것도 구분 못 해?
저 표정이 꾸민 거라니 어리둥절해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잘 봐. 손에 힘이 들어가있잖아. 사람은 주먹 쥐고 못 웃는 법이다?
다시 사진을 보았다. 정말로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전에 어디선가 읽은 글귀가 떠올랐다. 억지로 웃는 건 인간 뿐이다, 라고.
그 다음 액자는 신문 스크랩이었다. 바닷가였고 기사에는 동반자살한 남녀중 여자만 살아서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고 여자는 지역 내 무정부주의 운동 서클의 일원이었다는 표제문이 붙어있었다. 그 액자는 자세히 볼 수 없었고 다음 액자는 결혼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부부는 무표정하게 서로 팔을 붙잡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남편이었어.
-지금은 소식 들으세요?
-재혼해서 아들이 하나 있다더라. 뭐 잘 지내겠지.
무심히 중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은 사진 속의 얼굴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였을 뿐이었다. 남편은 그야말로 평범한 인상이었다.
-그래도 이 사람 자기 나름대로는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몰라.
사진관이었고 그녀는 남편에게 손목을 잡혀 있었다. 몸은 지금처럼 바싹 말라 있었고 풍성하게 틀어올린 머리카락과 표정이라곤 없는 얼굴이 기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반대쪽 손목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이 상처, 아까 그 흉터 기억 나?
자잘한 상처가 많았지만 손목이며 어깨며 배며 허벅지에 난 상처는 너무 두드러지게 커서 무시하고 지나갈 수가 없었다. 흉터는 핥으면 꼭 금속과 고기를 같이 맛보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는 걸 아까 처음 알았다. 손목 같이 보이는 부분에 있는 흉터는 알았지만 허벅지 안쪽에도 흉터가 있을 줄은 몰랐다. 흉터를 보고 몸이 굳어서 슬쩍 손을 치웠더니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마지못해 손목에 난 흉터를 핥자 그녀가 피식 웃었던 게 기억난다. 하지만 허벅지의 흉터는 너무나 생생해서 차마 건드리지를 못했다. 마치 무엇에 찢어진 듯 했다. 내가 굳어있는 걸 알고 그녀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 찍은 거. 남편은 이렇게 하면 내가 다시는 그런 짓을 못 할 줄 알았겠지.
-그런데요?
-이 사진 찍고 가택수사 들어와서 질려서 이혼하재더라. 근성이 없었어, 나나 그 사람이나.
그렇게 말하며 슬쩍 손목의 상처를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손목에는 한 줄짜리 흉터가 박혀 있었다. 칼을 댄 흔적이리라. 상처를 핥는 건 좌우간 내 역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사진은 경찰서가 배경이었다. 경찰봉을 찬 경찰이 그녀의 어깨를 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표정 없이 먼 데를 쳐다보고 있었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건 뭐에요?
-전향 기념.
지금은 술꾼이네 쉬운 여자네 유부남이랑 바람 피우다 걸려서 한 길에서 머리 끄댕이 잡혀서 난리를 피웠네 별별 악담과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사는 그녀가 과거 꽤 격렬하게 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가 전향을 하고 나자 그나마 그녀에게 호의적이었던 사람들도 돌아섰다는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이런 걸 왜 보관해 놓았어요.
-응. 글쎄. 운동을 안 해도 살 수 있겠더라고. 무엇보다 이제 난 귀족도 뭣도 아니잖아.
점점 표정이 닳아 없어지는 사진을 보는 건 재미없는 일이었다. 나는 액자틀을 잡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만 보고 싶어요.
-왜? 난 재밌는데.
길게 말을 했는데도 목도 타지 않는지 물컵에 담긴 물은 어느새 내가 다 마셔 버렸고 그녀는 계속 앨범을 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는 건 참 무서운 일이야.
그녀가 웃었다.
-웃다 보면 그럭저럭 한 세상 살게 된다던데요.
-그러니?
그녀는 미간에 주름을 잡고 웃었다.
-나는 웃는 게 어떤 건지도 사실은 잘 모르는걸.
평소 그녀는 늘 다양한,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누님 이러려고 저 데려오신 거죠?
-응, 뭘?
진짜는 하나도 말하지 않으면서 거짓말만 능숙하다. 인상을 쓰려는데 어느새 그녀가 내 등뒤로 다가가 목에 팔을 감았다. 등에 긴 머리카락이 닿아 간지러웠다. 그 느낌에 몸을 움찔하는데 머리카락의 감촉 사이로 다른 것이 느껴졌다.
-좀 자고 싶은데요.
-싫다니까.
머리카락의 간지러운 촉감과 혀와 입김이 더해져 머릿속까지 흐려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아냈다.
-이러니까 사람들이 도망가잖아요.
-뭘?
-자꾸 약한 척 좀 하지 말아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등을 훑던 혀가 옆으로 이동했다.
-너 좋아하는 거 알지?
-거짓말 하지 마세요, 누님.
입술이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웃었다.
-결국 신세한탄이 하고 싶었던 거잖아요.
등에서 손이 떨어지고 그녀가 내 어깨를 당겨 고개를 젖혔다.
-그럴 때만 예리하지?
-아니라곤 말 못하시네요.
그녀는 손을 놓고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잘 자라. 일찍 나가고. 집에서 걱정해.
그 후로 그녀를 만난 적은 없다. 그녀는 너무 일찍 죽었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세월은 변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와서 누가 뭐라 해도 그녀는 허약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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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설정을 짜는 데는 이유가 있다니까요. 기왕 설정이 생각난 김에 요 몇 년 간 줄기차게 사랑해 온 다자이 오사무를 위해 뭔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가 다자이 오사무를 위해서냐면, 인간 실격에서 빌려온 설정이 몇 개 있어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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