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병 바닥이 보이는 걸 좋아한다. 병이 투명해서 예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하지만 빈 술병을 보려면 마셔야 한다. 마시다 보니 어느 새 투명한 유리병에 든 것이건 우주에서 쓰는 특수용기에 든 것이건 알코올이 들어간 액체는 모두 좋아하게 되었다. 왜 이런 걸 입에 달고 사냐는 알렐루야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가 알렐루야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요약하자면 그런 이야기였다. -에이 뭐에요 스메라기 씨. 알렐루야가 술병을 잡고 키득키득 웃었다. 술병 하나를 사이에 놓고 앉아서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잔을 비운 결과 병은 반 정도 비어있었다. 겉보기에 물만 마신 것 같은 알렐루야는 술이 들어가자 말이 많아져서 스메라기를 붙잡고 왜 술꾼이 되었냐는 시덥잖은 질문을 하며 늘어지고 있었고 겉보기에 분명 술을 마신 티가 나는 스메라기는 의외로 멀쩡하게 앉아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뭐가 웃기니, 이야기하래서 이야기한 건데. 부루퉁한 어조로 대답을 하자 알렐루야가 손을 내저으며 사과했다. -에에이 시비 거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뭐가 이해가 안 가? -이야기 내용이요. 그러면 왜 술병 바닥이 비는 걸 좋아해요? -글쎄? 마시면 머리가 멍해져서? 알렐루야가 키들키들 웃었다. -술꾼들은 다 이상해요. 말은 많은데 제대로 이야기를 해 주는 법이 없다니까요. 스메라기는 알렐루야를 흥미있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거 재밌는 가설이네. 전술예보사가 이야기를 제대로 안 해 주면 누가 제대로 해 준다는 거야? -하지만 스메라기 씨, 이건 전술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아.스메라기는 술이 담긴 용기에 입을 댔다.술잔이 말라가니 입 안도 바삭바삭 마르는 것 같다. 갈색 액체가 입안을 적시자 불이 붙는 것 같다. 마셔도 갈증이 가라앉지 않는 액체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신기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을 더 괴롭히는 기억도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철이 안 드는 자신도 있는데 마셔도 갈증이 나는 액체 정도야 흔하지. -그럼 나도 술꾼이야? 장난기 섞인 질문에 진지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알렐루야가 대답했다. -어, 근데 스메라기 씨는 다시 생각해 보니까 술꾼 아닌 거 같은데요. -왜? -술꾼들은 음, 뭐라고 해야 하나. 아! 알겠다, 하면서 알렐루야가 말을 이었다. -술을 마셔요. 풉, 스메라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술꾼들이 소다수라도 마신다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요. 술을 마실 거리로 여기는 거예요. 알콜중독이니 뭐니 하는 부작용도 그래서 생기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마시고 싶어하니까. 그런데 스메라기 씨는 술을 마시지 않아요. 분위기 파악 못 한다는 소리를 크루들 사이에서 듣고 사는 알렐루야이지만 감각 하나는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다. 그 알렐루야가 스메라기를 정면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술에 취한 눈이나마 표정은 진지했다. -스메라기 씨는 술을 마시고 싶어하는 게 아니에요. 술 말고 더 중독성 강하고 뒤끝 없는 게 없으니까 그렇지. -...... -더 한 게 있으면 할 거잖아요. -그만해, 알렐루야. 엄한 말투로 알렐루야의 말을 제지하자 알렐루야가 미안해요, 하고 사과했으나 스메라기의 얼굴을 쳐다보는 눈만은 다른 데로 돌리지 않았다. -그러게 그냥 안 마시면 될텐데. 그 간단한 걸 왜 모르는 거예요. 스메라기는 알렐루야의 눈을 외면했다. 아니, 너는 알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동족을 학살한 날 왜 굳이 나에게 와서 술을 청했니. 넌 나랑 같은 걸 봤잖아. 말이 스메라기의 혀끝까지 올라왔으나 그녀는 억지로 말을 삼키고 목이 메어 물 대신 술을 마셨다. 두 겹 유리 사이 빈 공간에 이지러진 상이 맺혔다. 스메라기는 그게 누구의 얼굴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되고 싶어 하던 나는 분명히 아니다, 고 생각했다.
다시 눈을 뜨자 익숙한 장소였다. 콕핏 안이었다. 하지만 전과는 구조가 조금 다른 것도 같았다. 알렐루야와 뇌를 공유하고 있으므로 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리오스. 새 건담 안이었다. -이거 괜찮네. 4년동안 놀고 먹지는 않은 모양인데, 공돌이들. 새 기기를 휙 둘러보고 할렐루야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이 괜찮은 무기를 흡족하게 다루지 않는 알렐루야를 생각하니 더더욱 즐거웠다. 너는 내가 없으면 초인병도 아니지, 건담도 제대로 못 모는 찌질이 알렐루야를 대신해서 능력을 보여주겠어. 전보다 규모면에서나 무기의 개량도 면에서나 여러모로 많이 달라진 적들이 눈 앞에 떠 있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다 죽었어. -슬슬 몸 좀 풀어볼까. 조종간에 손가락을 올리고 급발진을 하려는 순간 GN 아처에서 앙칼진 고함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거냐 살인마. 인혁련에 있던 망할 계집의 목소리였다. -뭐냐 , 너 그 웃기는 년 아냐. 뭐 하냐.......알렐루야 이 멍청한 자식 쓸 데 없는 짓을! -내가 할 말이다! 자기가 없는 동안 이 멍청한 놈은 그렇게 찾던 마리를 찾아다가 셀레스티얼 빙으로 덜렁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살림을 차리려면 아예 도망을 가란 말이다, 이 덜떨어진 새끼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알렐루야는 소마를 부정하고 마리를 긍정하는 멍청한 짓을 한 것을 알고 할렐루야는 혀를 찼다. 너 내가 뭔지 정확히 알고는 있냐? 그나저나 이 둘은 서로 한 쪽 인격이 완전히 사라졌거나 제어를 할 수 있다고 믿은 모양이었다. 웃기지도 않네. 아마 저기에 있는 싸우는 데 미친 계집애도 같은 생각이겠지. 나나 저년을 볼 수 있다는 거, 혹은 그 둘이 마주칠 수 있다는 건 생각도 못한 놈이 하는 생각이 뭐 그렇고 그렇겠지만. -그 놈 멍청한 짓을 했군. 아주 드라마를 찍네. 이 연놈들을 쌍으로 묶어서 뭘 어쩌겠단 거야. 그것도 전장에서, 손에 무기를 쥐고 말이지. 하지만 불행히도 이 기체로 그 쪽을 공격하기는 힘든 모양이고 분위기를 보니 그 쪽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고 그게 매우 애석한 모양이었다. 저 쪽 멀리 어로우즈라나 자신들만큼이나 어이없는 조직에서 대량공격을 퍼붓고 있었고 멀리 파란색 건담도 녹색 건담도 다 있다. 그 놈들이군. 파란색 건담이 빨갛게 빛나고 있었고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휙휙 움직이고 있었다. 트란잠인가. 그래서 잠시 내가 나올 수 있었구만. 시간이 없다. 할 수 있는 한 즐겨보자고 중얼거리며 적을 베려 튀어나가는 동안 머릿속으로 고함소리가 계속 들렸다. -E-57! 얌전히 있어. 팀워크나 단결 같은 건 모르는 덜떨어진 불완전체. 저기 너희 편도 있잖아. 할렐루야는 코웃음을 쳤다. -얼씨구 이년 말하는 꼬라지 좀 보게. 야 이년아, 이거 내 기체다. 보조기체에 탔으면 입 다물고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 -전장이 좋은 거냐. 비웃음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네 본체는 네가 나타날 것도 모른 모양이군. 그래서 마리......나를 여기 데려온 거고. 그 멍청한 뇌로 뭘 판단하겠단 거냐. 여긴 전장이야. 흥분해서 날뛰는 어린애 같은 짓을 하지 마라. 할렐루야가 비웃음을 돌려주었다. -자기도 싸우는 거 말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웃기고 있네. 닥쳐. 돕기나 해. 이 상황에서 그것말고 네가 뭘 할 수 있냐? -이래서 난 네가 싫다. 할렐루야의 움직임을 제어하려고 한들 보조기체는 보조기체일 뿐이다. 그 말은 맞는 말이다. 소마가 으르렁댔다. 으르렁거려봐야 간지럽지도 아프지도 않아요, 어설프긴. -싫어봤자 뭘 할 건데. 이 쪽 동력이라도 끊어 보시지? 아니면 날 죽이러 오던가. 왜, 안 되겠냐? -싸구려 도발밖에 할 줄 모르냐. 소마 필리스가 뛰쳐나가고 싶은 자신을 억제라도 하듯 억눌린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기회만 닿으면 네놈은 내가 죽인다. 마리를 위해서라도 넌 없어지는 게 좋아. -마리, 라. 할렐루야는 피식피식 웃었다. -나도 너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지. 그 때 죽여버렸어야 하는데 참 아깝단 말이야. 멍청한 놈. 내가 너듯 저게 너의 마리다. 성모님이 아냐. 우리는 기회만 닿으면 서로의 목을 물고 숨통을 끊고 명줄을 끊어버릴 투견같은 거지. 여기에 성모가 어디있고 구원이 어디있냐, 바보 같이 상냥한 알렐루야, 이 도움 안 되는 종자야. -너는 그냥 네 생존에 도움이 안 되는 내가 싫은 거겠지. 맞나? 뇌내 통신은 좋다. 음성으로 어감을 전달할 수 있둣 뇌양자파로 말을 걸면 마음의 느낌도 고스란히 옮겨준다. 마리라고 했나 소마라고 했나, 이를 빠드득 갈아대는 소리가 머리속에 울렸다. 저것도 지금 나처럼 한탄하며 이를 갈아대고 있갰지. 야, 알렐루야. 너 도대체 뭔 짓을 저지른 건지 알긴 아냐? 알렐루야는 그 자신에게 독이 될 상황에 대해 모르고 있다. 알려줄 길도 없고, 당분간은 알지 않는 것이 좋겠지. 나중에 실컷 후회해 보라고. 할렐루야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비웃고 싶었다. -쳇, 너 때문에 좋은 게 하나도 없잖아. 이제 한계야. 잘 가라 계집. 머릿속에 울리는 여러가지 욕설은 무시하고 할렐루야는 빗발치는 전격을 피해 방어선에 섰다. 트란잠은 한계시간이 있다. 눈을 뜬 알렐루야는 분명 위화감에 당황하겠지. 이 정도는 도와주는 게 도리 아니겠냐. 그럼 친하게 지내고들 있으라고. 언젠가 나와서 박살내 주고 말테니까. 눈을 감았다 뜨면 아마 또 다른 어딘가에서 저 여자와 마주쳐 싸우고 있겠지, 할렐루야는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으며 눈을 감았다.
-------------------------------------------------------------- 토끼 님 : 오오 감사합니다. 언제나 피드백이 빠르셔요. 좀 부족하다 싶어서 5분씩 시간 쪼개서 고치고 있어요. 저 할렐루야와 소마 커플 좋다고 생각해요. 둘이 치고 받는 것도 좋고 어쩔 수 없이 서로 못 밟아주고 이 가는 것도 좋고 아예 작정하고 서로 밟는 것도 참 좋아요. 저 곡 치곤 쟤들 참 에로도 떨어지는 커플이라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긴장관계는 충분하니까요. 저 둘이 좀 더 잘 치고 받는 걸 쓰고 싶네요.
백야 님 : 사람이 넷이고 동성끼리 이어질 가능성 배제하면 커플링도 넷입니다. 와하하, 착각하신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서로 가진 감정이 애정은 아닌데 관심은 차고 넘치죠. 내 반신이 사랑하는 존재의 반신인 셈이잖아요. 이런 관계도 재밌지 않나요. 저도 그래서 이 둘 관계를 참 좋아해요. 본편에서 이 둘 화끈하게 충돌하는 거 한 번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세츠나가 전장에서 플래쉬백을 일으킨-전장에서 수행한 첫번째 미션이겠죠 아마도- 그 날 밤입니다. 수위가 높진 않지만 일단 둘이 만리장성은 쌓은 다음인고로 가립니다. (바로 밑 글에서 더블오가 위대하다고 한 게 이거예요; 제가 자발적으로 쓴 최초의 에로는 더블오입니다. 역사적이군요; 비록 에로하진 않지만;)
숨을 짧게 몰아쉬며 록온의 몸 위로 쓰러진 소년이 곧장 록온의 목과 허리에 팔을 둘렀다. 허리께에 남아있는 묵직한 아픔과 무언가 질척한 것이 몸 안에 남아있는 기분과 익숙치 않은 자세 때문에 뻐근한 허벅지가 합쳐지자 시너지효과를 낳았다. 한 마디로 아팠다. 그러나 아이는 몸을 치우지 않았다. 록온의 몸에 꼭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꼭 엄마 치마폭에 얼굴을 묻은 어린애처럼. 물론 어린애는 이런 짓 못 하지만. 대체 이런 건 언제 배웠담. 아니 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그래도 보통 이럴 땐 여자를 찾지 시커먼 형님을 찾아오진 않잖아? 왜 나야? 이 녀석 급했나, 제대로 준비도 안 하고 사람을 덮치냐. 이럴 땐 뒤처리를 해야 한다고 어디서 들은 거 같은데 이러고 있어도 되나 모르겠네. 그나저나 열여섯 먹은 어린애랑 타의 반 자의 반으로 구른 나는 도대체 뭐람.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숨은 평온해진지 오래고, 땀도 다 말랐지만 자신의 몸에 팔을 감고 매달려있는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의 가슴과 등이 부풀었다 가라앉는 것이 배와 팔에 느껴졌다. 불편한 자세로 자면 목 아프고 어깨 아픈데, 게다가 팔 안 아프니 너. 일단 옆으로 누이자고 생각하고 세츠나, 하고 부르자 아이가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안 자네, 움직이지 않길래 자는 줄 알았어. 아이는 자신의 말에 대답은 않고 록온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까슬까슬한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세츠나, 편하게 자야지. 록온이 아이의 등에 올린 손끝으로 등을 톡톡 치자 아이는 오히려 록온을 꽉 끌어안고 뭐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이러고 있어라, 고 말하는 듯 했다. 원한다면 못 할 거야 없지만, 좀 의외였다. 하긴 처음부터 의외가 아닌 게 없었지. -사람과 살을 맞대는 건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자신의 말에 소년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갑이 없다. 그래서 좋아. 아, 그러고 보니 맨손이었다. 손 좀 줘 봐, 하는 아이의 말에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세츠나 쪽으로 뻗자 세츠나가 맨손을 붙잡았다. 맨손으로 맨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쓸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쓰다듬고 총을 잡느라 굳은살이 잡힌 부분을 손끝으로 굴리듯 만져본다. 남은 한 손으로 아이의 등을 끌어안아도 아이는 몸을 굳히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사람의 살이 필요한 모양이지. 세츠나가 자신의 손에 탐닉하는 동안 록온은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이 아이를 가엾다고 생각해서 몸을 허락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의 심정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격전지 한 가운데서 갑자기 멈춰서서는 아무리 불러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던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았다. 극복하지 못할 뭔가가 있다는 거야 짐작하고도 남았다. 중동 출신임이 빤히 보이는 어린 소년에게 자신과 다르지 않은 과거가 있으리라고 어렴풋이 생각했고 오늘 소년의 행동에서 대충 짐작은 갔다. 그리고 그 후에 자신의 방으로 찾아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요구할 거라는 것을 어쩌면 내심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놀랍지도 당황스럽지도 않았으니까. 서투르고 막무가내고, 빈말로도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런데 세츠나, 이런 버릇 들이면 못 써. -무슨 버릇 말이냐. 소년은 명백히 기분나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고프다고 아무나 찿아오면 못 쓴다. -아무나라니. 네가 왜 아무나에 들어가나? 소년이 어이없는 듯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감정표현이 드문 세츠나가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건 처음이라 록온은 웃었다. -처음부터 내가 목표? 이야, 이거 영광인데. -당연하잖은가. 록온 스트라토스. 나는 네 맨손을 진작부터 만져보고 싶었다. 도전적인 발언에 록온이 눈을 가늘게 좁히고 웃자 세츠나는 딱 잘라 말했다. -너라서 온 거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 세츠나는 어느새 록온의 손에서 손을 떼고 턱에서 쇄골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또? 라고 중얼거렸지만 그다지 싫지는 않았고. 할짝이는 혀 자체에 담긴 명백히 성적인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치 어머니 가슴께에서 입을 오물거리는 아기 같아 어쩐지 우스웠다. -왜 웃나. -아니 그냥. 가슴께에서 움직이는 까만 머리를 팔로 꼭 안아누르자 팔 근육에 미미한 저항이 느껴졌다. 그래, 어쩌면 자신과 동등한 성인이 되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하지만 나라고 어디 어른이겠니. -너 실수하는 건지도 몰라. 세츠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실수냐. 난 진심인데. 록온, 자신의 본명 아닌 이름을 부르며 어린 짐승이 보챘다. 짐승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지. 록온은 세츠나의 등을 쓸어내렸고 세츠나가 가는 한숨을 쉬었다.
세츠나->록온입니다. 건담님은 우물쭈물하지 않고 생각나면 밀어붙이십니다. 록온은 엄마 포지션이었습니다;; 남자애의 첫경험이니까 엄마가 되어주는 것도 뭐;
머리카락이 옷에 떨어지면 귀찮다고 목에 둘러준 큰 수건에 머리카락이 잘게 잘게 잘려 떨어진다. 꼭 파도를 닮았다. 하얀 거품이 밀려들듯 천 위에 머리카락이 사락 모여들었다가 세츠나가 무릎을 움직여 수건을 털어내자 와락 흩어진다. 저렇게 많은 물이 뭍으로 왔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었다. 하루가 무사히 가는 것 만큼이나 신비로운데, 거기다 매일매일 색도 미묘하게 달랐다. 바다란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이 섬이 앞으로 지상에서 무력개입을 할 때 보급기지로 쓰인다고 했을 때 조금 설레었던 것을 룸메이트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굳이 이 해변에서 잠시, 식사를 할 때라도 쉬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며 자신을 보고 싱긋 웃었던 것이다. -가만히 있어야 근사한 머리가 나와. 큰 손이 자신의 정수리를 한 손으로 살짝 잡아 머리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뒷목 근처에서 가위가 움직였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되니까 졸면 안 돼. -안 졸아. 아이취급하는 말투에 발끈해서 대답은 했지만 가슴께에 걸쳐진 수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니 어쩐지 잠이 왔다. 안 자려고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보니 멀리서 티에리아가 칼을 쥐고 뭔가를 썰고 있었고 그 옆에서 알렐루야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티에리아에게 뭐라고 하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맛이 있을지 없을지가 궁금해졌고,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데 놀라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목 뒤의 매듭이 사락 풀렸다. -다 됐다. 혹시 이상하면 애프터서비스 해 줄테니까. -괜찮다. 굳이 거울은 보지 않았다. 안 봐도 어떤 모습일지 짐작이 갔으니까. 언제나 같은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잘라주었다. 자신의 등 뒤에 가위를 들고 설 수 있는 자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질 수 있는 자도 한 사람 뿐이었다.
-------------------------------------- 머리 했는데 어머니 저 보시자마자 호빗이다! 라고 외치셨습니다. 컬이 굵어서 그런가 글쎄 제 머리가 프로도 같대요. 오해 마시길. 어깨를 약간 넘는 길입니다. 아 그래, 저번에 머리 볶았을 땐 처키라고 하셨죠......저 사람이에요, 사람. 이종족 아니고!
아무튼 오늘 머리를 자르다 생각이 났습니다. 마감이 쓰러지지 않아서 현실도피 차원에서 뭐든 열심히 하고 있어요. (살다가 제 입에서 마감이 쓰러지지 않는다는 소리 나온 거 처음입니다 OTL)대략 귤 서른 개 남짓 분량의 귤껍질을 썰어말리는 작업까지 자청해서 했습니다. 만일 귤피차가 맛있으면 좀 싸 가리다.
그리고 이건 덤.
유튜브에서 주운 더블오 매드무비입니다. 그러고보니 더블오와 꽤나 잘 어울리지 않나요. 이런 세상을 위해 태어난 게 아냐.
드디어 저도 더블오로 노멀커플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난생 처음으로 써 보는 15금! (.......아니 이게 15금 맞냐고 힐문하시면 할 말 없는데요.제가 씬을 못 써서(...) 애프터도 잘 못 씁니다. 성적 긴장감 하나 없는 관계라 죄송합니다.) 사실 책 준비해야 되는데 제가 뭐 하는 짓인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건 생각날 때 올려야죠.
-알렐루야-
자고 일어났더니 어제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어 있었다.
눈을 떴더니 자기 방도 아닌 곳이었다. 여긴 어디고 내가 왜 여기 있을까 생각해 봐도 답이 금방 나오지 않았다. 반신에게 혹시 알고 있냐고 물어보며 몸을 일으킨 순간, 자신이 맨몸에 이불을 둘둘 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눈을 돌려 보니 침대 옆엔 뱀허물 같이 뭉쳐진 옷가지, 잘 들어보니 배경음악은 여자 목소리인 듯한 콧노래소리에 샤워하는 소리. 놀라서 굳은 몸과 달리 머리는 아주 재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니까 이것이, 그, 그러니까 톨레미 남자들끼리 이야기하다 가끔 나오는 그 애프터, 라는 것인 모양인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애프터라고 하면― 그 순간 기억이 물꼬 터지듯 쏴아, 하고 밀려왔다. 기억이 밀려오면 자동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구르는 자세가 나오냐며 반신이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불러도 나오지 않다가 이럴 때만 협조하는 반신이 원망스러웠다.
그 생일 이후로 스메라기 씨와 술친구가 되었다. 사실 친구를 한 번도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이게 친구가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시간 나고 마음 맞을 때 같이 한 잔씩 하면 술친구 맞겠지. 록온이 처음부터 레벨 안 맞는 술친구 사귀면 고생한다고 놀렸으니까 아마 친구 맞을 거다.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가끔 힘든 일 끝나고 쉴 때 한 잔 마시는 정도였는데 갈수록 술 양이 늘어갔다. 스메라기 씨는 호쾌하게 웃으면서 원래 술은 운동하고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느는 법이라고 그랬다. 맞는 말이었다. 처음엔 조금밖에 안 들어가던 것이 어느새 한 잔을 비우고 두 잔을 비우게 되었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 위스키고 브랜디고 넘기기가 힘들어서-꼭 불을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사과술을 구해 왔더니 스메라기 씨가 오랜만에 보는 과실주라며 반색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그 때까진 기억이 아주 선명했다. 그런데 어째 몇 잔 마시고 나니 기억이 없다. 그러고보니 마실 때 할렐루야가 넌 취해봐야 정신 차릴 거냐고 작작 좀 처마시라고 한 게 기억이 어렴풋이 나고, 스메라기 씨가 과실주는 원래 마시기는 좋지만 갑자기 취기가 올라오니까 조심하라고 한 이후로 기억이 하나도 없다. 아니 사실 하나도 없다면 거짓말이고, 중간중간 단편적인 기억은 있다. 생각하니 얼굴에 열이 화끈하니 올랐다. 그리고 일어나보니 이 지경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술 먹고 사고쳤다 이거다. 치사하고 비겁하게도, 술기운을 빌려서 마음에 있던 누님을 덮친 거란 말이다. 어떻게 한 집에 사는 누님께 그런 짓을! 자기 머리를 때린들 답이 나올 턱이 있고 벽에 아무리 머리를 박아 본들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턱이 있나. 피차 즐긴 주제에 뭐 그렇게 부끄러운 척을 하냐고 반신이 비웃었으나 자신은 심각했다. 의식이 없을 동안 나는 도대체 뭘 한 거지? 혹시 할렐루야, 네가 했어, 하고 물어봤으나 할렐루야는 비웃을 뿐이었다. 난 사람도 아냐 할렐루야, 내가 진짜 인간말종인가봐. 스메라기 씨 얼굴은 어떻게 보지? 아니 그 전에 어떡하지? 좀 있으면 스메라기 씨 나올 텐데? 내가 나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 있을 수도 없잖아, 이를 어쩌지? 아까까지 비웃던 할렐루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대체 할렐루야, 난 이제 어떡하면 좋지? 피식, 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만 머릿속이 조용했다. 할렐루야는 불러도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제발 협조 좀 해 달라고 빌어봐도 답이 없었다. 반신은 이 사태를 즐기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샤워실 문이 열리고 스메라기 씨가 수건만 한 장 둘둘 감은 채 고개를 내밀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가장 좋은 걸까, 할렐루야? 일단 손이 발이 되게 빌어볼까.
-스메라기-
일어나보니 알렐루야는 어린애처럼 이불을 둘둘 말고 자고 있었다. 어지간히 깊이 잠들었는지 자신이 몸을 일으켜도 잠시 몸을 뒤척일 뿐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다 자라긴 했어도 덜 여문 티가 나는 옆얼굴과 숨을 쉴 때 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선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그래서 죄책감이 들었다.
술친구라면 술친구였다. 톨레미 내에 술 마셔줄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알렐루야는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좋은 상대였다. 우울한 얼굴로 오늘 부로 스무 살이라며 자신을 찾아온 그 날부터. 그러니까 비슷한 이유로 술을 마시는 동지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무 말 없이 괴로운 일이 있을 때 한 잔, 대규모 살육 후에 한 잔, 하다 보니 어느 새 자주 술잔을 들고 만나게 되었으니 그게 술친구지 달리 뭐라고 부르겠나. 정말로 다른 생각은 없었다. 어린애를 남자로 볼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음주경험이 별로 없는 알렐루야가 과실주를 들고 온 게 문제였다. 아니, 이건 현실도피다. 어쩌면 머릿속에서 계속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알렐루야의 술버릇이나 술에 취하는 정도까지도 계산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아니, 솔직히 이야기해서 술기운에 멍하게 앉아있던 어린 남자애를 꼬드긴 건 자신이 맞다. 까놓고 말해 술 먹고 일을 친 거다. 하면 안 될 일이었다. 아무리 남자가 없고 아무리 오래 굶었기로 어떻게 술기운에 애를 덮칠 수가 있담. 여섯 살이나 어린 애를 술 먹여 덮치다니 이러고도 이 애와 계속 한 팀으로 지낼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듯, 이 애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을까. 항상 하는 일마다 이런 식으로 꼬였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한숨을 쉬었다. 무심결에 아이에게 하듯 이마를 쓰다듬고 있는 자신의 손이 가증스럽기까지 해서 얼른 손을 거두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일단 생각은 나중에. 도망을 가건 애한테 사과를 하건 우선 씻고 나서 생각하자, 하고 한참을 씻었다. 이럴 땐 나라도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지, 안 그러면 알렐루야는 분명히 당황할 거다. 아니, 울며 사과할 거야. 내가 친 사고인데 사과를 받는 건 가급적 피하고 싶다. 일부러 콧노래를 부르며 밖으로 나가기 싫은 마음을 다잡고-나가면 분명히 알렐루야가 고민하면서 훌쩍거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머리가 다 아팠다- 나와보니 알렐루야가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머리를 싸잡은 채 벽에 이마를 쿵쿵 박고 있다 눈물 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상보다 심했다.
-할렐루야-
“아, 저 그러니까, 스메라기 씨, 저……” 병신 삽질하는 소리 하고 자빠졌다. “아, 안녕. 알렐루야.” 저 여자는 또 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허세나 떨고 있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한 놈은 쫄고 있고 한 년은 억지로 웃고 있다. 하이고, 사람 미치고 팔짝 뛰겠네. 그러더니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한참 가만히 서 있네? 결국 먼저 움직인 쪽은 가슴 큰 여자였다. 옷을 챙겨 입으려는 듯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뒤섞인 옷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알렐루야의 표정이야 안 봐도 뻔하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해하더니 머릿속으로 나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야, 이 정도는 네 힘으로 해결해라. 남자가 그거 하나 못 하냐? “저, 죄송해요!” 내 멍청한 반쪽이 결국 울기 시작했다. 펑펑 우는 건 아니고 그냥 목소리가 떨린다. 이거 웃기는 놈이네. 야 이 새끼야, 뭐 하는 짓이야! 이게 해결이냐? 옷을 주섬주섬 주워입던 왕가슴이 뭔가 찔리는 게 있는 표정으로 웃었다. “괜찮아, 알렐루야. 뭐가 미안하다고…….” 알렐루야 이 놈은 저 표정이 무슨 뜻인지 알지도 못한다. 야, 솔직히 어제 일방적으로 네가 밀어붙인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저 놈 진짜 사람 표정 못 읽네? "괜찮은 척 할 거 없어요." 괜찮은 척인 건 알았으면 얌마, 좀! "응?"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차라리 화를 내세요."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다, 얼씨구. “제가 나쁜 놈이에요, 진짜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스메라기 씨, 미안해요……잘못했어요……” 훌쩍훌쩍이 쿨쩍쿨쩍으로 바뀌더니 정말로 큼지막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왕가슴이 놀라서 이불을 둘둘 말고 울고 있는 알렐루야쪽으로 다가왔다. “일단 씻고, 옷 입고, 밥 먹자. 그럼 괜찮아질 거야, 그만 울어, 응?” 나 화 안 났어, 정말이야. 실은.......아니, 아니야, 알렐루야, 울지 말고, 괜찮대도.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뭐가 좋다고 결국 이 바보는 여자 어깨에 기대서 훌쩍훌쩍 울고, 왕가슴이 애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웃기지도 않은 꼴을 연출하고 앉아있다. 저 멍청한 년놈들이 서로 자기가 사고쳤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잖아! 염병, 내 볼 땐 한 반은 합의하에 일 친 것 같더만.
미리 이야기해 두는데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다. 알렐루야 놈은 조금만 수틀리면 날 붙잡고 늘어지는 데 나 아니다.
"왜 알코올음료를 마시나." 어린 건담마이스터의 질문에 사이좋게 부어라, 마셔라, 한 잔 하고 있던 성인들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니까 세츠나, 술이란 건 말이다, 아무리 금지해도, 못 먹게 해도, 율법으로 금해도 없어지지 않잖아." 이안의 설명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질 말을 예상한 어른들이 피식피식 웃었다. 아이가 눈살을 찌푸리자 얼른 랏세가 그 뒤를 이었다. "인간이 아무리 애를 써도 없어지지 않는 게 술이라는 건 알겠지? 그래서 우리 CB에선, 술에 무력개입을 하기로 했다, 이거고." 어른들의 농담섞인 설명에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먹어서 없앤단 말이야. 농담이니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스메라기 리 노리에가의 설명에 아이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이거 농담이 지나쳤나, 어른들이 아이를 주목하고 있자 잠시 생각하던 아이가 강한 어조로 단언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모순이다." "심한 모순이잖아. 그러니까 농담이지." "그런 농담은 하는 게 아니다." 어른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아이에겐 질이 나쁜 농담이었다. "세츠나, 거기서 그렇게 진지하게 나오면 반칙이야." 록온이 웃으며 말하자 소년이 대뜸 쏘아붙이듯 대답했다. "뭐가 반칙이냐, 넌 무력에 의한 무력개입이 모순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겠나." "그러게 농담이래도." 청년의 말에도 아이는 요지부동, 자신의 의견을 고수했다. "그건 농담이 될 수 없다. 모순이 아냐. 나는 틀리지 않았어." 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듯 당당히 입에 올린 말은 참으로 그다운 것이었다. "그래." 어른들은 제각각 다른 표정으로 웃었다. 실제로 모순임을 모르지 않는 자는 톨레미 안에 아무도 없었음에도.
---------------------------------------------- 진통제 털어넣고 전기장판 켜고 배 지지면서 자다가 왜 이런 거 생각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현실도피라고도 부르죠.
철 들자 마자 사람을 죽였다. 손에 묻은 피가 몇 명분인지 몰랐다. 지금도 자신은 피를 묻히며 산다. 그럼에도 죽은 자가 꿈에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장 먼저 죽였던 자, 부모의 얼굴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아, 펜으로 눈코입을 그렸다 빨아서 온통 번진 낡은 헝겊인형마냥 희미했고 그 희미한 얼굴마저 꿈에서 나온 적도 없었다. 꿈없는 잠은 깊은 물처럼 어둡고 컴컴해서 쉬기에 좋았다. 그럼에도 그만은 꿈에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런 밤이면 베개가 늪처럼 축축하니 끈적거렸다. 깨고 나면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슬펐던 날도 있었다.
그가 또 꿈에 나왔다. - 무어라고 입이 달싹였으나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다. -미안하다. - 말은 바람에 날려서 낙엽처럼 날아갔다. -네가 아닌 줄은 알아. 하지만 한 번 더 너와 싸우고 싶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 -안다. 다시는 눈에서 놓지 않겠다.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겠어. 그러니 록온, 간곡한 목소리로 부르는 말도 들리지 않는지 그는 손을 흔들었다.
깨고 나서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가 나오는 꿈을 꾸었는데.
------------------------------------------------------- 더블오에 손을 댄 건 오펜 말을 빌자면 '나에게 있어 천사와 악마' 되겠습니다.
알렐루야 구출 소재입니다. 원작, 캐릭터 왜곡이 심하니 그런 거 싫으신 분은 넘어가시고요. 세츠나가 싸나이가 아닙니다. 흑.
새로운 건담을 만난 감개도 잠깐, 그 건담과 새 멤버로 시작한 미션은 알렐루야 합티즘의 구출이었다. 알렐루야를 적지에서 끌고 나온 것은 세츠나였다. 티에리아가 굳이 그렇게 할 것을 제안했고, 세츠나도 군말 없이 따랐다. 케루딤 건담 파일럿부터, 그 후 4년간 벌어진 이야기는 그를 구출한 다음, 알렐루야 합티즘이 아리오스의 파일럿이 되어도 괜찮을지 판단한 다음이라는 것이 둘 사이의 묵계였다. 약해진 사지로도 굳이 부축해 주겠다는 세츠나의 손을 거절하고 지상에 내려온, 그리고 묵묵히 재활훈련을 시작한 눈에 녹색 옷을 입은 케루딤 건담 파일럿이 보인 것은 그러니까, 명백한 실수였다고 티에리아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직후 그는 원인불명의 두통을 일으키고 의무실에 누워있었다. 4년 전의 원인불명의 두통과도 비슷해 보였다.
-어떻게 된 거냐. 의무실에서 나와 복도를 돌자 티에리아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당연한 수순인 듯 세츠나는 놀라지도 않고 티에리아의 앞에서 바를 잡고 섰다. -면목이 없군.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더니 주저앉아 버렸다. -의무실엔 누가 데려다줬나? -억지로 일어나더니 자기 발로 걸어갔다. 티에리아가 혀를 찼다. 깐깐한 성격은 여전한 모양이었지만 4년 만에 만난 티에리아는 그럭저럭 한 조직의 참모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원체 꼼꼼한 성격이라 그런 일이 잘 어울리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록온 스트라토스는 모르겠고, 세츠나가 자신을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4년만에 만난 알렐루야 합티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좋게 말하면 타인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가 되었고 나쁘게 말하면 뭔가 하나 빠진 사람이 되었다. 4년 세월은 사람을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몰고 가곤 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알렐루야 합티즘이 맞으면서도 다른 사람이었다. 되돌아오는 데에 시간이 걸리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저런 식일 줄은 몰랐다. -여기들 모여 있었네. 아까 그 사람 좀 어때? 록온 스트라토스가 두 사람이 모인 곳에 끼었다. -아, 록온 스트라토스. -알렐루야 합티즘이라면 안정을 취하고 있다. 티에리아가 인사를 하자 세츠나가 바로 대답했다. -너희들 날 보고 울컥대는 거야 이제 그러려니 싶지만, 저치는 대체 뭐냐? 어이없는 얼굴로 록온이 물었다. 표정에 불만이 드러났다. -재활의 일환이라고 생각해주면 어떻겠나. 솔직히 말하면 저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게 반가울 지경이야. 티에리아가 설명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던 알렐루야가 사람을 보고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내심 반갑기도 했던 것이다. 다만 그 격한 반응에, 놀란 멤버들이 더 문제였고 감정조절이 안 되는 알렐루야 합티즘이 건담을 타도 되는 건지가 가장 걱정이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문제다. 저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어. -굉장히 섬약한 사람이었나봐? 록온 스트라토스의 말에 티에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남보다 마음이 약하긴 했지만 오히려 어떤 면으론 더 잔혹하고 무딘 편이었지. 섬약하지는 않았다. -알렐루야 합티즘은 강인한 자였다. 그 록온 스트라토스가 없어진 직후, 세츠나가 숨을 삼켰다. 4년이 지나도 말을 잇기 힘든 것이 있었다. -그는 우리의 의견을 모았고 싸울 것을 건의했다. 그런 자라도. 세츠나의 눈이 록온 스트라토스를 향해 움직였다. -이 일은 충격적인 것인가. -마음이 약해진 탓이다. 티에리아가 단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이다. 게다가 그에게 소개도 없이 저 록온을 보인 건 실수였어. -보인 게 아니야. -응? -보인 게 아니다, 티에리아 아데. 알렐루야가 굳이 보고 싶어 한 거야. 록온이 어이없는 얼굴로 세츠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그래. 티에리아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보여줬나? -그래. -어디까지 알려줬나. -아마 네가 알고 있는 선까지는 알 거다.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했어. 알아서 조사를 해 본 모양이더군. 그래서 보여줬다. 날이 선 티에리아의 질문에 대답하는 세츠나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세츠나 F. 세이에이. 여전히 어리석군. -미안하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저기서 버티지 못하면 그건 알렐루야 합티즘의 잘못이 아닌가. -네 말이 맞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어. -그렇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야기하지?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해졌다. 세츠나의 눈빛이 가라앉고, 티에리아의 눈꼬리가 올라가는 순간, 록온이 몸을 움직여 두 사람 사이에 섰다. -그만 해라. 오래된 동료라면서 뭐 하는 짓이야. 그리고 지금 제일 충격받을 사람은 나거든? 도대체 그 녀석 뭘 어쨌길래 보는 사람마다 날 어떻게 못 해서 안달이래? 노려보던 두 사람의 시선이 떨어지고 나서 먼저 사과한 것은 세츠나였다. -미안하다. 록온 스트라토스. 저자는 네……아니, 전의 록온을 각별히 따랐다. 세츠나의 말 끝에 묻어나는 엷은 한숨에 록온이 혀를 차고 한 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몇 번 겪어 익숙한 일을 처리하는 사람 특유의 체념이 묻어나는 동작이었다. -그런 것 같네.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고, 그럼 나는 사라지지. 아무래도 내가 끼일 자린 아닌 것 같아. -그래. 그리고 책임지는 의미에서 내가 정리를 하지. 그러면 되겠나? -당연한 이야기를 하며 생색내지 마라. 티에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록온 스트라토스. 모의전 결과를 정리해서 제출하기 바란다. 세츠나 F 세이에이는 알렐루야 합티즘의 상태를 가라앉힌 다음 마저 이야기하지. -알겠다. 가라앉히기만 하면 되는 건가? -기왕이면 알렐루야 합티즘이 현상황을 빨리 납득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겠다. 티에리아는 세츠나를 노려보았다. -난 늘 너에게는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지. -차라리 고맙군. 알겠다. 내 할 일은 하지.
복도를 돌아 두 사람의 모습이 없어지고 세츠나는 의무실의 도어록을 해제했다. 멍하니 허공을 보고 앉아있던 알렐루야가 멀거니 문을 쳐다보았다. 세츠나는 벽에 말을 거는 기분으로 말을 건넸다. 왜 그런지 말을 걸고 싶지 않았지만, 동시에 무슨 말이라도 걸고 싶었다. 우선 그의 옆에 다가가 앉아 이름을 불렀다. -알렐루야. -아, 두통은 가라앉았어, 이제 괜찮아. 여전히 멍한 얼굴에 특유의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알렐루야가 말했다. -티에리아가 보냈겠구나. 걱정하고 있겠지. 내가 아리오스를 조종할 수 있을지. 소심한 듯 정곡을 찌르는 발언에 세츠나는 뭐라 말 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하고도 싶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전혀 실례가 아닌 상황임에도 어쩐지 그런 말 대신 다른 말을 더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쪽을 골랐다. -사실과 과히 다르지도 않다만, 그것도 그거지만 네가 너무 달라진 것도 우리에겐 위험요인이다. -나 자신은 별로 4년 전과 다르지도 않은걸. 그건 그렇고, 알렐루야의 어정쩡한 미소가 씁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록온……그러니까 우리가 알던 그 록온은 아니지, 아무튼 록온은? -괜찮다.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거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하기야. 아까부터 피식피식 헛웃음을 흘리는 알렐루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츠나는 할 일을 얼른 해치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보다 여기서 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뭣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너는 괜찮은가. -뭐가? -많이 놀란 것 같은데. -놀랐다기보단 음, 그냥 좀 충격이었지? -그 말이 그 말이다만. 4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알렐루야 합티즘의 언변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말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냐, 정말 충격이었어. 꼭 우리가 알던 그 록온처럼 생겼는데 록온이 아니어서. -아니라고? -응. 닮은 듯 한데 그 사람은 아니라서 그게 충격이었지. 초인병의 감각인가, 세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성격도 많이 다르다. 빨리 파악했군. -그냥 감이야. 알렐루야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표정을 지었다. 눈빛이 다른 공간을 헤메듯 어둡게 가라앉았다. -감? -응, 그냥 감. 감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어감상 즐겁게 않게 들리기는 처음이었다. 세츠나는 말을 돌리고 싶었다. -그럼 그 두통은 뭔가. -나도 몰랐지만, 역시 록온이 없다는 건 충격적인 일인 모양이야. 그 여파가 아닐까 하고.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이런 두통은 안 겪을 줄 알았는데. -안 겪을 줄 알았다고? -그야, 이제 뇌양자파 간섭을…… 음, 아냐. 많은 것을 잃었다. 셀레스티얼 비잉에 잃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알렐루야 합티즘은 그 때, 자신의 유사인격을 잃은 듯 하다고 들었다. 이제 그는 온전히 혼자이다. 록온 스트라토스도, 늘 함께 살아온 반신도 없어졌다. 자신과 같다. -아무튼 내 두통은, 더 이상 내가 왜 이런지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 그럴지도 몰라. 그저 그 뿐, 더 이상 충격을 받지도 않을 것 같다. -역시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 좀 더 안정을 취하겠나? 그리고 세츠나는 그제서야, 왜 자신이 그와 대화하는 역할을 맡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알렐루야 합티즘과 마주보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알렐루야가 자신과 이야기를 하게 하고 싶었다. 록온을 매개로 한 대화가 아니라, 자신과 마주보는 대화를. 왜 하필 지금, 이 때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자신조차 모를 일이었지만. -에이, 괜찮아. 세츠나, 걱정해주지 않아도 돼. -안색이 좋지 않아. 세츠나는 알렐루야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내심, 그가 모든 것을 잃었다는 것이 은근히 기쁜 자신이 기분나빴지만, 이런 식으로 그에게 간섭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다는 건 4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와 얼굴을 마주볼 수 있을 만큼 자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자기자신과의 대화가 아닌 남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더 이상 그와 곧장 대화하는 것을 방해할 요인은 없었다. -내가 걱정을 끼쳤구나. 알렐루야가 어깨를 짚은 손을 조심스레 떼어냈다. -너에게까지 걱정을 끼치게 될 줄은 몰랐어. 하지만 정말 충격을 받은 것 뿐이고, 나는 금방 회복할 거야. -아니, 알렐루야. 세츠나가 하는 말은 듣지 않는 듯, 알렐루야는 먼 곳을 보는 듯 아련한, 혹은 멍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 증거로 세츠나가 하는 말이 무참하게 잘렸음에도 알렐루야는 자기가 뭘 잘랐는지 몰랐다. 저건 먼 곳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내면이라고 세츠나는 생각했다. 그는 항상 자기자신의 내면과 먼저 대화를 한다. 세계와의 소통은 그 다음. -그 때의 그 사람만큼 나이를 먹었는데. 변한 것이 많다고 생각한 자신이 틀렸다고 세츠나는 생각했다. 4년 전과 같다. 알렐루야는 그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록온의 등을 보고 있다. 지금도 그의 내면에 들여다 볼 누군가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티에리아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 볼 록온의 등도 없는데, 낯선 등에 그 그림자를 투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확인한 그 어느날만큼, 자신이 어리다는 것을 실감한 적은 없었다. 자신은 투영할 그림자조차 되지 않았기에. -알렐루야 합티즘. 멍한 눈길로 알렐루야가 세츠나를 바라보았다. -4년이 지났다. 이제 여기를 볼 때야. 나는 그 때의 너보다 더 나이를 먹었어. 너와 같은 입장이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자신조차 모를 때가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어려서부터 말주변과는 담을 쌓아왔던 탓에. 하지만 저 말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알렐루야에게 처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은 저것일지도 모른다. 세츠나의 말을 듣고 알렐루야는 눈을 크게 떴다. 멍한 눈에 검은 점 같은 빛이 한 조각 또렷하게 들어왔다. 세츠나의 말에 대한 분명한 반응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츠나, 저기. -대답은 안 들어도 된다. 세츠나의 손이 알렐루야의 목덜미를 덮었다. -어서 돌아와라. 알렐루야 합티즘. 형제를 포옹하듯 세츠나가 알렐루야의 머리를 팔과 어깨로 감싸안았다. -마주보고 이야기할 준비가 되면 그 때 대답해라.
------------------- 어느 지겨운 연수날, 마침 모 님께 연락을 드리다 그 분이 좋아하시는 커플에 생각이 미쳤고 그럼 이번엔 이런 걸 써 보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개요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 때의 당신만큼-여기 제가 좀 목을 매는 편이거든요. 저 대사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온 알렐루야와 그를 보는 세츠나에 대해 개요를 짜고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글을 마저 쓰기 위해 친구들에게 문자를 돌렸습니다. 지금 이런 거 쓰고 있어요, 라고. 벗님들 약속 지켰소. 이제 다른 거 달리러 가리다.
하지만 쓰던 개요와는 달리 저 아이들은 먼 데로 가 버렸습니다. 캐릭터 왜곡에 대한 책임을 물으셔서 저를 돌로 치셔도 좋습니다. 저 소녀들 대체 뭡니까; 저거 원래 록세츠록 베이스의 세츠알렐이었단 말입니다? 사나이이신 세츠나님께 저 무슨;
혹시 나중에 수정하는 한이 있어도 지금은 올려야겠습니다. 이거 2기 방영되면 쓰지도 못할 떡밥이니 지금 풀어야 쓰겠어요.
그 일은 건담마이스터들과 크루들이 모여있던 중 일어났습니다. -와 세츠나, 많이 컸다. -그렇지 않다. 키나 몸무게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어. 어려서 잘 먹지 못해 키도 몸무게도 남성의 평균치에 미치지 못하는 건담 마이스터는 4년만에 만나는 동료의 인사를 무심히 넘겼습니다. -그래? 달라진 것 같아서 키가 많이 컸나 하고.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은가? 드디어 뭔가 알아챈 모양입니다. 은근한 기대가 담긴 물음에 알렐루야는 세츠나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습니다. -응, 많이 변한 것 같은데, 분위기가. 음, 뭐지.....아! 동료의 손가락이 세츠나의 턱주변을 가리켰습니다. 세츠나는 흐뭇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 이거 말인가. 성인남자라면 기르는 거라서 나도 이제 기르려고 한다.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지 1주일, 요 며칠 적응훈련이네 작전계획이네 바빠서 아무도 자신의 수염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아 솔직히 섭섭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알아봐주니 얼마나 좋은가요. 세츠나는 이제 수염이 간신히 자리잡은 턱밑을 흡족한 마음으로 쓰다듬었습니다. 멋지게 다듬은 콧수염, 까맣고 풍성한 턱수염이야말로 남자의 미덕. 세츠나는 흐뭇하게 수염이 멋지게 자란 자신의 얼굴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어? 그러고 보니 잠깐만, 세츠나. 갑자기 알렐루야의 목소리가 날아와서는 상상속의 자신의 얼굴위에다 무한대의 파문을 그려놓았습니다. -어, 다 좋은데 콧수염은 안 기르는 게 좋겠다. 많이 듬성듬성하네. 콧수염을 기르지 말라니 이 무슨 망발입니까. 그러고보니 거울을 봐도 코 밑엔 수염자국이 거의 안 보여 참 기분이 나쁘던 참에 아픈 곳을 찌르다니! 세츠나는 코 밑을 슬쩍 만져보았습니다. 듬성듬성 자란 콧수염이 손가락에 까끌까끌했습니다. 수염이 많아지는 중이니까 언젠가는 풍성하게 자랄 거라고 믿고 있는데 저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고보니 참 수염이 듬성듬성 자란다. 음, 원래 콧수염이 별로 없는 체질인가봐? 언젠가는 분명 풍성하게 콧수염이 자랄 거라고 되뇌는 그에게 2연타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어 시간차공격이 진행되었습니다. -안 기르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수염 듬성듬성 나면 되게 웃기거든. -.......웃긴다고? -아니 그, 왜 콩나물 시루.......라고 너는 잘 모르겠지만 동양에선 콩을 구멍이 뚫린 시루에 넣어 물을 주고 키우는데 그게 시루 밑으로 가는 뿌리가 빠져나오면 꼭 그런 모양이거든. 세츠나는 침묵했습니다. -넌 수염이 많이 자라지도 않아서 안 기르면 면도할 땐 참 좋겠다. 남의 속도 모르고 해맑은 얼굴로 떠드는 동료의 얼굴이 그날따라 참 얄미워 보였습니다. -수염이 많이 나면 면도하기 힘들거든? 랏세가 그래서 되게 귀찮아했는데. 그렇죠? 알렐루야는 환히 웃으며 자기 말을 거들어줄 사람을 모집했습니다. 안 돼, 오지 마. 세츠나의 간절한 바람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역시 세상에 신 같은 건 없어요. 건너편에 앉아있던 동료들이 하나둘 가까이 와서 세츠나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매일 면도하는 거 그거 보통 일이 아니라니까! 수염은 또 기르기 얼마나 귀찮은데. 넌 좋겠다, 세츠나. 면도하기 편하고 관리하기 편해서. 그거 좋은 거야. -것 봐, 세츠나. 랏세도 그러잖아. 티에리아 봐라. 얼마나 편하게 보여. 수염과 한 조각 인연도 없게 생긴 동료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깔끔한 얼굴도 건담 마이스터의 품위 문제와 관련이 있다. 잘 관리하는 건 중요하지. 그런데 세츠나 F. 세이에이. -왜 그러나? 세상에 신이 없는 건 그렇다치고 내 편도 아무도 없나, 아니 이 자들은 어떤 환경에서 자랐기에 수염의 미덕도 모르나, 어이없어 하는 세츠나에게 티에리아마저 강펀치를 날렸습니다. -역시 기르지 않는 편이 좋겠어. 그 콧수염은 길렀을 때 좋은 모양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관리를 전혀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우려가 있어. 게다가 턱수염도 굉장히 범위가 좁다. 알렐루야 합티즘 말이 맞아. 길렀다간 오히려 웃기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저런 걸 뭐라고 부르나, 록온 스트라토스. 형제와 꼭 닮았지만 성격은 딴판인 새 동료는 피식 웃으며 세츠나의 턱을 유심히 관찰하더니 파안대소하며 말했습니다. -음, 저거? 염소수염이라고. 왜 닮았잖아. 형제와 같은 얼굴로 전혀 딴판으로 반응을 하니 위화감이 두 배에 충격이 두 배입니다. 티에리아가 그의 말을 받아 세츠나의 소중한 수염을 한 마디로 분석해주었습니다. -그렇군, 정말 염소 턱수염과 비슷하다.
세츠나 F. 세이에이, 21세. 어느 화창한 아침에 우울한 얼굴로 수염에 면도기를 대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 수정했습니다. 메신저 대화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얼굴이 가늘고 긴 남자들이 수염도 가늘더라고요. 게다가 저 듬성듬성한 염소수염은 주위에 모델이 하나 있어서 평소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써 봤습니다. 수정 전에 덧글 써 주신 이레 양 백야 님 감사합니다.
에이 그냥 인증하고 치우렵니다. 모 사이트에 올린 걸 손을 봤어요. 역시 사람은 글을 쓰고 퇴고를 해야 합니다. 그냥 두려니까 제가 찝찝해서 견딜 수 있어야 말이죠. 그래도 인증 안 하려고 했는데 보리밭 충격이 너무 커서 말입니다. 거기서 벗어날 겸 손을 보고, 손 보는 김에 그 사이트에 올린 건 지우려고 하다 답글이 달린 걸 보고 뭉클해서 안 지우고 돌아왔음. 누구신진 모르겠지만 정말 고맙습니다. 그 분이 이걸 보실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정말로 고마워요. (보셔도 아마 인증을 꺼리는 풍토 상 덧글 안 다시겠지만 기왕 인증하는 김에 이런 건 표현을 해야죠.) ------------------------------
"살이 텄네?" 엎드린 알렐루야의 허벅지를 베고 뒹굴거리던 록온이 갑자기 툭 내뱉은 말은 앞뒤전후좌우를 다 잘라먹은 말이라 알렐루야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네? 살이 터요?" "여기 말이야." 록온은 알렐루야의 오금께를 손가락으로 주욱 훑었다. 간지러운지 알렐루야가 쿡쿡 웃자 록온의 머리도 웃음소리를 따라 흔들렸다. "아, 뭔지 알겠다. 거기 꼭 소금물 말라붙은 자국 난 것 같은 데? 록온 그거 이야기하는 거예요?" "응, 너 갑자기 키가 확 자랐나보다." "그렇죠, 어릴 땐 작았으니까. 그런데 그건 왜 물어요?" "글쎄, 그냥. 이걸 보니까 너도 아직은 클 나이라는 게 생각이 났나보다.." "에이, 이제 더 클 키도 없어요." 아직 십대 후반, 덜 자란 남자는 소리내어 웃었다. "짜샤 그 소리 아니거든......" 록온이 어이없다는 듯 한숨쉬며 중얼거렸다. 알렐루야는 웃음을 멈추고 엎드린 채로 몸에 힘을 빼고 팔다리를 길게 뻗었다. 허벅지를 베고 있는 록온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어, 갑자기 많이 큰 건 어떻게 알았어요?" "키가 그렇게 크면 원래 살이 트거든. 특히 관절 있는 데." "맞아요. 재 본 적은 없지만 1년에 15cm도 더 컸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갑자기 크면 후유증도 좀 있는데." "전 좋았어요. 체구가 있으니까 살기도 편하고. 그래도 그 때는 자다가도 가끔 깼어요, 다리가 아파서." 알렐루야가 평온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그 때는 아마 요 최근 몇 년간은 아닐 것이다.처음 봤을 때와 키나 체격이 그렇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으니까. 록온은 무심히 머릿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알렐루야의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아프니까, 저 자신도 놀랄만큼 금방 키가 자라더라고요. 몸도 탄탄해지고. 그래서......" 말을 하다말고 알렐루야는 말꼬리를 흐렸다. 의무를 기억한 것이려니.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타인의 과거는 무겁다. 비밀 엄수를 최우선으로 하는 그들이고, 서로 간의 교류도 깊은 수준은 아니라서 지금껏 남의 과거를 들어본 적은 별로 없었다. 더 이상 선을 넘었다간 서로에게 좋지 않으려니. 록온은 말 대신, 대화가 끊긴 것은 괜찮다는 뜻에서 손을 들어 알렐루야의 등을 쓰다듬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이 살을 쓸자 알렐루야가 등을 움츠린다. 난처한 듯 웃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록온은 생각했다. "어릴 땐 작았다면서 이 근육은 다 어떻게 붙였냐. 재주도 좋은 놈." 화제를 돌리자 알렐루야가 금방 대답했다. "예? 뭐 그냥 운동 좀 하고 어릴 때 보다 잘 먹다보니까 생기더라고요." "너 그 말 세츠나 앞에선 절대 하지 마라." "예? 안 돼요? 벌써 했는데?" 록온은 알렐루야와 같이 트레이닝을 하는 세츠나를 떠올려 보았다. 어쩐지 열심이더라니. 그 녀석 말은 안 해도 은근히 신경을 쓰고 있었나보다. 하기야 이 정도 근육을 어느 남자가 안 부러워하겠냐. 에이 별 거 아닌데 왜 그래요, 그게 별 거 아니면 랏세가 운다, 등등 시덥잖은 대화를 하는 동안 땀은 마르고 록온의 손길이 점점 나른해지다, 딱 멎었다. 베고 있던 허벅지에서 머리를 들고, 몸을 일으키고 옷을 주워입는 록온의 등을 알렐루야가 멀거니 쳐다보자, 록온은 장갑을 다시 낀 손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러 갈게. 내일 훈련 때 보자." "아, 불편해요? 전 바닥에서 자도 되는데요." 조금 놀란 듯 당황한 듯 반응하는 알렐루야를 향해 록온은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를 띄웠다. "아니 그런 건 아냐. 잘 자라." 문이 스르륵 열리고 록온도 조용히 사라졌다. 알렐루야는 아직도 체온이 남아있는 허벅지를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말을 돌리게 만든 이유도 자신의 말을 부드럽게 막아놓고 나간 이유도 짐작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것을 반신이 모를 리가. 내일 다시 만나면 저 사람은 네 튼살은 기억하지 못 할지도 모른다는 반신의 야유가 들렸지만 알렐루야는 반신에게 자신의 등을 쓰다듬던 맨손의 감촉을 이야기했다.
요새 연수중이러 컴으로 딴 짓을 많이 하는데(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모처 건담판 보다가 벨파스트 사진 한 장과(올려주신 분, 감사합니다.) 엔딩의 한 장면을 보고 머릿속엔 망상이 몽글몽글 피어올랐으니, 일단 그 놈이 닐 디란디인 건 확실하고(설마 1기 엔딩에 나온 그 놈이 라일이었다, 이런 짓까진 안 할 거 아냐.) 시간 대가 언제냐는 건데......저게 록온의 과거라면 시위 같은 세상을 바꾸는 법에 관심은 많을 것 같은데 그 기사처럼 시위를 주동하는 인물인지는 모르겠다. 내 눈에 걔가 리더감은 절대 아니거든. 리더를 가장은 하겠지. 저걸 누가 썼느냐가 문젠데 그래, 어느 애니잡지 보니까 기사로 사람 낚더라 뭐. 다른 애들을 볼 때 1화 직전쯤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럼 그 시위를 주동하는 입장은 아닐 거라는 데 한 표. 테러리스트 주제에 무슨. 어쨌거나 아일랜드 사람이니까 동네 또래청년들 형님들 어울려 있는데 혼자 그냥 지나치기 뭐해서 조금은 이 사람들이 부럽고, 조금은 안 됐고, 조금은 짠한 마음으로, 아아주 조금은 냉소적인 마음으로 현장에서 같이 구호를 외친 게 아닌가, 하는 망상을 하다가 (어쨌건 자기는 거기 끼어들 수 있는 인간이 아니잖나.)그 곳이 록某의 안가가 있는 곳이라는 걸 떠올렸다.
난 설정도 고증도 안 하고 쓰고 고치는 인간이다. 흠흠. 아니 사실은 퇴고도 안 해. 생각나면 써. 생각이 안 나서 그렇지. ---------------------------------------08. 08. 16 조금 수정. 난 왜 이리 허술하냐-----------------
시위 현장에서 목청 높여 구호를 외치고 있는데, 근처에서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나보다 조금 바깥에, 그렇다고 아주 대열에서 벗어난 건 아닌데 미묘하게 시위대열과 어긋나게 서 있었다. 옆집에 사는 청년이었다. 옆집에 산다고 해 봐야 사실, 무슨 일을 하는지 집은 자주 비우는 것 같다. 집에 불이 켜져 있는 날이 반, 안 켜진 날이 반. 그것도 요 최근엔 불이 꺼져 있는 날이 잦다. 젊은 남자 혼자 사는 것 같다며, 혼자 살면 잘 못 챙겨먹기 십상이니 이웃은 그런 사람에게 관심을 쏟아주는 것이 도리라는 것이 우리 부모님의 신조라 반경 50m 내에 사는 사람들과는 거의 안면을 트고 사귀고 있는데, 이 사람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이 동네에 이사온지 4년은 된 것 같은데 한 번도 말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보니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었더라. 내 이웃에 사는 젊은 남자는 시위대 옆에서, 살짝 비껴선 자세로 구호를 외치며 다른 사람들처럼 손을 젓고 있었다. 살짝 헐렁한 자세인데 묘하게 딱딱해 보였다. 전에 딱 한 번 대화를 할 때도 그랬다. 뭐였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하여간 뭘 부숴뜨려먹어서 드라이버를 찾았는데 십자드라이버가 없어서 이웃에 빌리러 간 적이 있었다. 이웃인데도 어쩐지 긴장이 되어서,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벨을 눌렀다. -옆집 사람인데요, 아무도 안 계세요? 잠깐, 아주 잠깐 뜸을 두고 나서 목소리가 났다. -네, 갑니다! 대답은 해 놓고 왜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던 중 젖은 목이며 팔이며 등이며 입고 씻기라도 했는지 좀 젖은 옷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나타난 젊은 남자는 웃으며 사과부터 했다. 멀리서 볼 때는 냉한 인상이었는데 말투도 표정도 참 수더분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고, 이거 미안하게 됐네요. 씻던 중이라 꼴이 이렇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아뇨, 제가 죄송합니다. 그냥 십자드라이버를 빌릴 수 있을까 해서 왔는데 씻고 계셨군요. 묘하게 남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싱긋 웃고는 발랄한 말투로 말했다. -드라이버? 잠시만 기다려요. 그러고는 현관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조금 있다 손에 십자드라이버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꼴이 이래서 들어오시라곤 못 하겠네요. 쓰시고 나중에 돌려주세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있자니 이 이상 발을 들이는 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씻고 있는데 나타났으니 들어가면 싫어할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마지막 용건만 마치고 돌아가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저, 이거 답롄데 드셔보세요. 이웃과 친해지는 지름길은 음식을 나눠먹는 것이다. 나는 빵 몇 종류가 들어있는 봉투를 내밀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더니 봉투를 잡았다. -오, 감사합니다. 따끈한 걸 보니 집에서 만드신 건가보네요? -네, 제가 요리를 좋아해서요. -야아, 귀한 거네요. 그럼 잘 먹겠습니다. -드라이버는 이따 돌려드릴게요. -아, 네. 혹시 저 없으면 문 앞에 두고 가시고요. 그는 봉투 속에서 버터롤을 꺼내 요리조리 돌려보며 정말 기분좋은 얼굴로 웃었다. 인사를 주고 받은 다음,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니 어쩐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굉장히 사교성 좋고 서글서글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이 위화감의 정체는 뭘까. 오후에 드라이버를 돌려주러 갔을 때, 집이 비어 있고, 문 앞에 작은 주머니가 걸려 있어서 거기 드라이버를 놓고 간 기억도 났다. 웃으며 이야기했는데 왜 깊이 접근하지 말라고 말하는 걸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까. 아무튼 한동안 그 집은 비어있었다.
나는 앞에 선 사람에게 들고 있던 피켓을 넘기고 행렬의 가로 몸을 옮겼다. 시위대는 여전히 주먹을 쥐고 구호를 소리높여 부르짖고 있었다. 위치를 옮겨서 잘 보니 그가 그 곳에 서 있었것은 아주 잠시였던 듯, 이내 피식 하고, 웃더니 이내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던 길이었나보다. 몇 발짝 걸어가다, 대열에 섞여 그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나와 그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한 얼굴에 재빨리 웃음을 띄우고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라, 옆집 분이시네요. 안녕하세요?" "네, 시위에 참가하셨나봐요." 그는 헛기침을 했다. "뭐어 그런 거죠. 그나저나 아직 어려보이는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 칭찬을 받고 머쓱해져 고개를 긁적이다보니 어느새 그는 돌아서 방향을 틀었다. 고개만 돌리고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럼 안녕히." "네, 그러니까, 어......." 물어보려고 고개를 돌리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평범한 안부인사나 왜 그러냐는 일상적인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때 어제 내게 드라이버를 빌려주고, 보답으로 내가 구운 버터롤을 준 그 사람의 이름을 모른다는 걸 알았다. 기억나는 것은 물건을 매개로 잠시 스쳐간 손의 온도 정도. 그 때 물건을 빌리러 갔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때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은 것은 시간이 한참 지나서였다. 그는 마치 잘못 합성한 사진처럼 풍경 속에 억지로 몸을 밀어넣고 있었다. 그 증거로 얼마 전부터 빈 그의 집이나, 그가 살던 때의 그의 집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리고 내가 억지로 기억을 뜯어내서 생각하지 않았다면 잊고 넘어갈 뻔 한 것이 하나 더 기억이 나기도 해서였다. 시위 현장에서 그가 보였던 그 냉소적이고 약간은 아련한 표정.
병장 제대 안 한 처지고 군대고 전술이고 전쟁이고 총이고 아는 거 없습니다. 무식한 채로 글 써서 죄송합니다만 제발 설정은 무시하고 캐릭만 봐 주십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어설프고 허술해도 읽으시겠다는 분만 클릭하시라-.
AEU와 유니온의 접경에 있는, 남반구의 작은 섬에 두 초국가단체의 군인들이 모여든 것은 일단 언론에는 합동훈련이라고 보도되었지만, 사실은 그 근처에 기반을 둔 테러리스트집단의 본부를 치기위한 합동작전이었다. 위치와, 시간, 목적을 변경한 이중의 거짓정보를 던져주어 혼란에 빠진 테러리스트 단체를 기습한다, 양동 작전은 흔한 일이지. 걸려든 쪽이 바보인 거고. 그레이엄 에이커 소위는 소대원들을 본진으로 이동시키는 한편, 부대원 중 고른 몇 명과 AEU에서 파견한 저격수 몇을 이끌고 숲 속을 수색했다. 현장에서 뛰는 게 좋아 자원한 임무지만 이렇게 대놓고 군번 낮은 순으로 나가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질긴 덩굴이 얽히고 섥혀 도무지 흙이 보이지 않는 땅이며 하늘이 보이지 않게 높고 굵고 무성하게 자란 나무며 보고 있자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숲에서 어떻게 게릴라를 잡는다. 대저 게릴라전이 여전히 테러리스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현지인들에게 유리한 점이 있기 때문이지. 그레이엄은 본진을 비우고 숲 속으로 들어가버린 테러리스트들을 쫓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자신과 군복을 입은 젊은이들이 굳은 얼굴을 하고 따라오는 것이 보인다. 아직 젊다 못해 어린 아이들인데, 오늘 처음 사람이 죽는 꼴을 보는 녀석도 있을 것이다. 등뒤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자신마저 위축되게 만들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그레이엄 에이커 본인도 소위 임관한 게 2개월 전 아니었던가. 어깨를 누르고 등을 찌르듯 엄습하는 긴장감을 해소하는 방법은 별 거 없다, 정말로. 그레이엄은 뒤를 돌아보고 피식 웃었다. "싸우다 다치면 국가유공자나 되지만 숲에서 길 잃거나 넘어져서 다치면 부끄러움밖에 안 남는 거 알고 있지? 조심조심 따라와라, 제군들." 마침 수풀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 일보직전이던 앳된 얼굴의 이등병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AEU 저격수부대의 선임이라는 앳되다 못해 어린 티가 나는 젊은 군인이 저격수들을 향해 뭔가 말을 하고 있었다. 말끝에 웃음이 왁자하게 터지는 것을 보니 자기들끼리 하는 무슨 농담인가보다. 자신의 어깨를 누르던 긴장감이 한결 나아졌다. 그 김에 그레이엄은 아까 만났던 선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경례를 하던 젊은 군인은 아무리 봐도 20대 초반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께의 계급장은 중사 같은데. 아무리 부사관이라고 해도 젊어도 너무 젊지 않은가. 자신같은 타고난 동안은 아닌 성 싶고. 그레이엄은 젊은 군인을 한 번 쳐다보았다. 쳐다보는 시선에도 곧은 자세를 풀지 않고 있었다. -관등성명은? 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닐 디란디 중사입니다. 반듯한 태도가 상관은 아니라도 작전지휘관을 존중하겠다는 뜻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레이엄은 호기심과 방금 안 사실을 확인하려는 마음에, 의도적으로 껄끄러운 질문을 던져 보았다. -나이를 물어봐도 되겠나? 디란디 중사는 껄끄러운 질문에도 멈칫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올해로 19세 입니다. -젊은데 중사라니 현장 경험이 풍부한가보군. 그럼 잘 부탁하네, 중사. -네, 소위님.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군인답게 끝이 딱 떨어지는 말투가 오래 근무했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님을 증명했다. 열 아홉에 부대의 선임이라면 얼마나 오래 군대에서 굴렀단 말인가. 하지만 더 이상 대화할 틈은 없었다. "소위님, 앞을 보실 게 아닙니다. 멀리 보십쇼, 멀리." 어느새 자신의 옆에 다가온 디란디 중사가 자신의 옆에서 소곤댄다. 생각에 잠겨있다니, 전시중에. 무슨 말이 안 되는 상황이냐 이건.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얼마나 어색하게 굴고 있는지 알겠다. 조언을 해 주러 온 중사는 마치 자신에게 뭔가 물으러 온 양, 지도와 나침반을 들고 말하는 폼이 장교와 사병들 사이에서 처신을 많이 해 본 솜씨다. 좋은 군인이군, 하고 그레이엄은 생각했다.
작전이 시작된 지 세 시간이 지나 어느새 숲 속 깊이 발을 들이자 작은 교전이 몇 번 있었다. 부상병도 제법 생겼지만 아직 심각한 부상은 아무도 입지 않았다. 일등병의 왼팔에 붕대를 감아주는 상병을 보며 그레이엄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했다. 이 상황으로 볼 때 본진은 이 근처겠지. 지도상에 드러난 지형으로 볼 때 남쪽은 적당하지 않고, 서쪽인가. 그 때 멀리서 뭔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레이엄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고, 뒤를 돌아보니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방탄복을 입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단 몸을 낮추고, 가까이 오면 일단 한 대 먹일 준비를 하느라 팔을 드는 순간, 그레이엄의 머리 옆을, 작은 뭔가가 날카롭게 가로질렀다. 총알이었다. 뒤를 돌아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비명소리가 들렸고, 부하들이 뛰어가고 있었다. 머리 한 쪽에 총알 자국이 난, 당연히 그 옆쪽은 머리 반쪽이 박살난 시체가 누워 있었다. "죄송합니다, 소위님. 잘 마크했어야 하는데.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다가온 사람은 닐 디란디 중사였다. “아, 괜찮아. 하지만 살려두면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놈들은 이게 최선입니다. 어설프게 정보 캔다고 살려두면 그 틈에 뭘 할지 몰라요." 이런 경우를 많이 보기라도 했다는 듯한 말투. 시체 옆에 다가가 소지품을 뒤지고 있었다. 그레이엄도 옆으로 다가가 상처를 확인했다. 정확하게 오른쪽 눈을 쏘아 머리를 박살냈다. 이 위치라면 몸을 보호할 게 아무 것도 없다. 머리를 가린 철모도 없고. 피야 흐르거나 말거나 무심한 손길로 주머니며 무기를 뒤지던 중사는, 자신을 향해 말한다. "식량이며 무기 꼴을 보니 오래는 못 버틸 것 같습니다. 분명 근처에 있고요. 애들 좀 풀어서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동감일세. 그리고 아직 전쟁 경험이 없는 어린애들이군. 일단 얼른 쓸어버리는 게 좋겠어. 슈미트 병장, 지금 이 근처를 수색해보게. 여기 지도에 위치 표시한 쪽을 집중적으로 살펴. 그리고 저격수들은 수색팀을 원호하고.” "예스, 서!" 빠른 속도로 경례를 붙이고 사병들은 숲 속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당연한 수순으로 전투가 몇 차례 이어졌다. 전투 중에 그레이엄은 디란디 중사가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몸에 익어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총을 들어, 겨누고, 쏜다. 사람이 죽어나간다. 전투 중이 아니었다면 한 편의 영화 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총알을 맞은 소년들은 부상을 입고 쓰려졌고, 그레이엄이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해친 첫 전투는 매우 정신없는 상태에서 끝났다. 앳된 청년이 소년병의 등에 대충 붕대를 맨 다음 차에 싣는 모습이며 발목에 총을 맞은 군인을 걷어차다시피 난폭하게 일으켜 세우고 저격수들을 적당한 곳에 배치시키는 모습은 그럴듯하고도 자연스러워, 한두 번 전장에 나온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정말로 좋은 군인이다, 그레이엄은 그렇게 판단했다. 아울러 흉흉한 적이 될 수 있으리라고도.
상황종료. 소년병들은 포로수용소로 보내질 것이다. 숲을 벗어나 상황보고를 하고, 막사로 돌아가던 그레이엄은 막사 앞에 불량한 자세로 앉아 초코바를 입에 물고 총을 손질하고 있는 디란디 중사를 보았다. 근처로 다가가자 먹던 걸 얼른 삼키더니 일어나서 경례한다. 감이 좋은 편인 건 저격수여서겠지. 그레이엄은 웃으며 말을 붙였다. “아, 경례는 됐어. 여기 앉아도 될까?” 잠시 생각하는 포즈이던 디란디 중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괜찮습니다만…….” “별나십니다. AEU 소속 군인에다 부사관인 저와 어울리시게요?” “네?” 중사의 표정이 더더욱 이상해졌고, 그레이엄은 피식 웃었다. “자네 지금 그런 생각 하고 있지? 괜찮아. 일단 오늘은 자네나 나나, 전우 아닌가. 전우일 때는 사귀어 놓아야지.” 중사는 표정을 풀고 웃었다.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뭐 자네만 할까. 닐 디란디 중사.” 그레이엄은 운을 띄우고, 곧바로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한 두 번 쏴 본 솜씨가 아니군. 주로 현장에서 뛰었나?" "네. 그래서 이 나이에 중사 달았죠." 철모를 벗자 드러난 짧은 갈색 머리가 더 어리게 보인다. 중사는 일단 대화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총을 옆에 모셔두는 것으로 표시했다. “하긴 아까 솜씨가 쓸만하더군. 그 정도 저격실력이면 어지간해선 못 맞추는 게 없겠어.” “과찬이십니다. 오래 했으니 잘 하는 것 뿐이죠.” “오래? 몇 살 때부터?” 중사는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그나저나 소위님은 오늘이 첫 전투십니까?” “그랬네. 덕분에 많이 도움이 되었어.” “아뇨, 저도 덕분에 잔챙이들은 많이 골로 안 보내고 끝내서 편했습니다.” “어린애들은 죽이기 싫은 건가?” “아뇨, 총을 잡았으니 테러리스트고, 그러니 용서할 대상은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어린 애들은 저 길 말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게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죠.” 별로 말은 많이 안 해 봤지만 닐 디란디 중사가 이렇게 긴 말을 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눈을 빛내는 그레이엄의 표정을 보더니 중사는 헛기침을 했다. “그냥 헛소리였습니다. 잊으시죠. 아무튼 오늘은 깔끔하게 잘 끝나서 다행입니다.” “다 자네 실력 덕이지. 자네랑 다른 전장에서 적으로 안 마주쳤으면 좋겠어." 중사는 머쓱한 듯 웃고는 조금 풀어진 말투로 대답했다. "안십하십쇼, 짬밥 먹기 싫어 제대원을 냈습니다." 그레이엄은 놀라서 대화상대를 쳐다보았으나,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중사를 한 차례 훑어보고 웃으며 말했다. "하긴 자네 정도로 아름다우면 군인은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플래그 파이터라면 또 모르지만." 중사는 별 희한한 말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 "방금 그 말씀 성희롱이십니까?" "아니, 그저 나는 솔직한 성격이라 생각한 걸 바로 입 밖에 내는 일이 잦다네. 그런데 아름답다는 말 처음 듣나? 자네 정도면 어려서 제법 인기 있었을 것 같은데." “듣는 사람 무섭습니다.” 쓰게 웃으며 말하고, 중사는 방금 들은 단어를 입에 올려 화제를 바꿨다. “플래그 파이터라면 유니온의 모빌 수트 말씀이시군요.” “그래. 아나?” “뭐 새로운 정보도 아니었으니까요.” 서글서글한 것 같으면서도 말을 아끼는 편이다. 말을 바꾸는 요령도 좋은 편이지만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고, 그레이엄은 은근히 이 어린 군인이 쌓은 벽이 두껍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럼 앞으로 만날 일은 없겠군?” “민간인 상대로 전투 안 하신다면, 그렇습니다.” “군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보군.” 정곡을 찔렀나, 그레이엄은 내심 즐거웠다. 단정한 군인의 모습이던 청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대답할 의무는 없으므로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만, 폭력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테러리스트는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이?” 아, 또 정곡을 찔렀다. 그레이엄이 이번엔 좀 심하게 찔렀나 하고 멈칫하던 찰나, 중사는 총을 잡으며 웃었다. “그럼 저는 총을 마저 손질해야겠습니다. 소위님, 푹 주무십쇼. 이런 밤엔 그저 자는 게 제일입니다.” 거 은근히 빈틈없는 놈일세, 그레이엄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긴 제대하려고 마음 먹은 눈에 군인이 어디 예쁘게 보일까.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결론내린 그레이엄은 미련 두지 않고 일어섰다. “싫다면 할 수 없지. 그럼 이만.”
그리고 나흘 뒤 합동본부는 철거되었다. 두 사람은 이런저런 작전 사이에서 서로 지원을 해 주기도 하고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며 합동작전, 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은 정도로 만났고, 별로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그리고 어수선한 막사사이에서 짐을 정리하고 부하들을 챙기다 만난 두 사람은 짧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소위님, 건강하십쇼.” “자네도 평온하게 살게.” 그레이엄은 이 전쟁터, 저 전쟁터를 다니고, 플래그 파이터가 되고, 건담을 만나게 되는 등 폭풍 같은 삶을 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 첫 전투를 떠올려 보아도, 그 군인이 적성에 맞지 않아 보이던 위험한 청년의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N으로 시작하긴 했는데. 그런 사람이 한 명 있긴 했는데,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거니, 하고 가끔 떠올릴 뿐.
---------------------------------------------------- 어린 록온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아직 덜 커서 까칠하고 어린애 같은 록온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렇게 까먹어 놓고 나중에 만나 네무리 히메니 베제니 하는 헛소리 늘어놓는 그라함을 써 보고 싶었습니다.
실은 전쟁터에서 두 사람이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후로 24시간동안 꼬박 망상하다 쓴 게 요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아악; 위에 적은 셋 중 두 가지만 느끼셔도 전 정말 고마울 것 같아요오.
설정상 무리있다는 지적 환영합니다. 그리고 제목 센스 없다는 지적 환영합니다. 제발 누가 제목 좀 지어 주십쇼.
록온 여체화......입니다. 알렐루야......동물화 했습니다. 그래도 좋으시면 클릭하시라.
옛날 옛날 어느 산골 마을에, 연로하진 않으시지만 술을 워낙 즐기셔서 가끔 손이 떨려서 문제인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성격 좋고 일 잘하고 서글서글한 처녀가 살았습니다. 처녀의 이름은 록분이에요. 록분이는 혼기를 놓친 노처녀입니다. 친구들은 모두 시집을 가서 아이를 한 명도 아니고 두 명, 세 명이나 길에서 뛰어놀만큼 키워놓도록 시집을 못 갔어요. 일 잘하고 성격 좋고 피부도 뽀얗고 얼굴도 곱죠. 다 좋아요, 좋은데, 록분이에게 장가들고 싶어 하는 총각이 없는 거예요. 얼굴이 봐줄만 하면 뭐 하나요. 백옥같이 뽀얀 피부면 뭐하나요. 처녀가 좀 씩씩하게 생겼어야 말이죠. 어깨는 떡 벌어지고 기골은 장대하고. 싸나이죠. 치마만 입는다고 여자랍니까. 암만 좋게 봐 줘도 남자답게 잘 생긴 얼굴이지 여자답고 조신한 상은 절대로 아니었어요. 머리는 삼단은 삼단 같죠, 숱 많다는 점에서만. 그걸 대충 땋아다가 댕기도 댕기 같지도 않은 걸로 질끈 묶어다가 통치마는 단이 다 터져있어요-왜 터졌을 것 같아요? 감자밭 매다가 막 주저앉아서 자기 발로 자기 치마를 밟아대니까 그렇죠. 예, 여자를 얼굴로 평가하는 게 아니죠. 얼굴 삼 년 뜯어먹으면 오래 가는 거라는 옛말 틀린 게 없죠. 하지만 록분이보다 객관적으로 보다 못한 처자들이 줄줄이 시집을 가는데도 록분이는 노처녀인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록분이는 껍데기만 싸나이가 아니거든요. 성격도 좋게 말해 서글서글한 거지, 혼기 꽉 찬 처녀가 동네 어지간한 노는 형님들보다 더 형님 태가 나면 말 다한 거 아닙니까. 당신 같으면 당신보다 저격도 잘 하고(뭔 놈의 처자가 새총질은 그렇게 잘 하는지 누워서 막걸리 푸다가 새총으로 하늘을 나는 참새를 잡았대요. 그날 그 놈으로 술안주 해먹었답니다.)당신보다 쌈질도 잘 하고 예리하기는 죽도록 예리한데다가 당신보다 더 싸나이 같고 당신보다 더 형님 같은 여자한테 장가 들고 싶냐는 마을 청년들의 발언이 괜히 나온 게 아니지요. '록분아, 술내기 하자!' '록분아, 이따 뒷산에 토끼 잡으러 가자, 아니 토끼가 다 뭐냐, 넌 사슴 좀 잡아봐라 술안주 하자!' '록분아, 팔씨름하자! 진 놈이 술 사기다' 이런 소리를 하는 놈은 있어도 '록분아, 나하고 살자!' 소리를 하는 놈은 없으니 그 인기가 다 헛거죠. 어머니가 마시는 술은 나날이 도수가 높아졌으나 -그래, 이것이 딸년 치울 때 따르는 고통......이 아니잖아. 록분이 이놈의 계집애 청소하랬더니 또 사내놈들이랑 어울려 놀러 나갔냐! 안 마실래야 안 마실 수가 없잖아. 쳇. 이렇게 오늘도 또 한 병이 비네.- 록분이는 어머니 드시고 남는 술은 자기 거라고 희희낙락 즐겁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록분이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장에 감자 내다팔아서 먹을 쌀 팔고 어머니 드실 술도 사러 갔어요. 어머니께선 숙취가 심하니 약을 사 오라고 하신 걸 잊지 않고 록분이는 해장약을 사러 갔어요. 약국 간판에는 인혁련이라고 적혀있었고, 언제나처럼 아라사에서 물 건너온 기기묘묘한 약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약사 세르게이 아저씨는 뚱한 얼굴로 딸인 소마에게 이것저것 가르치고 있었어야 하는데……어쩐 일인지 아저씨가 가게 밖에 나와 있었어요. 손가락 끝으로 두꺼비 다리를 집어 들고 있었고, 두꺼비는 처량맞은 소리로 울고 있었는데 세상에 두꺼비 주제에 눈이 금은요동인 겁니다. 거기다 사납고 튼실한 생김새에 어울리지 않게 울망한 눈으로 훌쩍훌쩍 울고 있었어요. 두꺼비도 눈물 흘리면서 우는 게 정상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눈매가 마음에 들었던 록분이는 세르게이 아저씨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그 두꺼비 버릴 거유?" "그래." “왜요? 이렇게 귀여운데.” “모르는 소리 마라. 얘가 얼마나 흉폭한데. 약 팔러 갔는데 다른 차력사네 사자를 죽였지 뭐냐. 이름이 타오츠였나 뭐였나…….” 록분이가 말을 잘랐습니다. "그래도 아깝잖아요. 그럴 거면 그냥 절 주쇼, 이거랑 바꿔드릴게." 록분이는 어머니 안주로 싸들고 가던 떡꼬치 세 개와 두꺼비를 맞바꾸었습니다. 세르게이 아저씨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소마가 떡꼬치를 보고 입맛을 다시며 아버지를 쳐다보는 통에 마음을 바꿨지요. “이거 내가 남는 장사인 것 같은데……조심해라. 위험하면 바로 버리고.” “네, 참. 근데 얘 이름 뭐예요?” “응? 알섬(蟾)이.” “와, 이름 재밌다.” 록분이가 피식 웃자 세르게이 아저씨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록분이는 뭐 멀쩡하냐? 옛다. 어서 데리고 가거라.” 록분이는 두꺼비를 받아, 가슴팍에 소중히 안고 길을 갔습니다. 어쩐지 두꺼비가 얼굴이 발그레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착각이겠지요.
해가 다 져서 집에 가니 두꺼비는 발그레한 얼굴로 쌕쌕 자고 있습니다. 장 본 걸 부엌에다 부려놓고 방에 들어가서 두꺼비를 내려놓고 어머니를 모셔오니 어머니가 난리가 났습니다. “딸아……내가 장 봐오랬지 애완동물 사 오랬던 적이 있었니?” “에이 엄마도. 내가 잘 키울게. 걱정하지 마.” 어머니가 인상을 쓰고 목소리를 깔아도 딸은 천하태평입니다. “쟤는 뭐 공기만 마시고 사냐? 먹는 건?” “내 밥 나눠주면 되잖아요. 잘 키울게, 응?” 자식 이기는 부모님 없지요. 어머니 스메라기 여사는 못마땅한 얼굴로 두꺼비를 보며 혀를 찹니다. “하지만 영 불길한걸……아니, 어떻게 보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기도 하고.” “아유 참, 엄마가 무슨 점쟁이유? 괜찮아. 두꺼비 한 마린데 뭐.”“내가 이럴 때 틀리는 거 봤냐? 모내기 때마다 내가 가서 비 올 때 안 올 때 다 예보하는 거 몰라? 거 참. 아 몰라. 이제 네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해.” 어머니도 허락하셨겠다, 록분이는 두꺼비를 곱게 들어다가 자기 머리맡에 놓아둡니다. 잘 때는 끌어안고 자고 먹을 땐 자기 먹던 밥을 나눠먹어요. 두꺼비는 어쩐지 부끄러워하는 것도 같고 좋아하는 것도 같습니다. 얼굴을 붉히면서 록분이 손에 머리를 부비다가도 가끔 허공에 머리를 휘저으며 1두꺼비2역을 하는 것 같은 행동을 할 때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조용하고 귀엽고 밥도 잘 먹고 청소까지 잘 합니다. 밭에 던져놓으면 밭도 잘 갈아요. 반듯하게 갈아놓은 밭을 어머니가 보신 다음날부터 록분이네 집 밭이며 논을 낮에는 한 마리 두꺼비가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작은 몸에 큼지막한 쟁기를 도대체 어떻게 메는지 모르겠는데 여튼 메고 도도도도 두다다다 밭을 갑니다. 간혹 두꺼비 등에서 쟁기가 떨어지면 보고 있던 어머니가 쟁기를 고쳐매주면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인사를 하고는 또 밭을 도도도도 갑니다. 어머니는 올해 안주값 정도는 건진 것 같다며 만족해 하고 계세요. 그런데 하루는 록분이의 있지도 않은 가슴골에 머리를 디밀고 자는 걸 본 어머니께서 저 놈의 밝힘증 두꺼비 부엌에 갖다놓으라고 해서 -평소에는 안 그러는데 참 이상한 일이죠- 하는 수 없이 록분이는 부뚜막에다가 알섬이를 올려놓고, 배고프면 먹으라고 감자도 하나 갖다놓고, 어머니 구박 받으면서 장작 좀 패 놓고 다시 부엌에 와 보니 두꺼비는 어디가고 웬 덩치 좋은-어지간한 남정네들보다 큰 록분이보다 더 클 것 같은데요?-남정네가 부뚜막에 쭈그리고 앉아 자고 있네요? “못 보던 사람인데……누구지? 이봐요. 이봐요?” 록분이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자 자던 남정네가 눈을 뜹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보다 잔잔하게 웃으며, “어, 록분 아씨, 안녕하세…….” 말을 하다 갑자기 말을 멈춥니다. 그러더니 자기 몸을 살펴보네요. 어째 자기가 더 놀란 표정이네요. 눈을 꿈벅꿈벅 하더니 갑자기, “얼레, 이게 뭐야? 사람 손이랑 팔이네? 왜 이런 게 붙어있지? 할섬아, 대체 이건 뭘까? 세상의 악의? 아니 선읜가? 대체 이게 뭐지?” 라며 혼자 허공을 보고 중얼거립니다. 기가 막힌 록분이가 멀거니 그 남자를 쳐다보고 있으려니 이 남정네, 혼잣말을 그칠 줄을 모릅니다. “할섬아, 그래도 그렇지 그런 반응은 실례야. 록분 아씨는 좋은 분이시잖아. 아, 맞다! 고마워. 이야기 꼭 할게.” 하더니 록분이를 쳐다보며 방긋 웃습니다. “음, 놀라셨죠. 록분 아씨. 저 두꺼비예요.” 이제 록분이가 눈을 꿈벅거릴 차례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걔라고?” “네! 저예요, 알섬이.” 이 무슨 베다 풀 뜯어먹는 소리랍니까. 두꺼비가 어떻게 변신을 하면 저렇게 되죠?
“그러니까 네가 알섬이라고?” “네. 전에 세르게이 씨한테 저 사 오셨잖아요. 떡꼬치 세 개 주고.” 그래서 안주가 모자랐냐? 하며 노려보는 어머니의 시선은 록분이에겐 안 먹히나 봅니다. 비딱하게 앉아서 턱을 괴고 남정네를 노려보고 있네요. “으흠, 진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저기, 눈 좀 걷어봐라?” “이, 이렇게요?” 남정네는 양 손으로 눈을 덮은 머리카락을 머리 위로 쓸어넘겼습니다. 금은요동의 눈동자가 드러나네요.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던 록분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으흠, 맞는 것도 같네? 그런데 왜 변신하는데?” 록분이가 얼굴을 붙잡자 얼굴을 빨갛게 붉히던 알섬이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근데 밤에만 이렇게 되는 거 같네요.” 록분이가 어머니 귀에 대고 소근거립니다. “혹시 부뚜막 힘인가? 엄마, 저 부뚜막 그 때 빌리 아저씨가 해 준 거 맞지?” “그 놈 연애는 쑥맥이더니 이런 쪽에 제법이구나.”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군거립니다. 두 사람이 수근대는 걸 불안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알섬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꺼냅니다. “저기요, 저 이제 여기서 못 사는 거예요?” 여자 둘만 사는 집에 남정네가 얹혀 살면 동네에 말이 나기 마련이죠. 알섬이라고 모르겠습니까. 록분이 혼사 문제로 어머니가 골치를 썩이고 있는 것 정도야 알죠. 암만 털털한 록분이라도 이건 안 된다는 건 압니다.하지만 록분이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요. 알섬이는 전에도 약국에서 못 살고 이리 왔었지요. 아마 지금 쫓겨나면 충격이 클 거예요. 록분이가 어머니를 쳐다보고, 어머니는 재미있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엄마, 어떻게 안 될까?” “흐흠, 글쎄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시키시는 건 뭐든지 할게요.” 알섬이는 유순한 표정으로-덩치며 생긴 거에 안 어울리게 참 얌전했습니다.-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필사적이기도 해요. 록분이와 어머니는 얼굴을 마주보았습니다. 어머니의 표정이 수상쩍군요.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표정입니다, 저건. 전에 이웃집 그라함 씨랑 논에 물대기 싸움을 할 때 어머니 표정이 딱 저랬죠. 록분이가 뭐라 말하기 전에 어머니는 히죽 웃었습니다. 분명히 지금 뭔가 생각하는 게 있어, 하고 록분이는 짐작해 봅니다. “돈☆마이, 저는 초두꺼비라 일 하나는 잘 한답니다.” 그 표정을 뭐라고 생각한 건지 알섬이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눈을 번쩍번쩍 빛내며 알섬이를 쳐다보십니다. “그래, 그럼 밥값은 해야지? 덩치도 좋아서 많이 먹겠는데.”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은 록분이네 밭이 참 진풍경이라며 수군댔습니다. 낮에는 두꺼비가 농사를 짓더니만 밤이면 웬 검정 옷 입은 총각이 나타나서 즐거운 표정으로 ‘이런 일이라면 매일 할 수도 있겠는데’어쩌고 하며 김을 매고 배추도 묶어주고 콩잎도 따고 깨도 털고 논에서 피도 뽑고 새참도 알아서 만들어 오는 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록분이는 멀거니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립니다. "와, 좋은 두꺼비구나." 하지만 록분이는 등 뒤에서 ‘이것아, 한 집에 붙여놨으면 제발 진전이 좀 있어라, 좋은 두꺼비가 아니잖아 거기선!’ 하고 속으로 부르짖는 어머니 심정은 잘 모르는 모양이에요.
알섬이는 일도 잘 하고 설거지도 잘 하고 요리도 잘 합니다. 혹시나 일 못 하면 쫓겨날까봐 그러는지 정성을 다 해 일하고 있습니다. 잠도 부뚜막에서 자면서 한 번도 안 굴러떨어지고 조용히 잘 잡니다. 참 신비롭죠. 하지만 가끔 허공을 보며 혼자 중얼거리는 건 어쩔 수 없나봐요. 하루는 자다가 방이 식어 추운 록분이가 불 좀 때야겠다고 부엌에 들어서는데, 이상한 이야기소리가 들립니다. “합섬아, 그만 해.” “짜샤, 너 하는 짓이 답답해서 내가 나왔다. 전부터 그랬잖아, 엉덩이 라인 죽인다며? 허벅지가 백만냥이라며?” “그, 그야 그랬지만…….” 어째 두꺼비가 부끄러워 하는 것도 같습니다. 안을 들여다보니 알섬이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한 쪽 눈이 드러날 때 마다 말투가 바뀌네요. “이 새꺄 기껏 사지육신 생겨가지고 하는 짓이 밤마다 밭 가는 거냐? 이 답 없는 놈아. 힘이 남아도니? 응, 남아도냐? 그 힘 어따 쓸래, 그냥 콱 덮쳐!” “응? 덮쳐서 뭐 할 건데?” “우와아~ 미치겠네, 야 이 빙신아. 보기만 하면 뭐 하냐?” “어어, 나는 그냥 보기만 해도 좋고…….” 아무래도 두꺼비가 영 맛이 간 모양입니다. 아니면 자기가 꿈을 꾸고 있거나요. 록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그냥 자던 거나 마저 자기로 했습니다. 분명 꿈일 거예요. 안 그러고서야 저렇게 서로 다른 사람인 양 이야길 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역시 못 들은 척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낮에 밭에서 일 하는 걸 귀엽다고 잡아다 끌어안고 부비적거리던 거며, 말 잘 듣는다고 상으로 뽀뽀해 준 것도 잊기로 했습니다 그 때 얼굴 붉힐 때 알아볼 걸 그랬어, 하면서요. 그러게 무방비하게 아무 데나 웃음 뿌리고 다니면 큰일 난다는 옛 어르신들 말씀이 헛게 아니라니까요. 아니나다를까 일이 벌어졌습니다. 며칠 후, 마을 사람들이 록분이 모녀를 찾아왔습니다. 마을 뒷산에는 사셰스라는 오래묵은 지네가 살고 있었는데 성정이 괴팍해서 부수고 싸우는 걸 좋아하는지라 마을 사람들이 지극정성으로 받들어모시지 않으면 큰 일이 나곤 했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그 지네가 마을 사람들에게, 처녀를 한 명 데리고 오라고 요구를 했답니다. 이야기흐름상 당연히 그 처녀는 록분이였고요. “록분이를요?” “네. 허벅지가 마음에 든다고…….”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내 엉덩이랑 허벅지가 뭐 어쨌는데! 록분이는 혀를 찼습니다만 어쩌겠어요. 두꺼비랑 지네니까 사람보다 낮은 데 눈이 달려있으니 바닥에 있으면 허벅지랑 엉덩이가 당연히 보이는 거죠. 어머니의 반대며 온갖 부정적인 예측은 무시당했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당연히 알죠. 지네가 록분이를 곱게 보내줄 리 없잖아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록분이 하나만 희생하면 온 마을이 조용한 것을요. 록분이도 그 정도는 압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가 줘야죠. 하지만 조용히 당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중에 무슨 말을 듣더라도, 마을 사람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 값은 그 때 치르면 되고, 지금은 그냥 당하고만 있진 않을 거라고요. 가서 지네를 두들기건 찌르건 뭐라도 해 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알섬아, 그럼 난 간다. 저기 부엌에 밥 차려놨으니까 저거 먹고, 나 없는 동안 우리 어머니 잘 부탁한다.” 낮이라 알섬이는 아무 말도 못 하지만 울망한 눈으로 록분이를 쳐다보며 뭐라고 말하려는 듯 합니다. “괜찮아. 금방 올게.” 록분이는 해사하게 웃으며 뒤돌아섭니다. 어쩐지 뒷모습이 영 위태로워보이네요. 금방 온다고 말하는 사람 치고 정말 금방 오는 사람 없는데. 알섬이가 안절부절 못 하며 중얼거리는데, 알섬이의 머릿속에서 무슨 소리가 들립니다. “등신. 그러게 있을 때 잘 하란 말이다.” “할섬아, 지금 그럴 때가 아니잖아. 록분 아씨를 구하지 않으면!” 마음 속 또 다른 인격, 아니 섬격(纖格) 할섬이가 비웃는 소리가 알섬이의 귀에는 똑똑히 들립니다. “아, 진짜! 그래서 지금 구하러 가겠다고?” “그래.” 아무리 결연히 다짐해보아도 할섬이의 비웃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무슨 수로? 지네를 어떻게 이길 거지?” “합섬이 너만 도와주면 돼. 한 번만 도와줘.” 알섬이는 진지하게 부탁해 봅니다. 그러자 재 보듯, 할섬이는 뜸을 들이며 말합니다. “도와주면 뭐가 좋은데? 내게 뭐 좋은 거라도 있냐?” “……합섬아, 한 번만.” 할섬이가 노려보는 시선이 따갑습니다. 하지만 한 번만 할섬이를 붙잡고 늘어져 봅니다. 알섬이 자신의 일부이고, 지금 알섬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입니다. 한참을 쳐다보고 있던 할섬이가 한숨을 쉽니다. “알겠다, 알겠어. 내가 알섬이 넌 못 이기겠다니까.” “할섬아…….” 기쁨에 환호나는 알섬이의 머릿속에서 할렐루야가 고개를 외로 꼬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대신 너, 이번에 구해주고도 기회 놓치면 내가 나와서 확 저질러버릴 테다. 알아서 잘 해.” “응, 뭔진 모르겠지만 잘 할게!” 알섬이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걸 본 것처럼 할섬이가 혀를 찹니다. “아 이 등신은 답이 없어, 몰라, 가자!”
알섬이가 헐레벌떡 지네동굴로 들어가자, 초주검이 되어 늘어진 록분이가 보입니다. 지네에게 맞았는지 온 몸이 상처투성이네요. 저러다 무슨 일 나는 건 아닌가 모르겠어요. 지네가 록분이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턱을 끌어당긴 포즈로 소 있고 록분이는 축 늘어져 있습니다. “거 간만에 재미난 거 하나 건졌네. 좀 팔팔하니 앙탈도 부려야 제 맛이긴 하단 말이야. 그런데 좀 과했어. 나도 슬슬 기분나빠지려는 참이거든?” 록분이가 한 눈으로 지네를 노려봅니다. “헛소리 마. 이게 그냥 앙탈로 보이냐? 난 네가 싫어서 전심전력으로 반항하는 건데?” “그래, 그게 앙탈이라니까?” 지네가 머리채를 놓고 쓰러진 록분이의 한쪽 눈을 정통으로 가격합니다. 록분이가 얼른 눈을 감쌌지만, 알섬이 눈에는 똑똑히 보입니다. 출혈이 심해요. 저러다 한 눈이 멀어버릴 것 같습니다. “록분 아씨!” 알섬이가 소리를 지르며 지네 앞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록분이를 가리고 선 알섬이를 보고 지네가 한쪽 입가를 비딱하게 끌어당기듯 웃습니다. “어, 저건 뭐야. 사람 꼴을 한 두꺼비잖아?” 척 봐도 알섬이보다 지네가 세 보입니다. 록분이가 몽롱한 정신으로 봐도 그래요. “알섬이 넌 왜 여기 왔어……. 오지 않아도 되는데.” “이럴 땐 제발 자기 몸부터 챙기세요.” 알섬이는 지네를 노려봅니다. 그리고 평소 한쪽 눈-금색 눈이었어요, 주로. 혼잣말을 할 때는 간혹 은색 눈도 나왔습니다만.-을 가리고 있던 알섬이가 갑자기 양손으로 앞머리를 뒤로 척 넘기며 중얼거립니다. “야, 지네, 나랑 좀 붙자?” 지네가 코웃음을 칩니다. “두꺼비 주제에 날 이기겠다?” “그냥 두꺼비 아니다. 완전한 초두꺼비가 뭔지 보여주지.” 록분이는 몽롱한 정신에 알섬이랑 할섬이니까 합치면 합섬인가, 근데 초두꺼비 되게 웃긴다……하는 생각을 하다 그만 정신을 놓아 버렸습니다.
그 뒤는 말 하나 안 하나 해피엔딩. 싸우는 와중에 할섬이는 먼저 간다며 가 버렸대요. 이 부분만 해피엔딩이 아닌 듯 하지만. 알섬이는 지네를 이겼고요, 록분이의 눈은 무사했습니다. 부상을 입은 다음 날 부상이 심한 록분이를 치료한다고 동굴에서 밤을 새고 내려가서 의사에게 보였더니 마을 의사 모레노 씨 말로는 치료가 조금 늦은 듯 했지만 그래도 이만하길 천만 다행이라나요. 도대체 뭘 했길래 치료가 늦었냐는 말에 록분이가 허공을 보며 헛웃음을 짓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어머니가 알섬이를 붙들고 우리 딸을 책임지라며 알섬이를 몰아붙여서 그 해 가을 추수가 끝나자마자 둘은 혼례를 올렸습니다. 록분이는 뭐 그 정도 가지고 책임지라 마라 하냐며 웃더니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혼례 하면 나는 좋다고 그래서 알섬이는 얼떨결에 장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자기가 왜 책임을 져야 되는지는 잘 몰랐지만 뭐 어때요, 록분이랑 산다는데 이런 기회를 거부하면 할섬이가 화를 낼 겁니다. 전에 말했던 게 아마 이런 뜻인가 보죠. 아무튼 그 겨울에 알섬이와 록분네, 어머니가 사는 집 앞에 베다의 뜻이니 잘 키우라는 쪽지와 함께 예쁘장한 보라색머리 여자애가 놓여진 걸 거둬 키워 식구가 넷, 이듬해 태어나 알섬이가 세츠나라고 이름을 붙인 아들까지 다섯 식구가 오글오글 모여 즐겁게 잘 살았답니다. 여전히 어머니는 술을 과하게 드시고, 여전히 록분네는 싸나이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죠.
메신저에서 이야기 하던 중, 토끼 님 아이디어 내시고 리린 님 이야기를 이어 가셔서 알섬이와 록분이 이야기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두 분 아이디어 받아 쓴 거 밖에 없어요. 이게 재미있으면 다 두분 덕입니다. 근데 글재주도 없으면서 제가 굳이 이걸 쓴 데는 치사한 이유가 있었으니-
L 모 님 지네를 물리치고 해피엔딩 찍어도 참 볼만한 장면 나올 듯 L 모 님 걱실한 록분네로 업그레이드한 낭자와 바지런한 알서방으로 업그레이드한 두꺼비총각의 L 모 님 견실한 농촌드라마가...... L 모 님 이듬해 누가 업둥이로 버리고 간 보라머리 여자애와 T 모 님 전oo일기....... L 모 님 그 이듬해 마침내 태어난 천하대장군감 옥동자 츠나도령 L 모 님 술메라기엄니를 모시고 사는 단란한 네 가족.... 죽겠다 ;ㅁ; L 모 님 누구든 이거 써주심 팬아트 그리겠어요 <-
이니셜 처리해 봐야 소용 없는데, 그날 대화 중에 저런 대목이 있었답니다. 증거품으로 올려놓아 봅니다. (도주) 잘 써야 된다는 말은 분명 없으셨잖아요.
이제 와서 더블오 내용이 네타가 될 리 없죠. 워크스라면 저랑 피아가 2단콤보로 불타는 거 봐서 내용은 다들 조금씩 아시는 거 압니다. 그리고 덕질 못 하게 된 건묘의 인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겸, 더블오 안 본 멤버들이 하루 빨리 손을 대서 10월엔 같이 불타보자고 작정하고 이러고 있는 거니까 좀 네타를 해도 상관도 없을 거라 믿습니다.(실지 네타를 당하고 본 피아도 잘만 낚였음.) 그래도 일단 가려놓겠습니다. 2기 네타도 조금 있고 해서.
-옛날 중국에는 전족이라는 풍습이 있었대. 어린 여자아이의 발가락을 발바닥에 딱 붙을때까지 구부리고, 그 발을 헝겊으로 칭칭 동여매어 놓는 거야. 당연히 아프지.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잖아. 못 걸어. 뒤틀려서 걷지를 못 해. 아이가 걷고 싶어 해도 절대로 풀어주지 않아. 그렇게 구부러진 발이 말짱하겠니. 당연히 발은 썩어들어가지. 발이 썩어들어가면 치료를 하냐고, 아냐. 붕대를 갈아주지. 그렇게 꽁꽁 동여매고 동여맨 발은 더 이상 자라지 않아. 그렇게 뒤틀린 채로 더 자라지 않은 발은 다른 몸이 자랄 동안 한 치도 자라지 못해. 그렇게, 한 부위가 더 자라지 못하고……. 세츠나에게 책을 읽어주던 록온이 잠시 헛기침을 했다. 벽에 기대서 록온이 책 읽는 것을 무심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세츠나가 말했다. "힘들면 그만 읽어라. 나는 상관없다." 그러나 록온은 책을 덮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읽어주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이다. "아니, 약속은 약속이고." "나는 약속한 적 없다만." 수면, 휴식을 취하기 위한 사실에 남을 들여서 자기 시간을 내 줄 약속을 할 턱이 없다. 슬슬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세츠나는 록온을 노려봤다. 읽던 책을-밝은 색 표지에 그림이 그려져 있고 글씨도 크고 삽화도 있었다-페이지가 넘어가지 않게 손가락을 끼워서 접고 록온은 세츠나를 쳐다보았다. "그렇지만 야, 사람한텐 교양도 중요한 거야." "허구적인 이야기가 무슨 쓸모가 있나. 가서 자라. 정 필요하면 나중에 내가 찾아 읽겠다." 세츠나는 이야기를-그러니까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다. 소년병에게 소설이 무슨 쓸모가 있고 건담 마이스터에게 소설이 무슨 쓸모가 있으랴. 그 이야기를 들은 록온은 성장기 청소년에게 필요한 게 영양소뿐인 줄 아느냐며 오늘은 소설 읽기의 즐거움을 시범보이겠노라며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아아, 이렇게 삭막해서 이걸 어따 써먹는대. 알겠다 알겠어. 그럼 나 간다." 짐짓 투덜거리며 세츠나의 사실을 나서려는 록온을, 갑자기 세츠나가 불러세웠다. "그런데 록온 스트라토스." "응?" "왜 하필 그런 흉흉한 이야기를 골랐나?" 록온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 했다. "아, 이거? 글쎄. 내가 어릴 때 좋아하던 동화라 그런가. 근데 뭐가 흉흉해?" "전족이란 거 말이다." "아, 그거?" 그건 생각을 못 해 봤는데, 하며 록온은 피식 웃었다. "좀 끔찍하지?" 세츠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불균형은 좋지 않다. 저건 성장에 좋지 않아. 저런 걸 권하는 네 센스에 문제가 있다." "아, 역시 그런가." 별 생각 없이 가져왔는데 역시 세츠나는 참 성실하다며 록온은 웃었다. 그 웃는 얼굴과 잘 자라고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록온의 뒷모습이, 별 것도 아닌데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 복수를 입에 올리며 평소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격앙된 모습을 보인 그 일 후에 세츠나는 왜 그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지에 대해 막연히 생각해 보았다. 록온이 복수를 운운하며 자신에게 보인 표정이, 말이, 겨누었던 총구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는지, 그 후의 반응이 충격적이었는지, 아니면 온 사방에서 자신들을 향해 퍼붓는 세계의 악의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해서인지 딱 떨어지는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오래 단련된 감은 무의식 중에서 이유를 찾아냈던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사소한 것을 기억할 리 없다. 복수를 다짐하고도 오래 살아남는 건 정말로 모진 놈 아니면 운이 좋은 놈 뿐인데도. 그리고 그것을 모를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복수를 위해 테러리스트가 된 주제에 세상에서 테러가 제일 싫었다고 했던가.
"그런 일도 있었다는 거지." 세츠나의 손에는 얇은 책이 들려있었고, 옆에는 록온이 앉아있었다. 아니, 죽은 록온이 아니다. 그의 이름을 물려받았을 뿐, 전혀 다른 시간, 전혀 다른 공간을 거쳐왔고 이제 록온 스트라토스라는 똑같은 이름을 지닌 다른 사람만 하나 남았다. 이 록온이 한숨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갑자기 왜 그 이야기를 하죠?" "이 책이 그 책이라서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리고?" "한 가지 쓸모는 있었다." "뭐였나요?" "문학은 고도의 비유라는 데 동의한다." 록온은 세츠나가 펼친 페이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자라지 못한 발은 나머지 를 이기지 못하고 죽는 거지. 다른 것들은 다 자랐는데, 딱 하나가 그 사람의 목숨줄을 잡는 거야. 딱 하나가. 그와 함께 태어난 자와, 그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본 자가 서로 마주보았다. 그 다음에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 모를 말이 허공에 울렸다. "아, 정말. 그런 사람이었지."
--------------------------------------------------- 오래 머릿속에서 굴리던 소재인데 생각만큼 글이 나오지 않아 좀 열은 받습니다만, 지금 안 쓰면 못 쓸 거예요. 확 쓰고 치워야지. ......나중에 리뉴얼하겠다고 난리 쳐도 말리지 마시고.
23화 네타를 듣고 제일 먼저 연상한 게 전족이었지요. 그리고 더블오 2기 네타를 듣고 세츠나와 라일 디란디를 한 데 넣어보았습니다. 시작과 끝을 각각 아는 사람들끼리 사람 하나에 대한 추억을 공유한다는 게 어쩐지 끌려서 그만. (아니 저기 티에리아가 들어가겠어요. 알렐루야가 들어가겠어요. 처음엔 알렐루야였는데 생각해 보면 알렐루야는 그 복수 이야기 못 들었잖아요.)
못 쓰는 원인이 뭔지 알았으면 부지런히 뭐든 써야죠. 재주가 없으면 노력이라도 해야지. 며칠 전 웹서핑을 하다 번뜩 떠올랐습니다. 물론 악의 쌍둥이들이 크게 공헌하셨습니다.
-체인질링? -응, 아일랜드 전설인데 요정이 와서 아이를 바꿔치기 하는 거야. 엄마아빠가 나갔다 와 보면 집엔 요정의 아이만 남아있대. 갈색머리카락을 목 뒤로 쓸어넘기며 남자는 말했다. 소년은 그 말을 하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뜬금없이 말을 꺼낸 남자는 소년의 얼굴을 빤히 마주보았다. 도대체 저 이야기를 꺼내는 저의가 뭘까. 바로 질문을 하는 대신 소년은 말을 받아쳤다. -왜 바꾸는데? -모르지. 아이가 탐이 났으려나. 말을 꺼내놓고 딴청을 피우기를 잘 한다. 저 남자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겉만 봐선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소년은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바뀐 아이는 어떻게 되지? -가족들이 눈치를 채고 수를 써서 아이를 데려오기도 하고 가끔 점잖은 요정이 아이를 안고 찾아오기도 하지. -요정의 아이인지는 어떻게 아나? -아이가 아주 못생겼다고들 하더라. 아니면 말을 걸어보면 대답을 한다네 글쎄? 걷지도 기지도 못하는 게 말을 하면 어느 엄마가 안 놀라겠냐고.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옛날 이야기를 하듯 소년을 향해 말을 건넸다. 별 거 아닌 전설일 뿐이다. 저 남자의 고향이 아일랜드라고 했던가. 그러나 남자의 녹색 눈은 소년의 등 뒤 쪽의 무언가를 보는 듯, 시선이 붕 떠 있었다. -그런가. 그런데 그 이야기는 지금 왜 하지? 누구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인지, 왜 지금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인지 소년은 궁금해졌고, 남자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글쎄, 갑자기 생각이 났어. 어째 기분이 묘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아니, 아무 일도. 그런데 갑자기 이게 생각나더라. 남자는 시선을 먼 곳에 준 채로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서 마치 석고조각상 같은 얼굴이었다. 소년은 남자의 이마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손을 뻗어 넘겨주었다. 머리카락 그림자가 사라지는 동시에 남자가 눈을 깜박였다. -안색이 좋지 않아. -그치? 남자는 파리한 얼굴로 억지로 입끝을 당겼다. -참 이상하지? 그런데 그 이야기가 생각난 후로 기분이 계속 이러네. -아까 그 이야기 말인가. 소년은 남자가 두서없이 꺼낸 이야기를 떠올렸다. -누군가 해 준 이야긴가? -아니, 생각이 안 나. 남자는 소년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가 드물게 보여주는 열의에 조금 놀란 탓인지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어려서 잃어버린 형제라도 있었나? -알잖아, 나랑 여동생이 있었는데 여동생이 없어진 건 다른 일이었고. 남자는 말끝을 흐렸다. 소년은 더이상 묻지 않았다. 이 남자는 테러로 가족을 잃고도 오늘 이 시간까지 자신의 앞에서 한 번도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뭔가 정말 큰 일이 있는데 본인도 그게 뭔지 모르나 보다. 소년은 남자의 등을 한 번 가볍게 두드렸다. -라일,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좀 쉬어라. 정신적인 문제라면 스트레스가 원인일지도 몰라. -응, 고마워, 윌. 라일 디란디는 무뚝뚝하지만 성실하고 상냥한 후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셀레스티얼 비잉의 본함선이 붕괴되었다는 뉴스가 나오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어린 소년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어린 소년에게 며칠 전 읽은 책에서 본 이야기를 해 주고 있었다. -체인질링이라고 그런대. -근데 엄마가 어떻게 자기 애를 못 알아보지? -그러니까 요정이 하는 짓이지. 그런데 라일, 내 생각에 진짜 못된 요정은 따로 있는 것 같아. 이야기를 듣던 어린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요정인데? -아이를 아예 데려가버리는 거야.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애 엄마가 금방 알텐데? 바보도 아니고? -아냐. 엄마도 아빠도 형제들도 아무 것도 모르는 거야. 이야기를 하던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가장 질이 나쁜 시도라고 말하려는 듯. -몰라? -응. -왜 모르는데? -야 그래서 아까 그랬잖아, 요정이 하는 짓이라고. -근데 어떻게 모르는 거야? 애가 있었다는 걸 모르는 거야? -응. 아이가 있었다는 것도 잊고 그냥 사는 거야. 뭐가 없는 것 같이 허전한데 그게 뭔지 모르는 거지. 그래도 그냥 까맣게 잊고 살아. 그러다 가끔은 뭔가 떠오를지도 모르지. 지나가다 어린애 옷을 보거나, 유모차를 보거나 하면 잊었던 뭔가가 기억날락 말락 하는 거야. 그런데 아무 것도 떠오르지는 않고, 마음만 답답한 거지. 이야기를 듣던 소년은 이야기를 하던 소년을 째려보았다. 이 자식, 요새 뭘 읽고 다녔길래 이딴 이야기나 쓰고 있는 거지? -야, 닐. -왜, 라일? -너 어디 가서 나랑 쌍둥이란 소리 하지 마라. 나도 너 같은 놈으로 보일까봐 겁난다. 닐은 라일의 옆구리를 한 대 주먹으로 쳤고 라일은 닐의 가슴팍에 발을 날려주었다. 이게 지금 해 보자는 거냐며 둘은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고 곧 여동생이 뛰어들어와 엄마, 오빠들이 또 치고 받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곧 뛰어올라온 어머니의 손에 각각 한 귀를 잡힌 채 끌려간 쌍둥이는 왜 싸웠냐는 질문에 싸운 건 기억 나는데 이유가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해 한 대씩 쥐어박혔고 쥐어박히면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