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제 중 48번, 소원입니다.
1.
아홉 살 때, 나는 내가 바라는 대로 살지 못 할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아주 더웠으며, 집까지 가려면 20분은 더 걸어야 했다. 나는 느릿느릿 걸으면서 생각했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을지 참 궁금했다. 그걸 알 수 있다면 죽어도 좋으련만, 죽고 난 뒤에 다시 돌아와서 내가 느꼈던 '죽음'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없다면-소용이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죽기 전에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일단 영혼의 유무가 제일 중요하다. 죽고 난 다음에 아무 것도 없다면, 그 아무 것도 없다는 건 도대체 어떤 것일까, 나는 아무 것도 의식 못 하게 되는 걸까 생각도 못 하고, 남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내가 못 하는 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나의 싫은 점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속상해하지 않아도 되고,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나는 하던 생각을 싹 날려버렸다. 저 생각과 함께 가지를 치던 다른 많은 생각들도 뿌리채 뽑혀 사라졌다. 어제 읽었던 책에 대한 것도 오늘 학교 도서관에서 본 재미있어 보이는 책에 대한 것도 저 세상에 대한 것도, 나 자신에 대한 것도.
-같이 가자!
내 어깨를 치는 손을 보면서, 처음으로 사람이 귀찮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애는 우리 반 회장이었고 내 친구였고, 날 괴롭히던 내 짝을 나 대신 시원하게 두들겨패준, 정말 좋은 아이였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래서 그렇게 좋은 아이였던 우리 반 회장과 날씨에 대해서 반 애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것도 그렇게 피곤할 수가 없었다.
겨우겨우 이야기를 하다 갈림길에서 그 아이와 헤어지고, 다시 집으로 가면서 깨달았다. 나는 내가 바라는 대로는 절대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2.
-왜 다들 뭔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걸까.
나는 그냥저냥 아무 생각 없이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정말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학교에 다녔고 아무 생각 없이 고등학생이 되었고, 그제서야 나는 학교란 데를 끔찍하리만큼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 옆에서 서로서로 어긋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싫었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지도 의심스러운 소비적인 욕망 뿐인 관계는 더 싫었다. 검정고시를 치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에 가고, 직장을 구한다고 해서 내가 달라질 리는 없었고, 고등학교를 싫어하듯 대학에도 직장에도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니 조금 일찍 학교를 벗어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뭐가 되지 않으면.
내 말을 받아 준 사람은 나와 같은 반인 아이로 '특이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아이였다. 친구라고는 한 명도 없었지만 항상 웃고 있었고 농담을 즐겨서 아무도 그 아이가 주위 사물에 대해 아무 관심도 없는 인간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는 그 아이의 그 무관심함이 좋아서 항상 말을 붙이곤 했다. 나를 귀찮아 하지 않을 만큼 조용히 다가가서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그걸로 끝인 사이였다.
-쟤는 대학에 가고 싶어하는 데 그 이유는 대학생이 되면 자신이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될 거라고 믿거든.
-호오.
-살도 빠지고, 안경도 벗고, 매력적이고 멋진 여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야? 저 애가 생각하는 멋진 여자라는 건 잡지에 나오는 그런 여자고 그런 건 수도 없이 널렸어. 쟤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는 절대로 못 될거야. 항상 자신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겠지. 그리고 그만큼 애를 쓸 거야. 지금도 밥 안 먹고 감자만 먹고 있잖아 다이어트 한다고. 그렇지만 평생 자신이 바라는 뭔가는 못 될걸.
-그건 뭐냐, 노력의 댓가와 인간이 가진 가능성을 모두 부정하는 발언이냐.
-그게 아냐- 단지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한테 하는 말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또 왜?
-늘 그러잖아. 뭔가 되어야 한다고. 꿈을 가지라고. 하지만 그 꿈이란 것도 웃기지.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건 말을 못 하게 되어있어. 나는 평생 책만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꿈이 아니래. 그래서 나는 늘 다른 이야기를 했어, 소설가, 선생님, 도서관 직원. 다들 그렇잖아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대답이 다 비슷해. 하지만 그건 되고 싶은 게 아니고, 이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데 이바지하고 싶은가, 잖아.
-그게 다르냐?
-그럼 같아? 같은 걸 다른 말로 설명하는 경우는 없어. 아버지랑 아빠가 같다는 증거를 댈 수 있으면 내 말을 반박해도 좋아.
-아, 그런 건가. 그래서?
-그리고 설령 그게 자기가 되고 싶은 거라고 쳐. 하지만 그런 게 되는 사람 넌 본 적 있냐?
-왜 텔레비전이고 책이고 많이 나오잖아. 성공 사례 같은 거. 그런 건 안 되냐?
-안 되지.
-왜?
-다들 착각하거든. 저 사람처럼 돈을 많이 버는 게 내가 되고 싶은 거라고. 높은 자리에 앉는 게 내가 되고 싶은 그거였다고. 그래서 죽도록 일하고 죽도록 공부해. 그런데 말이야- 우리 학년이 800명인가 그렇지?
-음, 그 정도.
-그런데 걔들 중에서 그런 게 되거나 혹은 정말로 자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음, 일단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사람은 50명 정도도 안 되겠지. 나머지는 그냥 시키는 대로 일하다 죽을 거고. 그 중에서도 자기가 원하는 일이나 자신의 재능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재수없으면 한 명도 없을지도 모르지?
-그럴 지도 모르겠네.
-그것 봐. 기껏 꿈 꾸라고 하면서 조악한 상상이나 가르치더니 결국 남는 건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지 아닌지도 모르는 걸 바둥바둥 따라간 추한 흔적 뿐인걸. 학교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건 우리 생각만큼 좋은 게 아냐. 정말로 되고 싶은 게 되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죽도록 공부하고 죽도록 일하면 뭐해, 그 알량한 꿈조차 이루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태반이잖아. 직업이 자기 정체성이라고 믿는 거라면 관둬. 그건 자신이 이 사회에 적응하고 있다는 흔적이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끊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될 지는 몰라도 자신은 아냐. 일을 그만두면 자기는 끝인데, 그런 자기정체성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래서 아이들이 자라서 집을 떠나면 우울증에 걸리고 회사를 그만뒀다고 자살해버리는 사람이 생기는 거야. 그 사람들은 자기가 없어졌다고 생각해서, 정말로 자기를 없애버리는 사람들이지. 그래도 그나마 나은 거야. 그 나머지는 그런 것도 없을지도. 그냥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거나, 혹은 잊어버리고 그냥저냥 사는 거잖아. 적당히 벌다가 적당히 쓰다가 죽어버리면 끝. 아무 것도 없는 거지.
학교는 우리를 쓸데없는 소모품으로 만들고 있어. 대충 목표를 아무 거나 쥐어주고 그까지 가려면 이런저런 걸 해야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건 목표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야, 시계 톱니가 되는 것보다 더 나쁘지. 그건 시계라도 되지만 우리는 이 사회를 이루는 뭔가도 못 되고 죽어버릴지도.
-그럼 너는.
점심시간은 생각보다 길었고 우리는 학교 뒷뜰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 아이가 물었다.
-응?
-그럼 너는 뭔가 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냐.
-응, 있어. 학교에서 이런 게 되라 저런 게 되라 가르치는 것 말고 정말 중요한 거. 아주 어릴 때부터, 죽기 전에 그것만은 하고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거.
-바보 같은 년, 그럼 그렇게 되어야지. 지금 뭐 하고 있냐?
-됐네- 너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정말 죽어야겠네 끔찍해라.
매 점심시간마다 하던 긴 이야기는 저런 식으로 끝을 맺었고 사람들은 우리가 정말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그 아이는 나에게 너무 무관심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3.
나는 정말로 뭔가가 되고 싶었다.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만 원 짜리 몇 장'으로 죽는 건 끔찍한 일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내 소원은 한결같다.
한 편을 쓰고 죽어도 좋으니 보는 사람들이 다들 뭔가 팍, 하고 느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그런 글 한 편만 쓰고 나면 정말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지만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점은, 나는 내가 아무 것도 못 남기고 죽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안다. 나는 내가 살아있었다는 어떤 증거도 남기지 못하고
그렇게 죽게 될 것이다. 나는 소모품으로 살다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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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14일.
퀴즈. 제 이야기를 재구성한 겁니다. 어디까지가 제 이야기고 어디까지가 제가 만든 이야기일까요~
이런 걸 쓰고 보니 스터디할 때 사소설 보면서 이게 소설이 되어야 하는 이유와 될 수 없는 이유를 가지고 떠들던 건 별로 좋은 게 아니었군요. 소설은 소설이에요. 자기 이야기를 가지고 쓰더라도 그건 진짜가 아니니까.
여튼 소원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거지만 정말 이루어질 지 알 수 없는 거죠. 저는 저 자신에 대해 심히 회의적이고, 아마 평생 자신이 정말로 쓰고 싶은 건 못 쓰고 죽을 거라는 데 뭐든 걸 수 있답니다.
다자이 오사무 때문인지 삽질이 늘었습니다마는- 정말로 자기가 되고 싶은 게 뭔지 아는 사람은 얼마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정말로 되고 싶은 게 되는 사람도 드물 거예요.
훌륭한 레콘이 되고 싶습니다. 아무리 어이없는 숙원이라도 레콘은 자기가 되고 싶은 게 되는 생물이죠. 멋진 일입니다.
아, 1, 2, 3번은 모두 다른 글입니다. 소원이라는 말로 연결된 글일 뿐이에요.
'저는 잘 쓰고 싶었어요'에 해당되는 글 55건
- 2006.04.20 48. 소원
- 2006.04.20 46. Moon
- 2006.04.20 33, 편집증
- 2006.04.20 36. 식중독
- 2006.04.20 10. 미안합니다
- 2006.04.20 여기에는
- 2006.04.20 [삼천세계]정보부장님이 보고 계셔
- 2006.04.20 [이영도]나의 네크로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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