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손
2. 목소리
이 글을 드리는 것은, 어쩌면 당신이라면 내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아니 당신은 잘 알고도 남을 거요. 이 글 속에 나오는 인물에 대해서도 잘 알테고, 아마 나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을테지. 끝까지 잘 읽어줬으면 좋겠소. 다 읽고 나서 찢건 구기건 당신 마음이지만 설마 유치하게 그런 짓은 하지 않겠지? 꼴통.
아무튼 그자-이름은 모르오. 그냥 중년 남성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요. 아무튼 그자는 내 활동에 돈을 대 주는 일종의 후원자요. 내가 하는 일은 잘 알테지. 나는 음악으로 사회를 바꾸는 운동을 하고 있었소. 그자가 내게 돈을 대 주는 이유는 글쎄, 아마도 도락거리 중 하나였겠지. 그런 자들의 속셈은 이해하기 힘들단 말이오.
그 문제로 그자의 집을 찾아갔는데 그자가 어쩐 일인지 내실로 초대하더라고. 문을 연 순간 안에서 하얀 어깨가, 그리고 하얀 목이 이쪽을 쳐다보더이다. 그게 어떤 건지 알겠소? 사람이 아닌, 하얗고 아름다운 것이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소. 까만 머리카락이 마치 3월 버드나무가지처럼 앞머리에서 찰랑거려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하얗고 창백한 남자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소. 입고 있는 기모노는 확실히 여성용, 그것도 요시와라의 오이란이나 입을 법한 물건이었소. 보라색 바탕에 노랗고 빨간 나비를 그려넣은 고급품이었지. 벽에 기대어 다리를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있어서 하얀 발목이 이쪽을 향해 드러나 있었지. 참 아름다운 발목이었어. 종아리에서 발목으로 떨어지는 선이 칼날처럼 둥글지도, 곧지도 않게 떨어져 점점 가늘어지더니 발목에서 움푹 들어가 그늘을 이루고 있었고, 아래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발등과 그 끝에 맺힌 발가락이 보였지. 입을 거 다 입고 있는데도 선정적이더라 이거요. 그자가 웃으며 소개하더군. 이번에 우리 집에 오게 된 다카스기 신스케라고. 정확히 말을 안 했지만 남자의 정체는 확실했소. 남첩. 그자는 자기 첩을 나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게야.
-다카스기 신스케. 그쪽은?
그는 당당한 태도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소. 꿀릴 것도 숨길 것도 없다는 태도였지. 내가 이 작자에게 몸을 팔고 있기로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듯한 태도였소. 나는 그 신스케라는 자가 마음에 들었소.
나는 별 일도 없으면서 신스케를 보기 위해 종종 그 집을 들락거렸소. 물론 주인의 허락이 있었지. 그 주인은 내가 처음 그 집에 갔던 날 저녁 나를 불러 한 가지 부탁을 했소. 내가 그림을 그렸던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나? 그자는 내 경력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나를 불렀던 거요. 신스케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어려울 거 없었지. 다만 그를 제대로 그릴 수 있느냐가 문제였소. 내가 난색을 표하자 그자는,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소. 그러면 그 발만이라도 어떻게 안 되겠냐고.
그 발에 대해서라면, 나 자신도 할 말이 많았기에 승낙했소. 무엇보다 신스케의 발을 계속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지. 그런데 그자가 그러더군. 기왕 그릴 거면 다카스기에게 어울리는 게 좋지 않겠냐고. 그러면서 옛날 책을 하나 꺼냈소. 우키요에를 묶어놓은 것이었는데 거기에 그려진 그림에 대해서 좀 이야기하고 싶소.
그림 속의 여자는 툇마루에 앉아 진흙이 묻은 오른발을 손수건으로 닦고 있었소. 상반신을 왼쪽으로 기울여, 쓰러지기 직전인 몸을 한 팔로 지탱하며, 왼발 끝으로 살포시 땅을 밟고, 오른쪽 다리를 < 모양으로 구부려 오른손으로 발을 닦고 있었소. 쓸데없는 동작은 하나도 없이, 온 몸이 힘의 균형에 의해 아슬아슬하게 지탱되고 있었지. 왼팔을 툭 치면 금새 쓰러져 버릴 듯한 자세였소. 온 몸이 유연하게, 어떤 힘에 의해 버티고 있어 묘한 긴장감이 묻어났소. 바닥에 닿아있는 다리는 발등과 정강이가 수직을 이루어, 살짝 오므라든 엄지발가락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고, 오른손이 구부러진 오른다리를 지탱하고 있었는데 미묘한 자세라 손을 조금만 잘못 움직이면 바로 무너지고 말 자세였지만, 발가락 사이를 짚은 손가락으로 겨우 균형을 잡고 있었소. 다리는 손가락 사이에 걸린 작은 발가락을 빼내려는 듯, 용수철처럼 파들파들 떨리며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지.
내가 이 그림을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를 아시겠소? 예술에 조예가 없는 건 알겠지만 하품이나 하지 말고 잘 상상해 보시오. 저 그림 속 여자를 재현할 수 있는 사람은 다카스기 신스케 한 사람 뿐이었소. 어떤 여자도 저런 그림 속의 여자와 같은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 수는 없을 거요. 그자는 그걸 알고 있었던 거지. 그러고보니 온갖 변태같은 놀음에 통달했다고 뒷세계에서 소문이 짜아한 자였소. 바꿔 말하면 사람의 몸을 어떻게 가지고 놀아야 가장 즐기기 좋은가를 잘 알고 있었다 이거지.
신스케는 한숨을 쉬면서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듯 의자 위에서 자세를 취해 보였소. 하나 분명히 해 둘 것은 신스케는 그자한테 요만큼의 관심도 없었다는 거였소. 잘 알겠지만 그자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이 세상엔 한 사람도 없지. 아, 하나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군. 관심이라기보다 증오에 가깝지만 아무려면 어떻소. 그런 증오를 받는 사람도 얼마 없을 게요. 좋아하지 말고 마저 읽기나 하시오. 신스케가 자세를 취하는 순간, 신스케가 그림이 되었고 그림이 신스케가 되었소. 신스케는 검의 달인이고 특히 거합술이 특기라고 하지. 유연하고 몸놀림이 빠르다는 건 그만큼 몸을 잘 다룰 줄 안다는 거고, 그렇지 않고서야 보통은 흉내도 내기 힘든 저런 자세를 우아하고 아름답게 취할 수 없을 거요. 순간 그자의 열망을 이해하고도 남겠더군.
발이 예쁘지 않으면 저런 자세를 취해봤자요. 신스케의 발등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발가락 다섯 개가 M자처럼 달라붙어 가지런히 나 있었지. 찹쌀로 떡을 빚고 발모양처럼 찍어 끝을 가위로 잘라 다듬으면 저런 하얀 발가락이 나올 거요. 그 끝에는 발톱이 박혀있었소. 나 있는 게 아니오. 나 있는 건 보통 사람 발톱을 이야기하지. 신스케의 발톱은 거기 박혀있는 거요. 태어나면서부터 투명한 보석을 박아서 나온 게지. 그 발가락을 잘라 실로 엮으면 실로 근사한 목걸이가 될 거요. 그 왼발의 엄지발가락이 다리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며 발가락 끝으로 바닥을 디디고 있는 거요. 발등에서 발가락 전체의 팽팽히 당긴 피부가, 마치 이쪽을 조소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소. 발에 표정이 있다면 웃으려나? 그러나 그 발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금류가 날개를 오므리고, 온 힘을 모으고 있다 비상하려는 찰나의 모양과 매우 비슷하오. 꼭 맹금류가 먹이에게 보내는 조소가 있다면, 그 발이 짓는 표정이 그런 조소요. 보는 사람의 눈에는 굉장한 위협감을 주는 동시에 저 발목을 꺾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게 하는 그런 것 말이오. 다른 한 발은 오른손으로 지상에서 3척 정도의 높이로 당겨져 있어서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소. 웃는 것 같은 얼굴이지요. 요염한 여자가 춤이라도 추는 듯한 교태가 흐르는 표정이었소. 발가락과 발등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젖혀져 그 경계에 오목한 곡선이 마치 눈웃음처럼 이쪽을 보며 웃고 있었소. 생각해보시오. 위협하고 비웃는 동시에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는 웃음을 짓는 걸. 당신이라면 아마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무엇보다 그 발의 아름다움에 결정적인 요소는, 평생 아무 것도 밟아본 적 없는 듯한 상아같은 하얀 발이었소. 아니, 상아는 그런 묘한 색은 못 내지. 상아에 피가 통하면 그런 색일까. 오히려 꼭 그것 같소. 당신에게 먹힐 비유를 하자면, 딸기에 우유를 부어놓은 것 같은 색이었소. 하얀 발에, 뒤꿈치와 정강이엔 발그스름한 기운이 돌고 있었지. 옛 에도 풍류인들은 겨울에도 버선을 신지 않았다고 하지요. 나는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소.
이쯤 가면 나는 그자를 위해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나를 위해 그린 거라고 봐야겠지. 하지만 그 그림은 완성을 보지 못했소. 그자가 병이 들었거든. 갑자기 무슨 병이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소. 아마 신스케가 무언가 했을 거라고 하지만 아무도 증거는 잡지 못했소. 그자는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쇠약해졌고, 그럼에도 신스케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소. 앉지도 먹지도 못하는 노인네가 신스케가 없으면 금방이라도 죽을 듯 난리를 피우던 걸 꼭 보여주고 싶군. 신스케가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서 노인의 얼굴을 발로 밟아주거나 발가락 사이에 우유나 미음을 적신 솜을 끼워 노인의 입에 대 주거나 하지 않으면 자지도 먹지도 않았소. 그게 지겨워지면 그자는 나를 불렀지. 그리고 나에게 부탁했소. 나 대신 저 발 밑에 엎드려 그 발을 만지고 핥고 그 발에 머리를 조아려보라고. 처음에는 당연히 싫은 척 했으나 나라고 별 수 있었겠소. 그 발에 입술을 대는 순간, 그자의 기분을 이해했소. 아무튼 노인은 그러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자의 유언은 별 거 없었소. 딱 한 마디였소.
다카스기, 그 발로 내 얼굴을 밟아주게.
신스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자의 얼굴에 발을 올렸소. 이미 신스케는 그 집을 떠날 준비를 마쳤지. 한 재산 챙겨서 그 돈으로 무슨 혁명을 한다던가.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그자의 주머니를 털고 있었다던가. 그건 당신도 아는 이야기일거요. 그자의 가족과 후계자들이 그 꼴을 보며 어이없이 굳어있는 동안 그자는 행복한 표정으로 숨을 거뒀소. 아마 극락이라도 봤겠지. 보라색 나비들이라도 날아다니는.
백야차 당신이라면 이해하고도 남겠지. 이걸 보고 너무 좋아하지만은 말았으면 좋겠소. 자기 소유물에 대한 자랑을 하고 싶소? 그러나 신스케가 당신 소유물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당신의 신경을 나는 이해를 못 하겠소. 왜 당신 거요. 신스케는 우리들, 귀병대의 것이오. 그러니 웃기지 말고, 이걸 보며 질투와 기분나쁨에 화내고 분노해 보시오. 나는 당신이 화내는 게 아주 좋소.
모년 모월 모일, 가와카미 반사이.
추신 : 요즘도 신스케는 맨발로 다니오. 당신은 못 보지? 안 됐군.
'3. 다리'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후미코의 발>에서 따왔습니다.
일부 표현은 책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제가 변태가 아니고 작가가 변태 중의 변태입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칼을 닦고 있는데 등 뒤에서 낮잠을 자던 놈이 별안간 일어나 달려들었다. 저항도 못 하게 팔부터 걸고 넘어지더니 옷깃부터 헤치고 덤볐다. 어깨와 목 사이를 입술과 혀로 한참 문질러대더니 더운 김이 목에서 귀로 올라왔다. 소름이 돋아서 뿌리치려고 했으나 허리와 어깨를 감싼 팔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목과 가장 가까운 등뼈가 도드라진 부분을 깨물더니 다시 혀가 목 위로 올라왔고, 목덜미께에 계속 숨을 내뿜어대는 근질거리는 감각이 기분나쁨을 넘어설 무렵, 살이라도 발라먹을 듯 집요하게 움직이던 이와 혀와 입술은 뒷목 전체를 포식한 감상인 듯 짧은 입맞춤을 남기고 떨어졌다.
즈라가 머리카락 바로 밑에서 등뼈까지 벌건 자국이 났는데 어디서 못된 벌레한테 물리기라도 한 거냐며 혀를 찼다. 못된 벌레는 못된 벌레지. 옆을 노려보니 긴토키가 딴청을 피웠다. 즈라가 한참 수선을 떨어대고는 치료를 해야할 것 같다며 약을 들고 오는데 긴토키가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보급이 어려운 통에 약을 구해왔더니 이게 무슨 짓이냐고 즈라가 노발대발했으나 긴토키는 건성으로, 미안한 거 같기도 하다며 말도 안 되는 사과를 했다. 즈라와 대화를 하며 이쪽을 보더니 씩 웃었다. 어려서 키우던 큰 개가 토끼 목을 물어뜯을 때 꼭 저런 눈을 했던 것 같다.
망할 백발이 어쩐 일로 즈라랑 사카모토랑 심각하게 지도를 펴 놓고 앉아서 이야기 중이었다. 어지간히 심각한지 내가 등 뒤까지 다가가도 지도에서 눈을 떼지를 못했다. 평소 같으면 바로 반응을 했을 텐데.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고, 놓치면 안 된다.
놈이 내 기척을 눈치채기 직전 잽싸게 복슬복슬한 머리통을 끌어안고 양손으로 머리를 잡았다. 하얗고 폭신한 머리카락이 매끄럽게 손에 감기는 감촉이 마음에 들어서 머리가 헝클어지도록 헤집은 다음 톡톡 두드렸다. 머리카락 특유의 탄성이 손을 살짝 밀어내는 것 같아서 몇 번 더 두드리고는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들어 보니 즈라도 사카모토도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팔 안에서 쌍욕임이 분명한 거센소리의 조합이 들렸다. 반격의 기회를 놓쳐 분하다 이거지. 머리를 한 번 콱 물어준 다음 놓았더니 긴토키가 열받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으르렁댔다. 지금 싸우자는 거냐, 나 곱슬머린데 뭐 보태줬냐 애초에 니 대가리 만지면 지랄지랄하는 주제에 내 머리를 습격하다니 너 정말 매너 없다, 니가 뭔데 남의 머리에 손을 대냐 기타등등. 웃기고 있네. 매너 없는 게 누군데. 내가 이 이야긴 안 하겠다만 니놈 머리가 햇빛에 반짝이는 게 하도 예뻐서 만져보려고 손을 내밀자마자 내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으르렁 거린 게 십 몇 년 전의 네놈이다. 내가 네놈을 두들기기라도 했냐, 그저 예뻐서 무심결에 만져보려고 했을 뿐인데 그걸 죽이겠다고 으르렁대다가 사과도 안 하고 그냥 갔겠다. 기억도 못 하고 있지, 저놈은. 다시 저놈 머리에 홀리면 내가 인간도 아니라고 이를 갈며 맹세했는데도 그 망할 머리카락은 예뻤어. 은빛이 꼭 달님 같았던, 가끔 네가 꺼내 보여주던 칼날만큼이나 반짝이던 머리카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고. 수업 중에 뒤를 보면 네놈이 햇빛을 받으며 졸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이 내 눈을 찌를 듯 빛이 났고 불꽃놀이 하던 밤에 달빛을 받은 머리카락이 불꽃 같아서 얼마나 신기했던지. 제일 열받는 건 네놈이 아무리 정떨어지게 굴어도 그 빛나던 머리카락만은 변함없이 예뻤다는 거야. 꿈에까지 나와서 투명하게 빛나던 그 망할 머리카락이.생각하면 할 수록 열받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저게 뭐가 예쁘냐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라서 더 열받았다. 자기는 막 더듬고 잡아당기고 덥석덥석 끌어안으면서 죽어도 자기 몸은 못 만지게 하는 것도 짜증났지만 그걸 만져보고 싶어하는 내가 싫었고 내가 자기 머리카락에 손대고 싶어하는 걸 알면 입이 찢어져라 웃어댈 놈도 싫었다.
아무튼 작은 소원도 이루었고, 긴토키가 열받아 하는 꼴도 봤겠다, 오늘은 이걸로 만족하자. 간만에 기분좋은 하루를 보내겠군.
>오늘은 신파 주의
끔찍하도록 길고, 사람을 지치게 하는 전투가 끝나고 겨우 귀병대를 데리고 돌아왔다. 아니, 일부가 없어진 귀병대를 끌고 돌아왔다. 그러니까 나는 온전하게 돌아오지 못했다. 일부가 죽은 채로 돌아와 무엇을 애도할 틈도 없이, 즈라에게 다녀왔다고, 칼 갈 숫돌을 달라고 말하던 중 세상이 빙글 돌았다. 지금 눈을 떠 보니 막사 안이다.
어쩐지 서글프다. 뼈마디가 모두 어긋난 듯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살이 모두 피 먹어 눅진해진 솜이 된 듯 몸이 축 처졌다. 멍하니 천장을 보며 한참을 그냥 있다 정신이 조금 돌아와 보니 아까부터 옆에 누가 누워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누가 내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무려 옷은 헤쳐놓고.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움직이지 못하는 거였다.
"비켜."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가.
"놓으라고."
힘이 들어가지도 않는 손으로 내 어깨를 감고 있는 손을 밀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지쳐 늘어져 있는데 덤벼드는 미친 놈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놈이 도리어 한숨을 쉬며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곱슬머리가 맨살을 간지럽혔다.
"좀 가만히 있어 봐."
"......"
평소처럼 놈이 날뛸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놈은 얌전하게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가만히 있었다. 놈이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게 간지러웠지만 이상하게도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잠시만 좀 이러고 있자."
.......이건 대체 뭐 하자는 거지. 놈은 무해한 어린 동물처럼 내 가슴에 얼굴을 대고 조용히 숨쉬고 있었다. 평소엔 그다지 가슴엔 관심이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아 한참을 멀뚱하니 그놈 하는 양만 보고 있자니 놈이 입을 열었다.
"너는 심장이 뛰는구나."
한 대 패야겠다 싶어 주먹을 드는데 놈이 갑자기 나를 아주 세게 끌어안았다. 잠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대체 왜. 그제서야 나는 이놈이 나보다 먼저 전투가 있다고 나갔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대체 언제 돌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겪은 것 만큼의 뭔가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이놈은 대체 얼마나 뭘 거기 놔두고 왔을까.
그제야 거기서 죽은 녀석들이 하나씩 떠오르고, 상실감이 가슴 속에 구멍을 크게 뚫어놓은 것처럼 찬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추웠다. 나는 내 가슴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온기를 찾고 있는 놈의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팔 안에서 놈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놈도 많이 지치고 피곤했겠지. 하루 정도는 이런 날도 있을 수 있나보다. 놈도 사람인데 위로가 필요한 날도 있겠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놈이 볼을 부벼댔다. 따뜻하니 기분도 좋고, 조금 두근거리기도 해서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졸려서 흐려진 머리로 한참 그러고 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망할 놈이 어쩐지 얌전하더라니 혀로 유두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새끼야, 뭐 하는 짓이냐, 놔!"
"간만에 반응도 좋은데, 그냥 갈 수 있나."
일부러 들으라는 건지 할짝할짝 소리가 나도록 핥아대는 데 기도 안 찬다. 어느새 놈이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아누르고 내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치유는 무슨. 내 스스로 화를 불러온 것이 제일 짜증났다. 체념하고 한숨을 쉬자 그게 승낙의 표시로 보였는지 놈이 허리춤으로 손을 내렸다. 머리 검은 짐승 키우지 말라더니 옛말 그른 게 하나 없네. 색이 희다고 속으면 곤란하다.
어쨌건 죽은 놈들에 대해서 잠시나마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는 건, 놈이 내 옆에서 코를 고는 통에 다시 잠에서 깬 뒤에 깨달았다. 여기까지 계산한 걸까. 그럴 리가.
>저질개그 주의.
등 뒤에서 나타나서는 무뎌졌다며 나를 비웃는 놈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사람의 기척이 전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내게 칼을 겨눌 때, 산 사람 같지 않게 차갑고 선뜩한 기운이 느껴져 정말로 오싹했다. 뱀 같은 것들이나 저렇게 서늘할 텐데 어떻게 사람이. 늦은 여름밤의 뜨끈한 바람이 불고 있는데도 놈의 손이 맞닿은 부분은 비현실적으로 차가웠다. 정말 죽어 없어졌구나. 내 앞에 있는 건 다카스기 신스케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망령이로구나. 나는 놈을 쳐서 쓰러뜨리고 겐가이 영감이 폭탄을 터트리기 전에 도착하기를 바라며 정신없이 달려갔다. 모든 것이 끝나고 보니 역시나 놈은 없어졌다. 유령을 때려봐야 먹히지 않는 건가.
하지만 놈을 친 주먹에는 여전히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 후로 종종 놈을 떠올리면 손에 무언가 차갑고 매끄러운 것이 휘감기는 것 같은 착각이 들며 등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차가웠다. 지금까지도 차갑다.
간혹 그 차가운 손이 떠오를 때면 마치 놈이 아직도 내 등 뒤에서 음산하게 웃으며 칼을 겨누고 있는 것 같다. 이 역시 착각이겠지. 하지만 귓전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내 손에 닿던 놈의 차가운 피부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마치 내 손이 놈이 된 것처럼.
"......그래서 뭐. 이게 내가 아닌 밤중에 못 볼 꼴을 보게 된 거랑 무슨 상관인데?"
"말귀 못 알아먹기는. 이게 그거라고? 차가운 걸로 만지면 예민해진다며? 그래서 좋더라니까. 시원한 김에 잠 안 올 때나 꼴ㄹ......캑!"
"오냐, 내가 그 손가락을 죄다 분질러주마. 이리 내라."
"싫어, 남자로 태어난 즐거움 중 하나라고! 그리고 오른손 없으면 못 할 것 같냐? 방법은 많다고."
"이새끼 결국 내가 딸감이란 거잖아. .......그래, 오에도를 부수기 전에 네놈부터 죽여야 순서가 맞는 것 같다. 이리 와라."
"오, 네 쪽에서 불러주는 거냐? 좋네. 그럼 오른손 대신 실물이랑, 어허 말로 하자!"
"그 나불대는 혀부터 뽑아주마. 오늘 어디 죽어봐라."
이상 늦은 밤 술집에서 혼자 한 잔 하던 테러리스트 모 씨가 남자화장실 문을 열었다 문고리가 고장난 것도 모르고 그 아래층 바에서 스트립쇼를 보다 뭔 마음이 났는지 화장실에 틀어박혀 미스 오른손과 긴밀한 시간을 보내던 모 백발 해결사를 만나 피 튀기는 난투극을 벌이게 된 사연이었다. 참고로 끝나기 직전이었고, 그래서 마침 열심히 망상하던 대상의 이름을 부르다 그 대상이 문을 열고 나타난 김에 매우 즐거워하며 이번엔 실물과 하자고 덤벼들었다가 화장실 바닥에 처박히고 난 다음에 이어진 대화라고 한다.
"사람이 힘들면 치유가 필요한 법이야, 알잖냐. 나도 그렇다니까? 전황은 나빠지고, 식량보급도 나날이 어려워지고, 이어지는 전투로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고. 못 먹고 못 먹으니 당연히 씻는 것도 사치고.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으면 이상하지. 그런데 가늘고 낭창낭창 잘 빠진 게 옆을 슥 지나가더라 이거야. 같이 못 씻고 못 먹고 굴러서 턱엔 수염 자국이 시커멓고 눈 밑엔 다크서클이 겹겹이 끼고 입술은 터서 까슬까슬하고 얼굴은 핼쓱하고 머리고 몸이고 피땀으로 엉망인데도 그놈의 허리 하나는 백만냥짜리더라고. 아 글쎄 피를 한 바가지 뒤집어써서 진바오리를 한 손에 벗어들고 그 목도 파이고 어깨도 파인 민망한 민소매만 위에다 걸치고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찢어진 틈으로 보이는 허리가 그렇게 뽀얄 수가 없더라니까. 그 기분을 알겠냐?
아니 처음엔 그냥 뽀얗고 가는 게 돌아다니길래 어이쿠 작다 싶어서 그냥 잡아 봤지. 아 세상에 무슨 사내새끼가 허리가 두 손안에 들어오게 가느냐고. 허리를 잡은 손이 손끼리 맞닿을 지경이더라니까. 이런 건 처음 봤다고. 야 선생님이 그러셨잖아. 호기심이 인류 문명의 원동력이라고. 이런 신기한 허리를 그냥 넘어갈 수 있나. 즈라야, 내 마음 알겠냐? 순수한 호기심이었다니까? 이해하지? 응?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중인환시리에 다카스기를 쓰러뜨린 다음 더듬었단 말이냐! 파렴치한 놈! 그러고도 자네가 사무라이인가!"
"야, 누가 들으면 내가 치한인 줄 알겠다? 난 그냥 한 팔에 쏙 들어오는 허리 라인을 눈과 손으로 감상하고 하는 김에 입술도 좀 대 보려던 것 뿐......커헉!"
"뭣이라, 자네 어떻게 다카스기에게 그럴 수 있나! 내가 그 녀석을 어떻게 키웠는데!"
"아, 때린 데 또 때리지 마, 악! 아프다, 윽, 아프다고! 아까 다카스기한테 죽도록 터진 자리야 거기! 그리고 네가 다카스기 엄마냐, 쿠헉!"
"이딴 사무라이 내가 수정해 주겠다! 수정 펀치!"
"장르가 달라 임마!"
9.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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