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는 일본어를 안다. 그 사실을 알렐루야가 어떻게 알았냐면, 지금 술기운에 소파에 엎어져 졸고 있는 스메라기의 소파 밑으로 떨어진 손 아래 바닥에 읽다 만 듯, 편 채로 엎어놓은 일본어로 쓰여진 책이 떨어져 있어서이고. 그게 일본어인 건 어떻게 알았냐면 세츠나가 그 책을 펼쳐 읽었기 때문이다. 일본에 안가가 있는 세츠나는 일본어를 안다. 회화가 능숙한 정도는 아니지만, 뉴스를 듣거나 서류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는, 관광이 아닌 목적으로 체류하는 평범한 외국인을 연기할 정도로는 안다. 24세기가 되어서도 아직 자신의 언어를 유지하는 민족은 제법 있었다. 물론 그럴 만한 정치적 문화적 권력이 있을 때 이야기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인간실격? 책을 먼저 주운 것은 알렐루야였다. 한자 정도는 읽을 수 있다. 인혁련 출신이니까. 굳이 소리내서 읽은 것은 제목이 하도 걸작이라서다. 꽃 이름 외우기라도 하는 건지 하로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펠트와 간만의 휴가라고 신이 난 몇 명, 그리고 이꼴 저꼴 보기 싫다고 어느 구석에 틀어박힌 티에리아를 제외한 세 명의 마이스터, 알렐루야, 세츠나, 록온이 그 곳에 있었다. 알렐루야의 목소리를 듣고 다들 소리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뜬금없이 뭔 소리야, 알렐루야. -아뇨, 그게 아니고 책 제목인데...... 록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드물게 폭소했다. 잘 웃기는 해도 저렇게 웃는 사람은 아니다.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록온이 어이없는 표정을 계속 지은 채 알렐루야를 쳐다보았다. -거 걸작이네. 뭔 책이 그래? -그, 그러게요. 록온이 과잉반응을 보이자 알렐루야도 불안해졌다. 솔직히 제목이, 좀, 많이, 굉장히, 찔렸다. 인간실격. Human lost. 평범한 사람-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도리 같은 걸 모른다. 희대의 살인마 A(24세, 남성)가 희대의 살인마 B(19세, 남성) 쪽으로 다가와 책을 폈다. -첫장부터 광고냐......근데 이거 무슨 책이야? -글쎄요, 저도. 모르는 글자라...... -설마...... 록온이 인상을 찌푸리자 알렐루야도 덩달아 인상을 썼다. 그 때 세츠나가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단호한 동작으로 첫장을 폈다. 아까 록온이 편 부분과 반대쪽이었다. -일본어다. 이 쪽부터 읽는다. -어, 그래. 그리고 세츠나는 책 첫 문장을 심각한 표정으로 -아무 생각 없겠지만- 또박또박 읽었다. 수치스러운 삶을 살아왔습니다.
책을 읽는 세츠나는 무덤덤했지만 나머지는 어쩐지 머리가 아팠다. 첫대목이 주는 인상이 하도 어마무지해서 쩌억 굳어있다 먼저 해동된 쪽이 록온이었다. 아니, 마음 잡고 착실하게 살아가야 하는 16세 소년 앞에서 더 이상 읽고 싶은 내용이 아니었다. 물론 착실하게 살아가는 애가 이런 데 있으면 안 된다는 건 록온이 알고 알렐루야가 알고 스메라기가 알며 세츠나도 물론, 안다. -수기? -글쎄, 모르겠다.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에게 물어봐라. -자는데? -응? 아니 안 자. 떠드는 통에 깬 모양이다. 한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한 손으론 얼굴을 문지르며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있던 전술예보사가 일어났다. -아, 시끄러웠나봐. 미안, 미스 스메라기. -아냐아냐, 이제 슬슬 일어나서 머리도 좀 정리해야 하고........뭐야, 왜 남이 보는 책을 막 들고 가? 스메라기가 펄쩍 뛰며 세츠나의 손에 있던 책을 뺏았다. -아, 아뇨 스메라기 씨. 그냥 바닥에 떨어져 있길래 그냥. 알렐루야가 엄청 찔리는 표정으로 변명했다. 스메라기는 책을 한 번 보고 알렐루야와 록온, 세츠나를 한 번 둘러보고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공범들에게 뭔가를 들킨 사람의 모습이었다. -응, 하긴 제목이 좀 자극적이긴 하지. -무슨 책이우? -이거......소설이에요 소설. 그냥 자기가 인간실격이라고 믿는 어떤 사람의 수기 형식으로 된 건데. -흐음. 록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메라기를 보고 보란 듯 한숨을 쉬었다. -이런 거 좀 들고 다니지 말라고. 뭐예요 이 누가 봐도 뜨끔한 제목은. -뜨끔하니 그나마 다행 아냐? 거기서 남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끝장이잖아. 스메라기가 록온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인간실격, 이라는 제목이 유달리 큰 글자로 박혀있는 그 책은 많이 읽은 듯 손때가 묻어있었다.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가 평소에 소설을 읽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다. 전술예보사가 읽어야 할 문서는 그런 게 아니니까. 아마 이 책이, 그녀의 애독서이겠거니. -좋아하는 책이야. 휴가 나와선 좋아하는 책을 읽어야지. 스메라기가 웃으며 덧붙였다. -제목 보고 무슨 흉악한 책인가 했잖아요. 록온이 웃었다. -하긴 좀 찔리죠, 인간실격. 알렐루야도 웃으며 거들었다. 희대의 테러리스트들이 서로 인간실격자로서 동질감을 느끼며 뭉치려는 순간 낮지만 어린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뭐가 찔리나. 세츠나가 진지한 얼굴로 세명을 쳐다보고 있었다. -응? 뭐 이런 거 저런 거 있잖아. 알렐루야가 변명하듯 말하자 세츠나는 확신을 실어 답했다. -우리는 수치스럽지 않아. 굳이 말하자면 저 표정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신념을 가진 자의 표정이었다. 건담을 믿고 있는 어린 소년은 더 이상 자신이 하는 일에 회의하지 않았다. 수치스러우면 안 되고, 인간실격이어서도 안 된다. -그래, 지금 하는 일도 부끄럽지 않고 나도 부끄럽지 않아. 다만 이제 세간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에선 확실히 실격처리된 상태라는 거지. 그게 찔리네......세츠나, 나가서 크리스 좀 불러줄래. 이제 슬슬 일해야지. 세츠나는 대답하지 않고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알렐루야는 생각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스메라기 씨랑 록온이 인간실격이 더 실감나지 않으려나, 하고. 그냥 감일 뿐이라 말로 옮기지는 않았다. 아무리 사회성이 부족해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법. 이미 처음부터 실격이었으니 실감나고 말고 할 게 없는 입장인 자신이나 더 어린 나이에 손에 피를 묻힌 티가 나는 세츠나야 더 할 말이 없고. 인간실격, 이라는 게 제대로 감이 오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인간도 아니었는데 뭘. 알렐루야는 씁쓸하게 중얼거렸고 반신은 이번엔 웬일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후로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그 책을 읽는 것을 볼 수 없었지만 알렐루야는 얼마 후 한 잔 하러 들른 스메라기의 침대머리맡에서 그 책을 또 발견했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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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좋아하는 데 나이는 상관없죠. 그저 다메정신으로 단결하면 됩니다. 하지만 만 26세에도 애독서라면 참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자이를 삽질대마왕이라 부르며 애증으로 한결같이 핥는 저도 그 짓은 안 합니다. 문제는 어제 커피아이스크림 먹고 뻗어서 골골거리다가 생각난 거라는 거. 뭐죠 저?
수정보고 있습니다. 일 하는 틈틈이 아이디어 까먹기 싫다면서 끄적거리는 인간은 미친 거 맞다고 물론 생각합니다. 그, 그래도 할 일은 한다고요......
그리고 이제 와서 밝히는데 저 문장 책 첫페이지에 나오는 거 아니에요. 사실 진짜 첫문장은 나는 그 남자의 사진을 세 장, 본 적이 있다. 입니다. 거기서 몇 쪽 뒤에 제1의 수기, 부터 그 문장이 나오거든요. 하하하하. 스루합시다 스루.
오늘도 둘이 밥 먹으면서 잘 놀았습니다. 요즈음 저희의 붐은 기형도이지요. 하필 피아가 기형도 시집을 들고 온게 문제였습니다. (그 애가 기형도의 빈집을 가지고 뭘 쓸 계획이었다더군요.)
이것은 윈디 언니 작품입니다.
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워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건담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이 더블오건담은 이 검을 떨어뜨리리 그 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비틀림을 찾았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구축할 것이 많았구나. 우주 어딘가를 떠다니는 잔해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결심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싸워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나 그 누구도 나를 부러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집착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묘비명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평화를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 평안하지 못했노라.
사악하죠? 그래서 저는 답으로 이걸 패러디했습니다.
이튿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간유리같은 밤을 지났다.
그날 우리들의 언덕에는 몇 백 개 칼자국을 그으며 미친 바람이 불었다. 구부러진 핀처럼 웃으며 누이는 긴 팽이 모자를 쓰고 언덕을 넘어갔다. 어디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걸까?어머니 왜 나는 왼손잡이여요. 부엌은 거대한 한 개 스푼이다. 하루종일 나는 문지방 위에 앉아서 지붕 위에서 가파른 예각으로 울고 있는 유지 소리를 구깃구깃 삼켜넣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아버지가 끊어뜨린 한 가닥 실정맥이야. 조용히 골동품 속으로 낙하하는 폭풍의 하오. 나는 빨랫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아버지의 런닝셔츠가 흙투성이가 되어 어디만큼 날아가는가를 두 눈 부릅뜨고 헤아려 보았다. 공중에서 휙휙 솟구치는 수천 개 주사 바늘. 그리고 나서 저녁 무렵 땅거미 한 겹의 무게를 데리고 누이는 뽀쁠린 치마 가득 삘기의 푸른 즙액을 물들인 채 절룩거리며 돌아오는 것이다./아으, 칼국수처럼 풀어지는 어둠! 암흑 속에서 하얗게 드러나는 집. 이 불끈거리는 예감은 무엇일까.나는 헝겊 같은 배를 접으며 이 악물고 언덕에 섰다.그리하여 풀더미의 칼집 속에 하체를 담그고 자정 가까이 걸어갔을 때 나는 성냥개비 같은 내 오른팔 끝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무서운 섬광을 보았다. 바람이여, 언덕 가득 이 수천 장 손수건을 찢어 날리는 광포한 바람이여. 이제야 나는 어디에서 네가 불어오는지 알 것 같아. 오, 그리하여 수염투성이의 바람에 피투성이가 되어 내려오는 언덕에서 보았던 나의 어머니가 왜 그토록 가늘은 유리막대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는지를.
다음날이 되어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폭풍의 밤마다 언덕에 오르는 일을 그만 두었다. 무수한 변증의 비명을 지르는 풀잎을 사납게 베어 넘어뜨리며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였다
이튿날이 되어도 록온은 돌아오지 않았다. 록온은 간유리 같은 밤도 지낼 수 없다.
그날 우리들의 전장에는 몇 백 개 칼자국을 그으며 미친 바람이 불었다. 구부러진 핀처럼 웃으며 다들 어디론가 가 버렸다. 어디에서 바람은 불어오는 걸까? 아버지 왜 나는 건담인가요. 우주는 거대한 한 개 악의다. 하루종일 나는 사막에 앉아 모래 위에서 가파른 예각으로 울고 있는 모래바람 소리를 구깃구깃 삼켜넣었다. 엑시아가 말했다. 너는 록온이 끊어뜨린 한 가닥 실정맥이야. 조용히 고철 사이로 낙하하는 폭풍의하오. 나는 우주에서 힘없이 부유하는 록온의 시체가 어디까지 날아가는가를 두 눈 멍하니 뜨고 지켜보았다. 공중에서 휙휙 솟구치는 수천개 주사바늘. 그러고 나서 저녁 무렵 땅거미 한 겹의 무게를 데리고 세상은 바탕 가득 악의를 얼룩덜룩 물들인 채 절룩거리며 돌아오는 것이다. 아, 모래처럼 사그러지는 어둠! 암흑 속에서 하얗게 드러나는 건담. 이 불끈거리는 예감은 무엇일까. 나는 빈 깡통처럼 배를 접으며 이 악 물고 사구(沙丘)에 섰다. 그리하여 칼집과 총구 속에 몸을 담그고 자정 가까이 걸어갔을 때, 나는 성냥개비 같은 내 오른팔 끝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무서운 섬광을 보았다. 바람이여, 언덕 가득 이 세상을 찢어 날리는 광폭한 바람이여. 이제야 나는 어디에서 네가 불어오는 지 알 것 같다. 오 그리하여 수염투성이의 바람에 피투성이가 되어 내려오는 우주에서 보았던 나의 록온이 왜 그토록 가늘은 유리막대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는지를.
다음날이 되어도 록온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나는 폭풍의 밤마다 언덕에 올랐다. 무수한 변증의 비명을 지르는 풀잎을 사납게 베어넘어뜨리며 이제는 내가 떠날 차례였다.
오늘 밥 먹다 나온 매운 떡볶이에 생각이 났습니다. 트랙백이 안 걸리네요......이 글을 읽고 읽으시면 아마 이해하기 편하실 겁니다.
저번에 짜장면이라는 세상의 악의가 들어 있는 국수를 먹고 교관님에겐 비웃음당하고 밀레이나한테까지 동정어린 시선을 받은 김라일 라일 디란디 , 계란 한 판. 연장자의 체면이고 뭣이고 애초에 애한테 목줄 잡혀 끌려왔을 때 부터 없었지만 가끔은 억울했다. 20대 초반 솜털 보송보송한 애ㅅ......아니 애라고 부르기 힘든 구석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어든 간에 지고는 못 사는 게 남자. 쓸 데 없는 데서 오기를 부리는 시점에서 계란 한 판이 아깝다는 건 뭐 그냥 넘어 가고 다 큰 어른이 왜 그러냐면 그게 세상 이치라고 치자. 세상의 악의는 원래 그런 오묘한 데서 시작하는 법이다.
-이것은? 드물게 세츠나가 말을 잃고 접시를 쳐다보았다. -이거? 저번에 그 인혁련 전통 요리 고마워서. 보답으로 좀 찾아봤어.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보내는 라일 디란디. 접시 위엔 무언가 붉은 소스가 가득 담겨 있었고 그 안엔 파스타의 일종인지 손가락 만한 하얗고 길쭉한 무언가가 소스 사이에 들어있었다. 익은 양배추와, 넓적한 가공식품인 듯한 무언가와 삶은 계란, 당근도. -그거 떡볶이란 거래. 그 나라 애들이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라더라. 맛있게 먹어. 그리고 죽도록 맵고 먹기 힘들다더라. 저번에 날 엿먹였다 이거지, 어디 너도 한 번 당해봐라. 나 라일 디란디 지고는 못 산다. 회심의 미소를 날리자, 접시를 보며 한참 뭔가를 생각하듯 침묵하던 세츠나가 갑자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쓸 데 없는 복수심까지 형을 닮았나. 허를 찔려 굳은 라일이 아무 말도 못 하는 동안 세츠나는 포크를 들어 떡이라는 것을 집어 입에 넣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 삼키고, 양배추에 당근까지 한 입 먹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맛있다. 고맙게 먹으마. 라일 디란디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죽도록 매워서 먹기 힘들 거랬잖아 티에리아 교관님! 우적우적 말 없이, 아주 빠른 속도로 먹기만 하는 세츠나를 보고 혹시나 해서 한 입 입에 넣었다 우선 죽도록 매운 맛에 경악하고 질겨서 씹기도 힘든 촉감에 놀란 라일에게 묵념을. 그리고 매워 죽겠지만 근성으로 근엄하게 버티는 건담님세츠나에게 박수를.
요즘 더블오로 이것저것 하는 데 재미 들리신 윈디 언니가 요런 것을 내놓으셨습니다. 이래 놓고 저보고 쓰는 글마다 염장이라고 뭐라고 하십니다 흥핏쳇. 저는 많이 억울합니다.
저는 원문 보고 기껏 생각한 게 나는 너를 위해 리본즈 뒤통수를 때렸지 나의 티에리아 이런 거 정도였다고요 흥. 그나저나 저거 찾아보면 시는 참 좋죠. 연시가 아닌 거 같은데 연시로 읽으면 굉장히 무시무시하군요. 이래서 시인이란. 예전에 글 쓰는 것들은 죄다 지옥에 떨어질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못 쓰는 사람들은 아마존 밀림이랑 에너지랑 낭비한 벌로 지옥에 떨어지고 잘 쓰는 사람들은 글로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 죄로 지옥에 떨어지고. 중독되게 만드는 것도 죄는 죕니다......중독당한 게 죄라고요 아 네 압니다 낚인 게 바보죠. 이래도 지옥가고 저래도 지옥가는 거 기왕이면 잘 써서 지옥가면 좋지 않겠나 싶었지만 어린 날의 치기 어린 꿈이었을 뿐이고. (먼산)
그래서 언니에게 답해드리는 의미에서 저는 기형도를 골랐습니다. 무난하게 엄마 걱정.
록온 생각
뒤나메스 타고 전장에 간 내 록온 안 오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세상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생각해봐도 록온 안 오네, 엑시아 닮은 얼굴 안 보이네, 어둡고 끔찍해 금간 기체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앉아 이를 악 물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예이츠에 이어 브레히트를 읽었고 그 다음으로 릴케를 읽어야 하는게 아닌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나날입니다. 그러고보면 알렐루야는 진짜 윤동주 하나면 되니 너무 좋아요. 정말이에요. 윤동주 시집엔 순이라는 미지의 아가씨 이야기도 나온다고요.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男)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 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 온 그 거북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야 지금은 화젓가락만이 불쌍한 우리 영남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웨-- 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실 그날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 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었어요 오빠
언제나 철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 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웨 그 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야 기어올라가든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백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야 제가 영남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었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바루르 밟는 거치른 구두 소리와 함께-- 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 그래서 저도 영남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의 일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뚫어트리고 영남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 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 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든 쇠 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어요 그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나는 우리 오빠 동모의 소식을 전해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었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이가 있고 그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듯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항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 것이겠습니까 슳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 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의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야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는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누이동생
카프가 단순하니 참 재밌단 말이죠. 임화는 한 떨기 꽃.......이 아니고!!!! 저 시만 교과서에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는........저게 그나마 시로 보이기 때문이리라고 생각합니다. 메이데이 어쩌고 하는 것도 봐줄 만 했어요. 나머지는 아 이 썩을 놈들이 문학이랑 삐라를 구분을 못 해서!!!!
흠흠, 죄송합니다. 아무튼 저기서 우리 피오닐 어쩌고 하는 대목을 세츠나를 보면 가끔 생각해요. 록온 때문인 듯. 그래서 저걸 베이스로 써 봤습니다.
록온 스트라토스, 네가 가고 나서 CB는 대파됐다. 언제나 네가 우리 건담이라 부르는 세츠나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 든 시간이며 제 인생을 GN 입자에다 푹 절이고 살던 그 엑시아도 대파됐다.
그래서 지금은 톨레미만, 남은 나처럼 꼭 너를 록온을 잃은 뒤나메스 같이 우주에 둥둥 떠 있다.
록온. 난 이제야 좀 알겠다. 왜 그날 네녀석이 내가 기어코 막아놓은 패스를 뚫고 연장 들고 나갈 때 하로 머리만 말도 안 하고 계속 쓰다듬었는지 이제 자알 알겠으니 일단 이 악 물어라.
언제나 내가 세츠나나 알렐루야를 보며 전부 천 번 만 번 고쳐죽어 마땅하다 하면 너는 피곤해도 어쨌건 웃으며 형님인 척 오지랖 신공을 발휘하던 주제에 왜 그 날은 우리한텐 말 한 마디 없이 복수하겠다고 총을 들고 나갔는지, 네 어리석은 마음을 좀 알 것 같다 그후 조각조각난 뒤나메스의 파편 속에서 네 어리석......아니 질긴 복수심......아니 다메남 근성.......아, 아무튼 네 각오는 잘 봤다. 그래서 내가 너를 잡으러 가지도 못 하는 동안 대파된 뒤나메스와 파편들과 함께 가 버리지 않았나.
그 주제에 너는 끝까지 오지랖만 우주 최고더구나. 그래서 나도 세츠나도 세상이 왜곡되는 소리를 여기저기서 들으며 나는 볼레로 바느질에 손톱을 뚫어트리고 세츠나도 어딜 갔는지 열심히 헤매고 있다 잡히면 일 단 한 대 패고 볼 생각이다.
염려하지 마라. 나는 무려 네가 짐작하던 대로 인간이 아니....아니 아무튼 건담 마이스터이고 세츠나도 네가 늘 칭찬하던 소심줄 같은 고집.......이 아니고, 무뚝뚝한 성품......이 아니고,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없.....아니 이게 아니고! 아무튼 네 동생 아니냐 그러고 참 아까 볼레로를 다 만들었다. 하는 김에 네 것도 만들었다. 물론 녹색이다. 못 입는다고 약올라하지나 말거라. 부러워도 하는 수 없다. 그러게 먼저 가랬냐. 걱정하지 마라. 톨레미는 좀 부서져도 CB는 내가 있으니 건재한 거 아니냐. 알렐루야가 큐리오스랑 없어지긴 했어도 뭐 세츠나도 있고 내가 있다는데 뭐가 문제겠냐.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나만 있어서 될 일이 아니더구나 스메라기 술병 들고 날랐다. 알렐루야 놈은 태양로만 보내면 다냐. 세츠나는 뭐 하는지. 하여간 끝까지 속을 썩인다. 이젠 슬프지도 않고 화도 안 난다. 세상에 록온 너의 무수한 다메남 동지가 있고 너를 잃은 내 동지들도 한 둘은 아닌 성 싶은데 그다지 인생에 도움은 안 된다.
저기, 세츠나가 어린애입맛이잖아요? 핫도그나 먹고. 그런데 사실 핫도그 먹는 거 보면 종교 버린 거 보여주고 싶었던 거 같기도 하거든요. (규범에 맞게 도축된 것도 아니고 무려 돼지고기) 돼지고기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세츠나는 돼지 좋아할 거 같고. 그래서 인혁련 소속 모 반도국에 와서 짜장면 먹는 세츠나를 망상했습니다.
-이 음식은 이런 곳에서 먹어야 가장 맛있다고 한다. 세츠나는 어디서 배웠는지 능숙하게 젓가락질을 하며-현지인으로 위장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아이였다.-면을 비비고 있었다. 검고 기름진 소스가 면에 묻어났다. 채소와 고기를 볶아넣은 듯, 돼지기름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그리고 식초냄새가 진동하는, 얇게 썬 반달모양의 채소와 양파가 검은 소스와 함께 놓여있었다. 식전 전채인가 하고 입에 물어 봤다 후회했다. 식초에 절인 무였다. 그 옆에는 양념통이 세 개-무언지 확인해 볼 마음도 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붉은 장식을 한 가게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는 듯도 했다. 인혁련 전래의 글자라는 괴상한 문자가 벽에 붙어있었고-세츠나에게 묻자 입춘대길이라고 읽는다고 했다. 그건 또 무슨 뜻인데?- 벽에 붙은 긴 메뉴판은 네모지게 생긴 글씨로 읽을 수 없는 메뉴 이름이 주욱 적혀있었다. 아무 말 없이 따라오라며 사람을 데려오더니 마음대로 이상한 국수를 주문하고, 난 젓가락질 할 줄 모른단 말이다....... 젓가락을 들고 부들부들 거리던 라일은 항의했다. -야, 하필 여기냐? -여기가 어떤가. 면 불어터지니 어서 먹어라. 세츠나는 오늘도 근엄했다. 예, 어련하시겠어요. 그렇지만 난 얌전히 못 먹겠다 어쩔래. 라일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빡빡 머리를 깎고, 세월의 변화에 뒤쳐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몇몇 있었고 검은 색 국수를 먹고 있었다. 하나같이 짐보따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옆에선 희고 네모진 뭔가를 손에 들고 훌쩍이는 노모, 그 앞에선 화를 내며 국수 먹는 남자를 노려보는 여자........ -짜장면은 교도소 앞이 제일 맛있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테러리스트가 교도소 앞에서 밥을 먹냐? 뭐 하는 짓인데? 전직 카탈론 멤버이자 현직 테러리스트는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청년을 노려보았다. -짜장면은 또 뭔데? 들은 척도 않고 세츠나는 하던 말만 계속했다. -이 나라에선 300년전부터 교도소에서 출소한 사람이 가장 먹고 싶어하는 음식이 짜장면이었다고 한다. 이 나라만의 독특한 국수지. 그래서 교도소 앞 짜장면집은 다 맛있다고 한다. 이 집은 대대로 교도소 앞에서 짜장면을 팔았다고 한다.어서 먹어라. 아, 그렇구나. 자신이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었던 것을 먹여주려는 배려였던 거다. 어느새 자신의 면을 다 비빈 세츠나는 언제 봐도 대인배다운 근엄한 얼굴로 라일의 그릇을 당겨와 면을 비벼주었다. 야, 그거 내 거........하던 라일은 입을 꾹 다물고 세츠나의 손만 쳐다보았다,주위를 둘러보니 면을 비벼주는 쪽은 모두 형이거나 아버지거나, 혹은 애인이었고 면을 비비는 상대를 보며 어쩜 잘 비비기도 하지 하며 감탄하는 쪽은 어린 동생이거나 아이거나 뭐 그랬다는 건 넘어가자.
세츠나가 열심히 비벼준 국수는, 짭짤하고 달고 기름졌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맛이었다. 남기지 말고 먹으라는 세츠나의 말을 들으며 라일은 뭔가 좀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뭐 어떠랴. 눈 앞의 청년이 보여주는 무뚝뚝한 배려는 기꺼웠다.
잠시후 젖소마냥 검은 얼룩을 온 얼굴에 묻히고 라일이 귀함하자마자 베다는 풋, 웃음소리만 남기고 접속을 종료했다는 건 비밀이고. 얼룩을 지우겠다고 허둥대는 라일의 얼굴에 묻은 것을 세츠나가 입으로 닦아준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대하드라마 격동 300년. (두둥- 둥둥둥) 제 21.75화. 니트와 쿠데타. 나레이션 : 지난화. 정권을 오래 유지하려는 리본즈 알마크의 위대한 의지는 국부 이오리아 슈헨베르크의 유지를 이었노라는 유일한 정통성이 무너지는 시점에서 저지당하고 만다. 국부의 뜻을 이어받은 정통성의 증거로 GN드라이버가 쌍으로 달린 더블오 건담을 몰고 유신정부를 압박하는 셀레스티얼 비잉을 필두로 군부 중 불만을 가진 세력이 일부 체제전복의 뜻을 표시하며, 그 와중에 이놈이고 저놈이고 믿을 수 없다며 민중들의 손으로 조직한 레지스탕스 카탈론이 등장하기에 이르니, 공포정치와 언론탄압만으로 거센 폭동의 불길을 끌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쯤에서 ‘우민들의 멍청한 폭동’을 저지하기 위해 리본즈 알마크는 더블오건담을 빼앗을 계획을 세우고 마는데…….
리본즈 알마크의 집무실에 한 이노베이터가 나타난다. (문 열리는 소리) 리제네 : 리본즈, 리보온-즈으-. 리본즈 : (짜증섞인 목소리로)각하라고 부르랬잖아. 리제네 : 어울리지도 않는 아시아 독재자 흉내는 그만 내라니까. 안 어울려. 리본즈 : 그만해 둬. 리제네 : (생글생글 웃는 듯한 목소리로)하지만 사실인 걸. 정말 안 어울려. 리본즈 : (의자에서 일어나는 소리) 아무래도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운 모양이군. (구둣발 소리. 그리고 잠시후, 철썩 사람 뺨을 때리는 소리) 리본즈 : 적당히 하고 내 말에 복종하는 법을 익히도록 해. (독백) 이건 니트 주제에 꿈도 희망도 없어요. 아니 니트라 그런가. 리제네 : 응? 리본즈 :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의자 빙글 돌아가는 소리) 그런데 무슨 일이지? 리제네 : (어이없어하는 자신의 마음이 침묵을 통해 전달되기를 간절히 빌며) 아닙니다. 각하. 리본즈 : 그런데 리제네, 그 일은 어떻게 됐지? 리제네 : 그 일이라면? 리본즈 : 예의 그 일 말일세.
나레이션 : 리제네 리제타. 다른 이노베이터들이 모빌수트 타고 뭐 빠져라 노동할 때 홀로 우아하게 텔레비전이나 보고 니트질이나 하기로 유명하다. 근 3개월간 한 가장 큰 노동이 벼랑에서 90도로 걸어내려온 일이라는 점은 게으름과 뭐든 훗 웃어넘기기를 미덕으로 삼는 이노베이터들 사이에서도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의견마저 등장하고 마는데. 이에 위대한 독재자 리본즈 알마크, 손수 리제네에게 일을 맡기시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리제네 : 베다의 위치 말씀입니까. 리본즈 : 그래. 이제 너도 쓸모있는 일 하나쯤은 해야하지 않겠어. 리제네 : (별 거지같은 소리 다 듣겠다는 목소리로) 어차피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요. 리본즈 : ……. 리제네 : 눈이라고 뚫려있으면 알 거 아닌가요. 리본즈 : ……. 리제네 : 말이야 바른 말이지 솔직히 각하라고 뭐 쓸모있는 일 하신 게 있습니까. 맨날 폼만 잡으면 다냐고요. 기껏해야 티에리아랑 춤이나 추고 세츠나 앞에서 잘난 척 설교나 하고말입니다. 그 외엔 뭐예요, 그냥 훗 하고 웃지 훗 하고 웃지 훗 하고 웃지. 솔직히 소파에서 리모콘 돌리는 게 웃는 거 보다 더 힘들어요. 난 손가락이나 움직이지 뭡니까 당신은? 솔직히 말씀하시죠. 맨날 우리가 계획에 대해 물으면 훗 하고 웃기만 하잖아요. 아무 생각 없는 거 맞죠? 리본즈. ……. 리제네 : 그러면서 무슨 큰 계획 있는 거처럼 폼이나 잡고 일이나 벌이고. 그 파티도 그렇죠. 대체 그런 쓸데 없는 짓은 왜 했대요? 아, 우리 티에리아랑 춤추고 싶어서 연출하신 거 맞죠? 안 그러고서야 그런 프릴 달린 옷을 준비해 올 이유가 없잖습니까. 솔직히 엄청 기대했죠?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프릴, 이노베이터들 사이에도 악명 높아요. 그게 뭡니까 센스 없이. 하긴 리본즈 센스야 유명하지요. 프릴이랑 이 제복 만 봐도 그래요. 대체 취향이 왜 그 모양입니까. 리본즈 : (또박또박 한 글자씩 힘주어 발음한다.)……리제네 리제타. 리제네 : 왜요, 틀린 말 했어요? 사실 그렇잖아요. 이노베이터가 세상을 통제하겠다는 것도 사실 그냥 편하게 니트질 하기 위해 권력의 정점을 쥐겠다는 거 아닙니까. 내 말이 틀려요?
나레이션 : 그 날 리본즈의 표정은, 측근들의 말에 따르면 완전히 정곡을 찔린 자의 그것이었다고 한다.
리본즈 : 넌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군. 리제네 : 이것은? 리본즈 : 나는 상위종으로서 너희들의 정신 정도는 문제없이 조종할 수 있어. 알고 있겠지? 리제네 : (경악한 목소리로) 아, 이것만은…….
나레이션 : 이노베이터만의 신비한 능력으로 위대한 영도자 리본즈 알마크가 리제네의 정신을 지배하려는 그 순간.
(철컥, 하는 총소리) 리제네 : 죽어라 리본즈! (총소리가 크게 울린다. 그리고 뭔가 털썩 쓰러지는 소리) 리제네 : 휴, 겨우 끝냈네. 리본즈 놈 치사하게, 내가 좀 니트질좀 했기로 뭐가 어쨌다는 거야.
나레이션 :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리본즈 : 리제네. 안심하긴 이르지 않아? 리제네 : (헉 하고 숨을 삼키며) 리본즈!
나레이션 : 리본즈 알마크는 친히 부활하는 기적을 보여주신 것이다.
리본즈 : (천천히 걸어오며) 내가 괜히 상위종인 줄 아나. 그리고 나는……세번째다. (총소리) 리제네 : (쓰러지며)20세기 오타쿠들 농담은 또 어디서 배웠…….
(뭔가 쓰러지는 소리) 나레이션 : 리제네의 피가 집무실의 양탄자를 적시는 그 순간에도 리본즈는 냉정했다고 한다.
리본즈 : (독백하듯) 니트질은 내 특권이다. 건방지게 네가 니트질을 하려고 들어?
나레이션 : 이렇게 리제네 리제타의 반란은 어이없이 진압되고 만다. 그러나 리본즈 알마크는 몰랐다. 니트질을 하며 이리저리 생각만 굴린 끝에 고도로 발달하고 만 리제네의 잔머리에 대해서. 격동 300년, 다음주에 계속.
아무리 많은 나라가 사라졌다 생겨나기를 반복하더니 거대한 초국가연합이 생겨난 24세기라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많다. 전통이라고 불러도 좋고 관습이라고 불러도 좋고, 뭐 그런 것들이 있다. 그것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부분이 이름이다. 이름이란 것은 대대로 물려받는 것이다. 자신들의 부모가 지어준 대로 그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이니까 잘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민 중위, 동양계 이름이다. 중국 아니면 한국계겠지. 그리고 스밀노프 중위. 누가 봐도 러시아계 이름이다. 러시아인의 이름엔 굉장히 재미있는 게 많다. 본명보다 더 많고 부르는 사람에 따라 섬세하게 구분이 되는 애칭이라던가... 그리고 저기 스밀노프 중위가 온다. 가까워진다. -뭐 하고 있었나? 중위님의 성함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이라고 누군가 대답한다. -내 이름? 뭔가, 궁금한 거라도? 그저 러시아계 이름 같아 궁금하다고 말했다. 소위는 밝지 않은 표정으로 답한다. -아버지가 러시아계니까. 스밀노프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인혁련에서 군생활을 한 어느 중사가 말했다. 세르게이 스밀노프, 러시아의 성난곰이라는 별명이 붙은 군인에 대해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중사는 눈치가 없었다. 이 자가 뭘 해서 승진을 했는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상해진 분위기를 수습한답시고 누군가 중위님 아버지 일은 참 안 됐다는 말까지 꺼냈다. 처참했다. 눈에 띄게 스밀노프 중위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런 자는 아버지도 뭐도 아냐. 나는 군인정신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 자를 내 아비라 인정 못 하네. 나도 군인이 아닌가. 중위는 이를 악 물고 소리치듯 말했다. 참 웃기는 일이었다. 버쩍 얼어붙은 동기들과 후임들 사이에서 나는 그를 관찰했다. 사람이 주먹을 쥐고 화를 낼 수는 있어도 이를 악 물고 소리지르지는 못한다. 이를 악 무는 것은 참는 것. 그 자신도 무언가를 참고 있는 것이다. 본인이 인지 못 하는 무언가를. 러시아에는 이제 너무 오래되어 잘 쓰이지 않는 풍습이 몇 개 있다. 러시아 땅에선 관습적으로 쓰여도 러시아를 벗어나면 쓰이지 않는 호칭, 부칭이 있다. 아버지의 이름은 자식에게 전해지고 그렇게 이름은 영원히 남는다. 안드레이 세르게예비치 스밀노프. 세르게이의 아들 안드레이.
-------------------------------------------------------------------- 24화 보기 전에 생각하던 건데 말입니다, 타이밍 놓쳐서 쓸까 말까 했거든요. 시간 없고 화수 모자라니까 이해가 아주 빨라져서 좋......긴 개뿔이 좋아요. 괜찮아요 루이스 살아온 건 아예 잊고 있었는데요 뭐. 전 정말 기절했다 일어난 줄 알았다고요.
쿠로다가 그냥 저렇게 살려두진 않았을 거라 믿으렵니다. 아직 마리나도 무사도도 아무 것도 못 했습니다. 할렐루야는 이제사 알렐루야와 인사를 했고 말이죠 라일은 이제 막 록온이 되었을 뿐이에요. 아직 할 일 많습니다. 이렇게 끝내면? 뭐 다른 의미로 레이드 들어가는 거죠.
아무튼 러시아식 부칭은 좋아요. 안드레이는 세르게이의 아들입니다. 너 임마 소마는 그거 갖고 싶어도 못 가졌거든.
백야 님의 하로에 붙은 록온 유령 설정을 차용한 지벨님의 글을 보고 쓰는 그으러니까 이게.....4차 창작 되겠습니다. 두 분 죄송해요.
수중에서 우주로 고속이동을 하는 동안 복도에 구르는 하로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로의 주인도 하로를 챙겨가지 못한 듯, 아니, 하지 않은 듯 했다. <꺄아아아~!> 그 결과 톨레미 이동간을 온 몸으로 통통 튀며 굴러가는 하로를 동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바빴고 하로를 챙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로, 하로! 라일 이 녀석은 전투중에 하로도 안 챙겨가고 뭐 하는 거야? 하로에 붙어 반투명한 손으로 벽을 잡으려고 아무리 애써 봐야 소용없다는 사실도 잠시 망각하고 이동간을 잡아보겠다고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고 있는 고 닐 디란디(향년 24세) 빼고.
사건 종료 후. 시무룩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힘없이 하로 가지고 공 던지고 받기 놀이를 시전하는 라일 덕분에 하로에 붙어 사는 기생 유령 닐 디란디의 얼굴은 아래위로 마구마구, 사정없이, 흔들흔들거리고 있었다. 반중력 상태라 지상에서처럼 곱게 공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꼭 달랑대는 용수철 끝에 달린 얼굴 같았다. 반투명한 얼굴이 왔다갔다 하는 걸 보니 어지럽다. 그 얼굴 주인은 유령이라 그런가, 어지럽지도 않은 모양인지 혈육을 상대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라일은 하로를 던지고 받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우야. "왜." -우리 대화 좀. "해." -너 너무 성의 없지 않냐? "뭐." -하로는 저격형 건담 탑승 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파트너야. "그래서." -잘 챙기라 이거지. 전 주인으로서 하는 말인데 정말 좋다니까? 끼고 다니면 옆구리에 딱 맞는 사이즈 드디어 한계다. 라일은 허공에 떠 있는 하로에다 대고 소리질렀다. "형, 고만 해라 좀. 오늘은 트랜잠으로 톨레미 끌고 가는 거였잖아. 그게 하로랑 뭔 상관이야!" -야, 밥도, 아는, 자자,로 일관하다 드디어 세 마디 이상 말 했다? "때와 장소와 인종과 안 맞는 유머 즐." 아예 고개를 홱 돌리자 사람은 도저히 따라 못 할 자세로 닐의 얼굴이 라일의 얼굴 앞에 따라왔다. -너 뭔 일 있었냐? "그딴 거 없어." -아까 세츠나랑 심각한 이야기 하지 않았어? "대체 어디까지 따라다니면서 스토킹할 셈이우?" 아 젠장. 불었다. 이건 내가 아까 걔랑 심각하게 형님 사망 원인에 대해 이야기했다......까진 아니라도 어쨌던 분 건 분 거 맞잖아.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대화 안 하겠다는 뜻으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았으나, 유령이 달리 유령이 아니다. 우습게 보면 안 된다. -하로는 기능이 좀 다양해서. "......" -다 들었어. 눈을 떠 보니 형이 웃고 있었다. -우리 라일이, 정말 다 컸네, 이 형 진짜 기쁘다. "아, 좀." -그렇잖아. 거기서 욱, 할까봐 걱정하기도 했고 거기서 형의 원수! 이럴까봐도 걱정했는데. 어이없는 반응에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형이 살아있다면 멱살이라도 잡아주는 건데, 이럴 땐 죽어서 정말로 불편하다. 실제로 살아있다고 해도 멱살 이상 못 넘어갈거라는 내면의 빈정거림은 무시하고. "내가 형이야? 나이는 공으로 먹은 줄 알아? 형같이 이상한 데서 욱 해가지고 죽을 자리 안 가리고 뛰쳐나가는 나쁜 취미 없거든?" -그거 아니라도 여러가지로 기뻐. 닐이 정말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 애들에게 더 이상 큰 짐은 없었으면 하거든. 고맙다. 내가 못 한 일을 해 줘서. 저 애들은 분명 다른 마이스터들을 말하겠지. 은근히 속이 터졌다. 걔들 좋으라고 한 일 아니거든요, 머저리 같으신 우리 형님아. 라일은 짜증나는 얼굴로 공중에 둥실 뜬 하로를 낚아채서 양손으로 잡고 세게 흔들었다. 하로와 하로에 붙어 사는 유령이 동시에 비명을 내질렀다. <라일! 라일! 심술! 심술!> -얌마, 하로가 심술부리지 말라잖아! 나 멀미했어, 어지럽다고! 라일은 한숨을 쉬었다. "형 거짓말 너무 티나. 세상에 어떤 유령이 멀미를 한다고." -넌 유령도 되어본 적 없으면서 어떻게 그런 섭한 소릴 하냐 아우야. 빠직. 야 이 망할 형님아 유령 먼저 된 게 무슨 자랑거리라고 그딴 소리나 하고 앉았습니까? "지금 그거 자랑이라고 해?" -글쎄. 닐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듯 손을 들며 웃었다. 아, 형이 또 엄마 노릇 하고 있어. 생전 내 앞에서 자기 자랑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는 인간이 저럴 땐 이유가 있는 거지. 처음에 하로에서 형이 튀어나왔을 땐 응, 이거 내 입체영상인가 했는데 그놈의 입체영상이 익숙한 말투로 말을 걸고 있지 않나. 15년 지나도 저 썩을 형님의 말투는 변한 게 없다. 날 배려해준답시고 되지도 않은 농담따먹기나 하고. 그래가지고 언제 천국 갈래? 아차, 테러리스트는 못 가나......아무튼! 요단강은 건너야 될 거 아냐 이 쓸모 없는 형님아. 라일은 형을 보고 억지로 미소지었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기 형, 나 뭐 하고 싶은 거 있는데, 해도 돼?" -응? 우리 동생이 뭐가 하고 싶어서 형한테 다 물어볼까, 상냥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려던 입은 입꼬리만 위로 올라간 시점에서 굳고 말았다. 라일 디란디는 하로를 손에 힘줄이 서도록 거머쥐고, 입꼬리를 부들부들 떨며 하로를 머리 위로 번쩍 쳐들고, 전심전력으로 벽에 집어던지고 말았다. 하로와 함께 닐도 둥실둥실 벽으로 날아갔고 잠시 좀 정신사나운 소요가 방 한가운데서 벌어졌다. 반중력상태라 감사하게도 하로는 무사했다만 닐은 비통한 표정을 짓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야 하로한테 그러지 말라니까! <꺄아아악! 사이좋게! 사이좋게!> "저 놈의 기계 박살 안 날 거 감안해서 던진거요, 뭘 모르시네. 내가 애도 아니고 그렇게 앞도 뒤도 안 재고 행동할까봐?" 유령이 피식 웃었다. -미안한데 동생아, 내 눈에 넌 그냥 애야. "지랄! 형 나보다 겨우 5분 일찍 태어난 걸로 형 행세 하지 말라니까!!!" -그런 소리 하려거든 아우야, 형, 형 소리부터 입에서 떼지 그러냐? 네가 날 형이라고 부르는 이상 네가 나보다 애라는 것도 뻔한 거 아니겠니? 뻔뻔한 얼굴로 웃는 닐의 얼굴에 짜증난 라일이 문을 열고 하로를 복도에 던져버리고, 지나가던 티에리아한테 걸려서 건담마이스터의 마음가짐에 대한 간결명료하고도 무시무시한 연설을 듣게 되었다는 건 그냥 뒷이야기. 그렇게 형과 치고 받고 나서야 라일은 아무 꿈도 꾸지 않고, 고민도 없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는 것도 그냥 뒷이야기.
복도에서 가면을 주웠다. 척 봐도 누구 건지 알겠다. 이름은 자세히 기억이 안 나는데, 군대에 있는 주제에 계급도 뭣도 없는 인간이었다. 원 맨 아미니 미스터 부시.......부시.......하여간 뭐라고 불리는 인간이었는데 군복 위에 이상한 옷을 입고 가면을 쓰고 다니는 또라이였다. 우리 부대, 아니 어로우즈 전체에 그에게 호감을 가질 사람이 있을지 모를 아주 희한한 인간이었다. 군인은 소속과 계급과 상명하복이 생명이다. 그것이 아니면 군대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 중에도 그는 군대에 있으면서 홀로 군인이 아니었다. 군복도 안 입고 계급도 없고, 게다가 혼자 다닌다. 세상에 혼자 싸우면 그게 군대냐. 원 맨 아미라니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개념 아닌가. 신병 딱지도 못 뗀 꼬맹이들도 그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원 맨 아미라고 해도 리바이브 대위던가 하는 좀 괴상하게 생긴 사람은 그나마 똑같이 괴상해 보이는 동지라도 있지. 이건 완전히 혼자였다. 군인도 아닌 주제에 군인 집단에 끼어든 잘못된 존재가 저런 거지. 옛날 동양 속담에 개밥에 도토리라는 소리가 있다던데 이 사람이 도토리가 아닌가 싶었다. 아니 우리가 개밥이라는 건 절대 아니고. 우리와 한 데 섞여 어로우즈라고 불리기 싫은 거겠지. 그러므로 그와 무엇이건-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는 사소한 일부터 전투같은 큰 일까지-함께 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건담만 보면 미친 듯 웃으며 달려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그냥 별 이상한 놈 다 있구나 할 뿐, 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없는 사람이었다. 남에게 호감도 불쾌감도 주지 못하는. 그런데 그 사람이 떨어뜨린 가면을 주웠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인가, 가면을 주워 들자마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의 정체는 금방 밝혀졌다. 웃기게도 그 가면을 얼굴에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대체 그 또라이는 이딴 걸 어떻게 쓰고 그딴 기체에 타서 허공에서 380도 회전을 하고 날아다닌대? 사실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렇게 괴상한가? 떨리는 손으로 가면을 뒤집어가며 꼼꼼히 살펴보자 이마께에 뭐라고 글자가 적혀있었다. 작은 글자라 가면에 코가 닿도록 가까운 거리까지 눈을 댔다. 적혀있던 글자는 다음과 같았다.
-착용 세 시간 전부터 세안을 금합니다. 원활한 유분 분비를 위한 것이니 피부미용에 관계된 항의는 받지 않습니다. 유분 분비가 적은 체질일 경우 콜드크림 사용을 권장합니다. 가까운 드럭스토어에 문의하세요.-
자세히 살펴보니 종이와 필름 같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과연. 누이들이 이마에 톡톡 찍어문지르던 파란 필름이 떠올랐다. 누이의 손길이 가면 파란 종이가 기름에 푹 절어 기분나쁘게 투명해지던 기억이 떠오르자 굉장히 우울했다. 그 투명한 종이가 누이의 이마에 척 달라붙어서 안 떨어지던 기억도. 누구 기름종이가 더 오래 이마에 붙어 있나 내기하던 더러운 자매들에까지 기억이 미치자 그만 콱 머리를 때리고 싶어졌다. 나는 조용히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고, 가면을 손가락 끝으로 집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확 불지르고 싶었지만 불이 너무 잘 붙을 것 같아 차마 하지를 못했다. 그 놈은 그냥 또라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 저 그레이엄 좋아합니다. 어쩌다 2기 되면서 그 지경이 되었는지도 좀 알 거 같고 말이죠. 사실 원 맨 아미가 말이 되는 소립니까. 쟤는 이제 군인도 뭣도 아니에요. 자기가 믿던 옳은 세계는 없어요. 그래도 건담과는 싸우고 싶고. 자기 모순 때문에 저 지경이 된 걸 보면 참 어지간히도 곧은 사람이다 싶고.
그래도 그 가면은 뭔가 이상하잖습니까. 그게 다예요. 그레이엄 망가뜨릴 마음은 없었습니다, 정말로. 제목은, 그냥 미시마 유키오가 생각나서;
그곳은 묘지와 같았다. 묘비도 꽃도 없는. 아니, 꽃이라면 있다. 파편의 잔해를 뒤덮은 무성한, 들짐승의 털처럼 길게 자라 아무렇게나 몸을 뻗고 있는 풀 사이사이에 보이는 것은 작고 희미한, 색도 향도 바랜 듯한 작은 꽃이었다. 마치 묘비 앞에서 조용히 시들어 부서지는 꽃잎처럼 얇고 바삭거리는. 꽃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청년을 맞이하듯.
성묘할 곳을 잘못 고른 것일까. 파편 더미 위에 선 청년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이 곳 이외에 우리들에게 어울리는 묘는 없어. 미간에 힘을 주고 청년은 마치 자기 자신을 타이르듯 아무도 들을 사람 없는 허공에 말을 던졌다. 청년이 발을 옮기자 발 밑의 파편이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덜그럭거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기우뚱거리며 흔들리던 파편 무더기가 기어코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조용하던 공간에 파문이 일었다. 가뜩이나 울퉁불퉁 불안한 지반에다 불안정한 걸음 탓에 균형을 잡지 못해 조금 크게 발을 내딛자 쾅, 하고 내려앉은 금속조각이 흙먼지를 일으켰다. 몇 년을 조용히 버티고 있는 동안 그 위에 쌓인 흙먼지가 떨어져 부옇게 작은 폭풍을 일으키며 부풀어 올랐다. 소란통에 그 속에서 살던 쥐가 마치 조용한 생활을 방해받은 것을 항의하듯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다. 6, 7여년간 누구도 접근하지 않던 공간에 비로소 소리가 울렸다. 이걸 노크라고 봐도 좋을까. 무덤을 두드리며 인사를 하는 것과 같다고. 지금의 자신은 너무 감상적이지 않은가 하고 청년은 생각했다.
무덤을 손질할 필요도 없었다. 그 곳은 이미 작은 숲의 일부였으니까. 사실 무덤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시신이 묻힌 곳은 따로 있으니까. 하지만 거기 까지 가서 묘비 앞에서 손을 모을 필요도, 죽은 이들에게 향이니 기도니 하는 것들을 바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무덤도 아닌 그 곳에서 계속 걷고 보았다. 한 때 프톨레마이오스라 불렸던 전함이 반토막난 채 기체 이곳 저곳이 부서져나가 작은 파편더미를 이루고 있는 곳은 넓었다. 기계를 이루던 부품들이 너절하게 떨어져나갔다. GN 드라이브 같은 것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남은 것은 조각뿐. 게다가 톨레미가 떨어져 부서지며 떨어져나간 파편조각이 튀어나가면서 숲도 제법 많이 상처를 입었다. 허리가 꺾인 나무가 그 속을 빈약한 햇빛에 노출시켜 하얗게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어 이렇게 된 것인지는 다 알고 있다. 톨레미 밑에는 케루딤이 짓눌려 있을 것이고 산 하나를 넘으면 세라비가 풍화되듯 낡아가고 있다. 더 멀리엔 아리오스와 GN 아처가. 물론 껍데기 뿐이고, 그나마도 이곳 저곳이 떨어져나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것이 한 때 건담이었다고 생각 못 하겠지만. 북반구 어느 험한 산은 골짜기 골짜기가 거대한 무덤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 격전지에서 목숨을 잃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주에서 죽은 이들도 있었고 살아서 우주에, 지구에서 지금도 자기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이들도 있다. 이곳에서 죽은 이도 있고 다른 전장에서 죽은 이도 있다. 청년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모든 죽음의 순간을 떠올렸다. 7년 전, 셀레스티얼 빙이라는 조직 그 자체가 죽었다고 봐야 옳으리라. 자신들이 낳은 세계의 부조리와 함께 죽었다. 몇 년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로 죽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죽었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셀레스티얼 빙이 죽으면서 그 모든 것들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세상이 조금 더 살 만한 곳이 되기를 바랐다. 죽어서 속죄한다는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저 죽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이었을 뿐. 청년은 성격 좋은 조타수를 떠올렸고 차례차례 죽은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특이한 반쪽을 가졌던 동료와 그의 난폭한 반신과 역시 두 얼굴을 가진, 동료의 반려를, 사실은 아주 약해서 도망치기 바빴던 전술예보관을, 자신과 언젠가 편지를 써서 보냈던 소녀를, 이노베이터였으나 누구보다 사람다웠던 동료를, 좋아하는 소녀 때문에 전장에 뛰어들었던 이웃집 소년을, 카탈론의 테러리스트였지 셀레스티얼 빙은 아니었던, 죽은 이와 꼭 닮았지만 전혀 달랐던 반쪽을. 청년은 왼손으로 파편 새로 빠져나온 빛바랜 녹색 조각을 주웠다. 뒤나메스와 같은 색 조각이 가장 먼저 죽은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록온 스트라토스.
아직 어렸던 시절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어려서 저지른 실수는 되돌릴 수 없으며 세상에 신 같은 건 없다고 좌절했을 때 나타난 신은 자신이 죽어라 부정하던 것이었다. 결국 낳아준 부모와 소년병으로 키워준 아버지와 다시 살게 해 준 아버지를 모두 잃었다.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동료이고 형제이며 평생 넘을 수 없는 벽 같았으며 어머니보다 어떤 면에서 자애로웠던 남자만큼은 남아있었다. 그가 세츠나에게 너만은 변하라고 말해주었다. 과거는 수정할 수 없지만, 꼭 너만은 변하라고. 피투성이 과거를 헤쳐 나오라고.
그 날부터 7년간 자신은 굉장히 많이 자랐다. 그리고 혼자 살아남았다. 세츠나 F 세이에이도 아닌, 소란 이브라힘도 아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이 되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잔다. 가끔 꿈을 꾸면 그 전장이 나온다. 더블오가 부서지던 장면에서 언제나 깨고 만다. 아무도 구하지 못했고 세계의 왜곡을 찾아내지도 못했다. 자신은 건담도 아니고, 세상은 그렇게 바꾸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아직 그 과거를 헤쳐 나오지도 못했다. 그래도 평범하게 살고 있다. 이웃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고 혼자 밥도 해 먹고. 얼마 전엔 터번을 두르고 외출했다. 옛날에 터번은 군대에 속하지 않은 자라는 뜻에서 쓰는 풍습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싸움을 하지 않는 자신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여전히 왜곡되어 있지만 그래도, 셀레스티얼 빙 같은 것이 없는 조용한 세계에서.
“록온.” 허공에 이름을 불렀다.
“내 생일이다. 스물아홉이 되었지.” 아무도 듣지 않는다. 하지만 듣는다면 먼저 간 록온도 다른 동료들도 모두 축하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걸 원한 건 아니었다. 물론 굳이 생일에 성묘를 온 것은, 그들이 보고싶어서긴 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보낸 자들이다.
“사후 세계가 어떻냐거나 다들 잘 있냐는 건 아니니 걱정 마라.” 어쩐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분명 살아있었다면 자신을 많이 걱정했으리라. 생전 사사건건 오지랖 넓게 간섭하고 들던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그 청년들보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 곧 서른이 되고, 아마 별 일 없으면 자연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은 이들이 간절히 바랐던 세상이었으나 자기가 그 세상의 일부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것이 당혹스럽다.
“축하인사를 받을 자격도 걱정을 들을 자격도 없다. 다만 하나 확인해보고 싶어서 여기에 왔다.” 아무도 답하지 않는다. 조용하다. 답해줄 사람은 없다. 그걸 알면서도 말을 꺼냈다.
“록온.” “나는 그 날 네가 바라던 그 사람이 되었나?” 정적이 흐르는 것 같았다. 물론 착각이다. 알고 있다.
"나는 제대로 변하지 못했어." 오른팔이 아팠다. 없는 팔은 당연히 아플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청년은 있지도 않은 팔을 감싸쥐고 허공을 우러러보았다. 싸움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세계에서. 어쩐지 먹먹했다.
원이 님 리퀘입니다. 술자리에서 삼자대면- 스메라기, 알렐루야, 록온 이렇게 말씀해주셨는데 셋이 붙여놓으니까 자기 방어들이 쩔어서 입을 안 떼는 통에 뭘 시키질 못해서 편법을 좀 썼습니다. 괜찮으실지 모르겠네요. 일단은 질 낮으나마 개그를 하고 싶어서 시도해 봤습니다. 수위는...........전혀 안 높아서 죄송합니다.
좋은 걸 들고 왔다며 록온이 꺼낸 것은 초록색 투명한 액체였다. -어머, 압생트네? 물감을 푼 듯 둔탁한 빛이 나는 액체를 보고 알렐루야가 이게 뭔지 고민하고 있는 동안 스메라기가 반색했다. -압생트? -그래, 이 술 이름이야. 좋은 걸 가져왔네, 록온. 요즘 이런 걸 만드는 데가 다 있어? 처음 듣는 이름을 한 번 더 발음해 보는 청년을 향해 술병을 든 청년이 밝게 웃었다. -내가 좀 유능하죠. 이거 전통대로 빚은 술이라서 더 각별하다더라고요. 그럼 셋이서 마셔 볼까요? 좋은 건 나눠야 한다는데. 알렐루야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 셋이 마실 거구나. 록온, 스메라기 씨. 또 누구지? 랏세 씨는 물자 보급 때문에 톨레미를 비웠고 이안 씨는 새 기기 시착 때문에 지상에서 할 일이 있다고 했는데. 그럼 한 명은......아. 생각을 멈추고 눈 앞의 얼굴들을 쳐다보니 록온과 스메라기가 알렐루야를 보고 씩 웃고 있었다.
-압생트 매직-
녹색 액체는 색깔처럼 풀과 박하향이 났다. 입안에 넣자 목이 아릴 만큼 독하고 썼다. 한 입 물고 인상을 쓰자 각설탕을 한 손에 들고 물을 찾느라 냉장고를 뒤지던 록온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던 것도 같다. -어, 알렐루야, 그거 그렇게 마시는 거 아닌데? -어, 아니에요? -설탕이랑 물 넣고 희석시켜야 되는데......야, 괜찮냐? -.......이거 물보다 알코올이 더 많은 거 아녜요? -응? 아마 그럴 걸. 머리가 핑 도는 게 보통 술이 아닌 모양이다. 모든 술을 물 마시듯 마시는 스메라기마저 얌전하다. 록온은 웃으며 잔을 채우고 있다. 스푼에 각설탕을 넣네 마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우주에서 그렇게 술 마실 수 있는 건가요. 애초에 특수용기에 넣고 빨대로 빨아마시는 거잖아요 그런데 술 빨대로 마시면 더 취하지 않나요...... 그러고 보니 록온도 스메라기도 어쩐지 이상하다. 왜 저 쪽은 별로 마시는 것 같지 않는데 내 잔은 자꾸자꾸 비는 걸까. 록온이 한 잔 따르고 스메라기 씨가 한 잔 따르고. 이상하게 내가 여러분들 두 배를 마시는 거 같은데 이거 내 착각 아니죠? 지금 내가 잔 막 비우는 거 아니죠? 자꾸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자 록온과 스메라기가 줄어들었다 커졌다 하고 있었다. 취했구나.
눈을 뜨자 먼 우주였고 동방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응? 왜 타오르지? -깼나. 알렐루야 합티즘. 차가운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티에리아의 목소리다. 분명히 술 먹고 취하는 추태를 보이고 숙취로 다음 날 임무에 지장을 주며 혈중알콜농도를 높였으니 건담마이스터의 자세가 아니라고 야단을 칠 텐데 이를 어쩌면 좋아. 야단 맞을 각오를 하고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앉아라. 내가 건담 마이스터를 위한 올바른 기호품을 준비했다. 이거라면 술 따위 마시지 않아도 좋을 거야. 앉으라니 어디에,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마치 갓 만든 양 하얗고 눈부신 의자와 탁자가 눈 앞에 떠 있었다. 의자에 몸을 기대자 의자가 몸에 맞춘 듯 편안해졌다. 신기하네, 하고 뒤를 돌아보니 티에리아가 손에 쟁반을 받쳐 들고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가르송 복장을 각을 세워 입고. -티, 티에리아, 그건? -바른 가르송이라면 앞치마 매듭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할 터. 먼지는 커녕 얼굴 비추는 거울 대신으로 써도 될 정도로 윤이 나게 닦은 구두에 까만 바지에 조끼에, 이야말로 웨이터의 표본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전시해도 좋을 정도로 칼 같이 차려입은 티에리아가 손 데면 베일 듯 각을 잡아 다린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내가 직접 구웠다. 먹어보도록. 근엄한 얼굴로 말하며 쟁반을 내려놓자 하얀 접시 위에 쿠키가 반듯하게 두 줄로 놓여있었다. -와, 티에리아 별 걸 다 할 줄 아는구나. -닥쳐라. 말하는 건 여전하구나. 알렐루야는 웃으며 쿠키를 집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건 쿠키라고 부를 수 없는 물건이다. 왜 쿠키가 푸르뎅뎅한 빛을 내고 있나요. 자체발광 쿠키? -티에리아, 쿠키가 파란데다 빛까지 나. 이거 형광등이야? 티에리아는 근엄하게 답했다. -그야 GN 입자를 반죽해서 구웠으니 당연하지 않은......어딜 가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렐루야는 번개 같은 속도로 일어나서 붉게 타오르는 동방을 향해 질주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 전에 GN 입자가 반죽이 되는 거였나 하는 생각 같은 건 그 때는 들지도 않았다. 오로지 저것을 먹었다간 인간으로서의 생활이 끝장날 것이라는 생각 밖에는. 등 뒤에선 티에리아가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먹어라! 건담 마이스터가 이 정도도 못 먹어서야 자격이 없다! 죽어도 먹고 싶지 않다. 알렐루야는 기를 쓰고 외쳤다. -티에리아! 사람으로서 할 일이 있고 안 할 일이 있어! 아차. 등 뒤의 고함이 살기로 바뀐 듯 하다. 티에리아 쪽에서 어째 고오오오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괜히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말 잘못 했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알렐루야 합티즘, 죽어! 건담 마이스터 주제에 뭐가 어째? 죽어 마땅하다!! .......티에리아, 너 버체도 아닌데 어디서 지금 캐넌포를 쏘고 있는 거야? 캐넌포를 피해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리는 동안 등 뒤에서 그 쿠키가 날아오는 것 같았다. 캐넌포보다 어떤 의미로는 그게 더 무섭다.
-세츠나! 어느새 붉게 타오르던 뭔가가 없어지고 먼 별을 배경으로 아령운동을 하고 있는 세츠나가 보였다. 점점 커지는 것을 보니 자신이 그 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 알렐루야. 무표정하던 세츠나가 자신을 보고 미미하나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잘 왔다.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세츠나 군 지금 뭐라셨나요? 제가 뭘 잘못 들은 건가요, 아니면 실언이라도 하셨나요? -네게 할 말이 있다. 세츠나는 아령을 놓고 주머니를 뒤졌다. 할 말이 있다면 들어야지. 가만히 세츠나를 보고 있자니 한참 뭘 뒤지던 세츠나가 알렐루야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 보라고? -손 내라. 거역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순순히 손을 내밀자 손에 뭔가 희고 붉고 푸르고 둥근 것을 떨어뜨려주었다. -뭐야, 이거? -조심해라, 깨지면 안 된다!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는 알렐루야를 세츠나가 급히 제지했다. -부화할 때 까지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귀한 건담의 알이야. -아 그렇구나, 조심해야겠네......뭐? 병아리 부화한다는 소리 하듯 건담이 알을 깨고 나온다는 소리를 하다니 세츠나 너 드디어 어디가 잘못 되었구나, 그러게 내가 건담이니 그런 소리 하지 말지. -건담 알 처음 보나. 세츠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건담이 알에서 나오는 거였어? 멍청하기 그지 없는 질문이었는데도 세츠나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당연하다. 뒤나메스도 버체도 너의 퀴리오스도 모두 알에서 나왔지. 세츠나의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을 보고 있자면 저 말도 모두 믿어줘야 할 것 같다. -그럼 이 알은 뭐야? -엑시아의 뒤를 이을 건담이다. 그러고보니 색깔이 꼭 엑시아 같기는 하다. 알렐루야는 알을 살그머니 만져보았다. 정말 건담 같기도 하고......그러나 차마 못 물어보겠다. 대체 건담 알이란 건 어디서 떨어지는 거냐! 세츠나는 알렐루야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즉각 대답했다. -나와 오건담과 엑시아가 있다. 나머지는 기합으로 어떻게든 하면 돼. 기하압? 그게 기합 넣으면 되는 일인가요? -그런데 왜 이 알을 나한테 줘? 네 건담이잖아. -그야 건담이 부화하려면 근성과 체력과 근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뭐하고 뭐하고 뭐라고? -근성! 체력! 근육! 이 삼위일체가 없으면 안 되는 거다. 알렐루야는 알을 세츠나에게 던져주고 알을 받으려고 세츠나가 움직이는 동안 빙글 반 바퀴 돌아 또 다시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안녕, 세츠나. 앞으로 너랑 길게 이야기 안 할 거야! 눈치 없다고 해도 좋고 나쁜 형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여기선 도망가야 한다. -어딜 가나, 알렐루야 합티즘. 어서 내 건담을 부화시켜라. 목이 졸렸다. 안 돌아봐도 세츠나가 자기 목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을 알겠다. -네 근육이 아니면 안 돼! 근육 없이 부화할 수 없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는데 세츠나의 눈이 형형히 빛나는 것이 보였다. 역시 세츠나.....가 아니고 어서 도망가지 않으면! -세츠나! 저기 건담이! 뭣이? 옆을 보는 동안 얼른 세츠나의 손을 풀고 미친 듯 달렸다. 저런 고전적인 방법에 속는구나 하고 안도한 것도 잠시, 세츠나는 정말 GN 입자라도 뿜어낼 것 같은 얼굴로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어서 도망가지 않으면 정말 큰일을 당하고 말 거야. 정신없이 달리던 중 발 아래가 푹 꺼지고, 어딘가로 떨어졌다. 정말 추락감이 느껴지는 걸 보니 꿈이 아니었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등이 욱신거리는 걸 보니 등부터 떨어졌나본데 이상하게 축축했다. -어머 알렐루야, 어디 갔다 와? 눈을 뜨자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소매를 둥둥 걷고 머리에 어디서 났는지 남성용 넥타이를 척 메고 한 손엔 술잔을 들고 기분 좋게 한 잔 하고 있었다. 스메라기 씨, 많이 마셨어요, 하는 순간 등 아래에서 물컹물컹한 뭔가가 터지는 느낌이 나서 손으로 쓸어 보니 보라색 즙이 묻어 있었다. -포도 아니에요? -그럼 포도 없이 포도주 담가? 스메라기는 알렐루야가 등으로 뭉갠 포도를 한 번 쳐다보고 알렐루야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결에 손을 잡고 일어나 등 뒤를 보니 큰 나무통안에 포도가 잔뜩 담겨 있었다. -포도주는 발로 밟아야 되는 거야. 그건 저기 예쁜 아가씨들이 하고 있으니까 됐고~ 에? 크리스와 펠트가 맨발로, 손을 맞잡고 포도를 밟으면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펠트와 뭐가 좋은지 아하하, 펠트 이거 정말 재밌다~ 하며 빙글빙글 돌고 있는 크리스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사람 몇은 들어갈 큰 나무통에서 포도를 밟고 있는 걸 보자니 안 마셔도 취하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낯이 익은 공간이었다. 톨레미 안에 왜 이런 게 있을까. -스메라기 씨, 이거 다 뭐예요? 어이 없는 풍경을 보고 알렐루야가 전술예보관에게 질문하자 무려 전술예보관 되시는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 여사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몰랐니? 우리 양조장 차렸어. -네? 왜 우주 한복판에 양조장이 있어요? -사실 요새 좀 적자라서. 건담 한 기에 돈이 얼마니. 그래서 자체 양조장 차려서 술값은 벌려고. 이건 술 값 버는 정도가 아니고 팔아도 되겠는데요? 옆을 보니 리히티가 울면서 큰 나무통에 달린 밸브를 열고 유리병에 술을 붓고 있었다. 혼자 중얼거리는데 나는 어차피 마시지도 못 할 거......라고 하는 듯 했다. 무슨 소린지. 그 옆을 보니 랏세가 장작을 패고 있었다. -어, 랏세 씨,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보면 모르냐. 장작 패잖아. 토탄이 제일 좋다고 그러는데 그런 걸 어디서 구해. 지구도 아닌데. -뭔 토탄요? -록온이 그러는데 위스키 증류에 필수래. .......록온요? 위스키? 그러고 보니 저기 저건 포도주가 아니잖아. 곡식으로 빚은 술 특유의쌉쌀한 냄새가 나는 노르스름한 술이 술통 안에 하나가득이었다. 록온이 증류기를 붙잡고 뭔가 하는 것이 보였다. -로, 록온. 뭐 해요? 가뜩이나 막일꾼 같아 보이는 복장이라며 톨레미 여승무원들이 뭐라고 하는 걸 듣기는 했지만 그 말이 이렇게 어울릴 줄이야. 완전히 머슴에 가까운 몰골을 한 록온이 껄껄 웃었다. -아. 이거? 위스키 빚을 거다. 사실 뭐니뭐니해도 몰트 위스키가 최고지! 스카치니 뭐니 해 봐야 아일랜드 위스키를 따라갈 술은 없거든. 이름부터 생명의 물이잖아. 록온이 유쾌하게 웃었다. -잘 숙성되면 우리 한 잔 하자. 어떠냐! -위스키는 진리! 위스키는 진리! 하로가 폴짝폴짝 뛰면서 묘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너 알코올 섭취 못하잖아. 그런 거 어디서 배웠니. 한숨을 쉬며 하로를 쳐다보고 있자니 록온이 알렐루야의 어깨를 툭 쳤다. -야, 힘내서 술통 좀 날라 봐. 위스키랑 브랜디는 잘 저장해야 해. 어느새 눈앞에 술통이 수십 개씩 쌓이기 시작했다. 가로로 누워있는 술통이 알렐루야를 향해 굴러왔다. 이건 꿈일 거야. 다 꿈이어야 해. GN입자 쿠키도 건담알도 양조장도 다 꿈일 거야. 당연히 꿈이겠지. 설마 알에서 부화하는 건담이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떠 보았지만 오히려 술통이 더 가까워졌다. 꿈인 줄 알면서도 뒤로 돌아서 뛰어야 했지만 통이 구르는 드르륵 드르륵 하는 소리가 더 커져갔다. 진정하자, 알렐루야 합티즘. 기다리다 보면 할렐루야가 나와서 날 야단칠 거야. ......어, 할렐루야? 알렐루야는 그제서야 지금까지 계속되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았다. 할렐루야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 숨어버린 것도 아닌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할렐루야, 대체 어디에 있어? 아무리 불러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 보니 어두운 공간에 혼자 떠 있었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느낌이 드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옆에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할렐루야의 느낌이 완전히 사라져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머릿속이 시커멓게 죽어버린 듯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입 밖으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할렐루야, 대답해. 할렐루야! 네 폭력성도 난폭성도 모두 인정할게. 앞으로 네가 하는 일에서 눈을 돌리지 않을게. 네가 하는 말을 인정할게. 내가 잘못했어. 너 없으면 안 돼. -할렐루야...... 빌어도 빌어도 자신의 반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없기를 바랐지만 없어지기를 바란 건 아니었는데. 그제야 자신이 할렐루야가 없기를 은밀히 바랐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없었으면’과 ‘없어지기를’이 동의어가 아니라는 건 할렐루야 너도 잘 알잖아.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잖아? 할렐루야. 너도 내가 무슨 마음이었는지 알잖아. -대답좀 해 봐! 사실은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어. 미안해. 알렐루야는 어린애처럼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눈물을 닦는, 소용 없는 짓을 했다. 이미 눈물이 볼을 타고 턱으로 내려와 발치에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으니까. 떨어진 눈물이 고이더니 웅덩이가 되고 웅덩이가 커져서 발치를 덮고 몸을 삼켜 발부터 눈물 늪으로 쑤욱 빨려들어갔으나 저항할 힘도 나지 않았다.
-알렐루야? 웅덩이에 코끝이 잠긴 순간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어, 록온? 벌떡 일어나며 짚은 손 아래에 익숙한 침대 스프링의 감촉이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공간이었다. 톨레미 내 개인실은 다 비슷한 구조니까. 다른 사람의 방인 듯 했고 방 주인은 침대 머리맡에서 자신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악몽을 꿨길래 할렐루야, 할렐루야, 그러면서 소리를 질러? -......아니에요. 꿈에서 깼구나,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누가 그 독주를 그렇게 퍼마시래. 향을 즐기라고 가져온 걸 맥주 들이붓듯 하면 어떡하냐. -아, 죄송합니다. -됐네, 다음부턴 그러지 마라. 록온은 어이없다는 듯, 한편으로는 조금 안도했다는 듯 피식피식 웃었다. -그럼 이까지 날 데려온 거예요? -데려오긴. 네 발로 이까지 걸어왔어. -제가요? 무슨 어이없는 짓을 한 건가 싶었다. 암만 취했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솔직해지냐, 나는. 록온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얌전하게 따라와서 아, 그래도 아직 덜 취했나 했는데 들어오자마자 내 이름 부르면서 훌쩍훌쩍 울더라? 그러더니 쓰러져서 잠들었어. -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시는 그렇게 마시지 않을 테다, 절대로 이성이 끊어질 때 까지 안 마신다, 하고 다짐하고 있는데 록온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게다가 너 아까 이상한 말도 했는데. -예? 록온이 쿡쿡 소리내어 웃었다. 눈꼬리가 살짝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 사람도 아까 나랑 같이 마셨잖아. 어느 새 장갑 안 낀 맨손이 목에 휘감겼다. 아찔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뭔가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로, 록온? 고개를 기울이자 목에 감긴 손이 뺨으로 올라왔다. 손가락이 뺨을 살짝 쓸자 한기 같은 것이 밀려왔다. 그러나 오히려 더웠다. 왜 이럴까. -왜. 불렀어? 손가락이 뺨을 느릿하게 쓰다듬자 손가락이 지나간 부분이 간지러웠다 .엄지손가락 끝이 알렐루야의 입술을 훑고 입술 안쪽의 축축하고 말랑한 살을 도톰한 살이 쓸어가자 전기가 오른 듯, 묘한 느낌이 몸 한구석에서 퍼져갔다. -불렀으면 말을 해. 입술에 얹힌 손가락이 간지러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이러면 안 돼요. 누가 봐도 문제고...... 기껏 입을 떼고 말을 하자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그게 무서워? -네? -아니아니, 알렐루야. 솔직히 이야기하자. 이건 네가 원하는 거잖아. 난 네가 바라는 걸 줄 수 있고. -록온. -그럼 뭐, 아깐 거짓말이었냐? 록온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제가 뭐라고 했나요. -기억 안 나? 안 나는 척 하는 거야? 록온은 웃으며 알렐루야의 이마에 이마를 대고 눈으로 웃었다. 록온의 눈을 쳐다보고 있자니 기억이 밀려왔다. -저.....당신을.......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말랑한 혀가 잇몸 안쪽을 쓸었다.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경한 감각에 머리가 멍해졌다. 싫으냐고 하면 절대 그런 건 아니었고, 좋다고 말하기엔 어색하고, 눈을 감고 있자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눈으로 보고 싶었고, 그러자고 눈을 뜨려니 민망하고. 그리고 대체 입술이랑 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뭐가 뭔지 모를 지경이 되어 멍하게 서 있자니 입술이 떨어졌다. -야, 너 정말 매너없다. 입이 떨어지자 눈 앞엔 누구의 타액인지 모를 것으로 젖은 입술이 있었고 멍하니 그 붉은 입술을 도톰한 혀가 훑고 지나가는 걸 보고 있자니 록온이 피식 웃었다. -예? 예?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알렐루야의 어깨를 앞에 선 록온이 가볍게 밀자 알렐루야는 그대로 침대에 밀려 넘어졌다. -됐어. 일단 가만 있어 봐. -예? 어? 어? 록온, 어, 어? -에이, 기분이다. 오늘 이 형님이 A부터 Z까지 가르쳐 주마. 록온의 손이 허리 아래로 내려왔다. 어, 이러면 안 되지는 않지만.......허리에서 발끝까지 아까 그 전기가 오르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고 그냥 감각에 충실한 게 좋다는 결론이 나오려는 순간.
-압생트는 예술가들이 마시던 술이라죠? -그렇죠? 이걸 마시면 헛것도 보여서 예술가들이 영감을 떠올리려고 마셨다나 어쩐다나. 잠깐, 그래서 금지된 술 아니었나...... 록온, 이거 어떻게 구한 거예요? -우리가 그런 이야기 하면 되게 웃긴 거 알죠? 희미하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스메라기와 록온이라는 걸 깨닫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어? 알렐루야. 깼네? 눈을 뜨자 아까 압생트 병을 본 그곳이었다. -로, 록온. 어떻게 된 거예요? -응? 너 졸길래 일어나면 방에 보내기로 하고 정리하고 있었는데 일찍 깼네? -제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나요? -10분 안 됐지 아마? 전부 꿈이라서 다행이다 하며 한숨을 쉬었다. 딱 하나 아쉽긴 했지만 설마 그럴 리도 없고. 그런데 무슨 꿈이었지? 뭐가 아쉬웠던 것 같고 굉장히 어이가 없었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쩐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참 다행이다 싶었다. 기억하면 굉장히 부끄럽고 어이없는 꿈이라도 꾼 걸까. 그러나저러나 술이 무의식을 갖고 놀 줄이야. 분명 할렐루야가 머릿속에서 한숨을 쉬고 있겠지. 한 손으로 머리를 짚고 한 손으로 술병을 얼굴높이까지 들고 아직 제법 많은 양이 남아있는 작은 술병을 노려보자 병에 할렐루야의 얼굴이 비쳤다. 어쩐지 굉장히 반가워 할렐루야, 하고 부르자 이 등신새끼, 하는 상냥하기 그지 없는 답이 돌아왔다.
압생트는 환각 작용이 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여러모로 안 좋아서 금지된 술이었다던가요. 한국에선 못 먹는답니다. 요즘은 현지에서도 40도 정도로 만든단 이야기를 들었어요. 70도 짜리를 40도로 만들다니 이건 소주 도수가 20도 이하인 거랑 똑같은 거 아냐 하고 분개했습니다...... 네, 그저 제가 저걸 마시고 싶었던 것 뿐입니다.
쓰다 보니까 제가 술 되게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요. 잘 마시지도 못하고. 그저 꼭 아일랜드 위스키를 먹어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